총리는 무엇으로 존재하는가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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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적 권한은 대통령 버금... 현실적으론‘총대나 메는 자리’



이회창 국무총리의 갑작스런 사임으로 국무총리의 비중과 역할이 정치권에 쟁점으로 떠오르고 있다.

민주당에서는 아예 임시국회를 열어 이 문제를 별도로 따져보자는 주장까지 하고 있다.
국정을 결정하는 데 국무총리를 소외시킨 것,구체적으로는 안보조정회의 같은 기구를 만든 것이 합법적인지 분명히 시비를 가려보자는 얘기이다.

 법적으로 국무총리는 ‘대통령을 보좌하며 행정에 관하여 애통려의 명을 받아 행정 각부를 통할’(헌법 86조 2조항)하고‘대통령의 명을 받아 각 중앙 헹장기관의 장을 지휘? 감독’(정부조직법 15조 1항)한다. 또한 국무위원 임명제청권과 해임건의권도 갖는다(헌법 87조 1~3항). 국무위원에 대한 인사권을 가지며 모든 국정 현안에 대해 대통령의 명을 받아 집행하도록 돼 있는 것이다. 법적으로만 따진다면 국무총리는 대통령에 버금가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다.

소신 펼치면 해임된다?
 그러나 과거 이같은 법적인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겠다고 나선 총리는 한 사람도 없었다. 그리고 유일하게 문제 제기를 한 이총리는 사임하고 말았다. 그러면 앞으로 이같은 모순은 계속돼야 하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다.

 안보와 통상외교 문제는 대통령과 관계 장관, 그리고 청와대 외교안보팀이 결정하고 총리는 국내 행정에 전념하는 것이 관례였다.
 그러나 세계가 국제화 시대로 들어서면서 그같은 역할 분담은 이제 유효하지 않게됐다.
국내 문제와 안보 왜교 문제를 더 이상 따로 떼어 생각하기 힘들게 된 것이다. 당장 우루과이 라운드와 농업정책은 불가분 관계에 있다. 통상 왜교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지 못하면서 총리가 국내 행정을 제대로 잡음 없이 추스르기는 어려운 형편이다.
 사정이 이렇게 되자 총리의 법적인 권한과 현실적인 힘의 괴리는 더욱 두드러져 보인다.

특히 책임 문제가 불거져 나올 때는 모순이 확연하게 드러난다. 지난번 황인성 총리는 쌀개방에 대한 책임을 지고 경질됐다. 쌀개방 문제가 정권의 도덕성 시비로까지 확산되자 총괄적인 책임을 지고 물러난 것이다. 그러나 관례에 비추어보면 통상 ? 외교 문야의 실책을 이유로 총리를 경질한다는 것은 모순이다.

통상  외교 분야에 대해 총리는 실질적으로 아무런 결정도 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이회창 총리가 지난번 우루과이 라운드 이행계획서 수정과 관련해 청와대로부터 국민에게 사과하라는 요구를 받은 뒤 강하게 반발했던 것도 같은 맥락이다. 권한은 없으면서 책임만 무거운 데 대해 문제를 제기한 것이다. 만약 이총리가 이번에 총리의 권한에 대한 소신을 강하게 개진하지 않았더라도 언젠가는 책임을지지 않아야 할 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사임해야 했을지 모른다.

 청와대 관계자들은 이번 이총리의‘경질’을‘대통령의 통치권에 도전했기 때문’이라고 풀이했다. 그런데 주목할 사실은,통치권에 대해서는 헌법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다는 점이다. 박형상 변호사는 최근 국회에서 열린 인권관계 토론회에서“대한민국 헌법 어느 조항에도 나와 있지 않은 통치권이란 개념이 지금 우리 국정 전반을 짓누르고 있다. 통치권이라느 권위주의 발상을 우리 머리 속에서 쫓아낼 때 문민 시대는 비로소 열리게 되는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아무튼 현재는 법적으로 보장돼 있는 국무총리의 권한은 무시되고, 법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은 통치권만 무소불위의 힘을 발휘하고 있는 꼴이다.

‘대통령 통치권’은 권위주의 발상
 게다가 김대통령의 독특한 국정운영 방식도 문제를 꼬이게 하는 데 한몫 거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청와대롸 행정부 요직을 두루 거친 여권의 한 인사는“대통령과 총리의 갈등이 표면화한 것은 김대통령의 통치 방식과 무관하지 않다”라고 비판한다. 대통령의 국정 운영 방식에는 △권력을 기능적으로 분사내 힘을 모아가는 형 △완전히 분산해 책임지고 일하게 하는 형 △분산은 하되 결정은 혼자 하는 형  △분산도 안하고 결정은 혼자서 하는 형 등 네 가지가 있는데 김대통령은 네 번째 경우에 가깝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총리처럼 개성이 강하지 않은 총리라도 일하기가 매우 어렵게 돼 있다는 애기이다.

 어찌됐든 이번 이총리의 사임은 변화하는 새 시대를 맞아 총리의 권한과 역할을 새롭게 정립해야 한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있다. 만약 이대로 이총리만 사임하고 문제가 마무리된다면 총리느 말 그대로‘총대나 메는 자리’로 굳어질 것이다. 과장해서 말한다면 지금 총리가 하는 일 중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가 결정하지도 않은 일에 대해 국회에서 얻어맞으며 답변하고,또 그 일에 대한 책임을 통감하며 국민에게 사과하거나 사임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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