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의 미학이 꾸민 신화”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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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비평가 5인이 말하는 'X세대란 무엇인가‘



 서울시 마포구 성수동 홍익대 근처 ‘피카소 거리’. 관능적 욕구를 뜻하는 ‘LUST'라는 대담한 이름을 내건 카페에 일단의 비평가(혹은 비평가를 자처하는) 무리, 이른바 ’쉰 세대‘ 5명이 기웃거리며 들어오기 시작한 것은 4월21일 오전 11시께였다.

 30대 초반의 나이인, 일벌레형 40대(라고 말하면 반발할 사람이 있겠지만, 3공 이래 그들은 그렇게 내몰렸다)와 자기 만족형 20대 사이에 끼여 이도 저도 아닌, 어정쩡한 세대의 특성을 지닌, 조직의 쓴 맛이나 개인의 단 맛에 익숙하지 못한 ‘얼치기 세대인 이들은, 누구보다도 X세대의 특질이나 문화 경향에 대해 잘 파악하고 있고 잘 풀어낼 수 있는 이론적 무장이 되어 있으면서도, 새 세대 용어로 ’잘 나가는‘ 카페 의자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그들의 이야기를 시작하려는 것이 매우 거북하다는 듯 연신 담배를 피워댔다.
 
 김종엽 일단 X세대가 존재하느냐, 하지 않느냐로 좁힌다면 분명 존재한다고 말하겠다. 한국 사회는 인구학적 변동이나 특정 연령층 사람들이 가진 기본적인 경험 구조의 동질성 같은 것들로 10년단위로 세대를 끊어 왔다. 우연인지 모르겠지만 6ㆍ29나 4ㆍ19 혹은 광주 민주항쟁 같은 것이 없었던 세대, 그런 세대가 존재하게 되었다. 그러나 문제는 그런 세대를 X세대로 부른다는 현실이다. 신세대론 혹은 X세대론, 또는 X세대 담론이라고 하는 것과 그 담론이 지칭하는 것과는 구분해야 한다.

 X세대 자체를 분석하는 것은 방대한 조사를 필요로 하는 것이고, 아주 섬세한 조사가 이뤄지지 않는 한 ‘이것이 X세대이다’라고 하는 현실 자체를 얘기하기는 어렵다. 이런 차원에서 우선 X세대론을 말한다면 어떤 데서 그런 이야기들이 나왔느냐 하는 것을 우선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차적으로는 광고업계에서 나왔고, 이차적으로는 신문ㆍ방송등 저널리즘 일반이, 거기에 글줄이나 팔아서 먹고사는 문화 비평가들, 여기의 우리 같은 ‘떨거지들’이 그것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개별 광고회사 처지에서 보면, X세대라는 세대가 있고 그 세대를 반영하는 광고를 만드는 것으로 보이지만, 거시적 안목에서 보면 모든 광고회사가 신세대와 개별적으로 접촉한다. 모든 광고회사가 그런 식으로 움직이면, 한 광고회사가 가진 이미지 조장 메커니즘이 한 세대를 창출하는 형태를 가지게 된다. 저널리즘이나 텔레비전 연속극 제작자도 만찬가지다. 자기들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한 세대를 만드는 결과로 작동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미디어는 그런 과정을 촉진한다.

 전찬일 X세대라는 용어가 인기를 끌 수밖에 없는 이유는 신세대라는 말이 너무 평범하기 때문이다. 신세대는 과거에 늘 있어온 ‘영 제너레이션’‘뉴 제너레이션’의 다른 말이기 때문에 차별성이 없다.

 X세대의 특성은 가치 지향적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오락 지향적이고 표피적ㆍ현상적인 것에는 지나칠 정도로 적극적이지만, 정치 같은 것에는 무서울 정도로 무관심하다. 깊이 있게 어떤 것을 고민하고 모색하는 것 자체를 혐오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단순히 그냥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그 자체를 싫어한다.‘왜 그러느냐’ 하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분명 X세대는 존재하고, 이를 규명하는 노력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X세대는 개방적인 태도를 취하면서도 상당히 보수적으로 나타났다. 단적으로 말해 변화를 두려워한다는 것이다. 개성이 강하고 자기 표현을 잘하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모험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좁은 범위 안에서만 왔다갔다 하는 것인데, 부모로부터의 정신적 독립은 요구하지만, 경제적 독립은 생각지 않는다. 그래서 부모가 내치려고 하면 달라붙는다. 이것이 한국 역사상 가장 가처분 소득이 높은 세대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그런 이중적 가치와 모순이 있다. 그들을 이야기 할때 가장 중요한 것은 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가 등장하고, 범람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들은 비디오와 함께 살아온 세대이다. 바로 그 점이 신세대와 X세대를 구분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강헌 세대라는 것은 실존하기는 하지만 정리하기는 불가능한 개념이 아닌가 한다. X세대도 보통 명사로서의 신세대에 특수한 한 형태이다. 그런데 이 보통성과 특수성의 경계 지점에 철학적ㆍ사회적 근거가 별로 없기 때문에 얘기할 때 갑갑할 수 밖에 없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이미지 추적을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우선 X라고하면 ‘미지수’와 ‘부정’의 의미가 있다. 이 미지수적 성격과 부정적 태도가 상정하는 것은 <말콤 엑스>에서의 폭력적 이미지이기도 하고, 침묵 시위할 때 마스크에 X자표시를 하듯 침묵이기도 하다. 여기서 우리는 X세대의 침묵과 폭력의 변증법을 생각해 볼 수 있다.

 80년대 말에 압구정동에 대한 보고서가 많이 나왔다. 여기서 중요한 현상의 하나는 국민학교 아이들이 ‘졸부들의 궁전’에서 포르노 문화에 오염되어 가는 것이었다. 이것이 자체 정화력을 가지고 90년대로 넘어왔다. 그 때 압구정동에서 중학교 3학년에서 고등학교 올라가는 아이들이 ‘또래 문화’에 속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문화적 절박감 속에서 <시계 장치 속의 오렌지>라는 LD를 돌려보는 일종의 ‘컬트적 붐“을 형성했다. 그런데 이 영화는 비디오로 나오지 않았기 때문에 오로지 LD로만 즐길 수 있었다. 여기서 일단 계급적 특성이 드러난다. 그것은 그 당시 이미 집에 LD를 즐길 하드웨어가 있었다는 것이다. 도대체 60년대말 미국의 이상한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폭력적 이미지로만 가득찬 컬트 영화가 무려 30년이 지난 한국에서, 이제 15세에서 16세로 넘어가는 아이들에게 왜 붐을 가져왔을가. 나는 이러한 점들에 대한 사회학적 해석이 가능하다면 바로 그들을 X세대라 부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80년대 초반만 해도 나이키 신발과 기차표 신발 사이의 문화적 갈등은 엄청나게 컸다. 나이키 신발을 사기 위해 소년들이 절도를 저질렀다는 수많은  기사가 당시 신문 사회면을 메웠다. 그런데 기차표와 나이키 사이의 계급적 대립은 전반적인 소비 수준 상승으로 사라져 버렸다. 탄광촌 아이가 저금통을 깨서 나이키를 살지언정 소비 수준에 의한 구분은 사라진 것이다. 따라서 X세대의 구체적 징후들은 다극화ㆍ다양화해 나가면서도 과거처럼 표준 편차가 넓었던 지점들이 좁혀지고 수렴되고 있다. 그것이 바로 수렴되는 논리다. 한 곳으로 모여드는 지점에서 문화산업의 논리가 있다. X세대의 문제도 문화산업의 논리로 풀어야만 한다.

 이 모든 소비 행위ㆍ문화 행위 들은 바로 자본주의 문화산업의 발전ㆍ성장 과정과 궤를 같이하고 있다. 90년대에 이야기되는 문화산업은 인간의 기본적인 의식주를 모두 통폐합하고 있다. 먹는 것은 생존에 꼭 필요한 필수 아미노산과 단백질을 섭취하는 행위가 아니라, 자기 문화적인 것을 정형화하는 행위로 바뀌었다. 그렇게 결합하게 된 것이 아른바 다국적 혹은 메이저 문화산업의 한 형태이다. 가령 영화를 만드는 워너 브라더스가 소속돼 있는 워너그룹은 ≪타임≫과, 워너 뮤직과, 케이블 텔레비전, 팬시 산업을 총망라하고 있다. 우리 어린이들을 ‘까악’소리 나게 만드는 월트 디즈니도 워너그룹 총회에서는 말석에 앉아야 한다. 이렇게 거대한 규모의 문화적 행위가 집결하는 것이다. 이런 문화산업의 전략들이 새로운 가수요를 창출하는 구조를 만들어낸다.

 X세대를 규정하는 모든 징후 혹은 행동들의 근거는 체계화할 수도 없고, 논리정연하거나 예측이 가능하지도 않다. 왜냐. 바로 그것이 문화산업의 논리이기 때문에 그렇다. 비관적인 얘기를 하고 싶어서가 아니라 이것이 현실이다. 하나의 그룹, 혹은 오피니언 리더인 몇 사람이 하나의 조류를 이끌고 갔던 80년대 중반까지와는 너무나 다른 양상을 보이고 있다. 문화산업의 논리를 지구적 지배력을 가지고 변방 나라들에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래서 X세대는 문화산업의 거대화ㆍ공룡화 과정, 소비 행위를 지배하는 전략의 형성 과정과 직접 연계된다.

 서영채 신세대라고 해서 록 카페에 아무나 들어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록 카페 입장을 거부당한 신세대가 이구동성으로 말하는 것은, 록 카페에 들어갈 수 있느냐 없느냐를 결정하는 최종심급은 나이가 아니라 패션이라는 것이다.

 1855~1900에 나온 주목할 만한 예술상의 조류가 7개라고 한다. 그런데 70년대 10년 동안에 생겨난 예술 조류는 매직 리얼리즘부터 시작해서 14개이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한 세대라고 하면 보통 30년이다. 그런데 30년이 한 세대이기를 그친 것이 불과 얼마 전인데도, 이제는 10년의 데케이드 개념도 통하지 않는다. 이 세대의 폭은 갈수록 좁아지고 있다. 이런 변화의 엄청난 가속도가 현상적인 세대론의 중핵이라면 본질은 과연 무엇이겠느냐. 무엇이 이런 변화를 가속시키느냐를 따져볼 때 가장 먼저 꼽을 수 있는 것이 상품미학의 논리이다. 광고산업이나 패션 등이 모두 애써 추구하고 있는 것은 이미지 메이킹, 상품의 미학화 이다.

 한 세대의 오피니언 리더들이 정말 자생적인 것이냐, 아니면 만들어진 것이냐에 대해 얘기할 필요가 있다. X세대는 실체가 아니라 ‘메타 담론’의 차원이다. 즉 X세대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X세대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X세대라는 무정형의 실체, 그 누구도 자기를 X세대라고 규정하지도 않고, 나는 X세대라고 자처하는 사람도 없을 터인데 많은 사람이 X세대를 이야기하고 소비 욕구를 불러일으킨다. 이런 상품미학의 논리가 핵심이다.
 
 고길섶 거리는 당대의 문화 정세를 예민하게 반영한다. 어떤 거리를 점령하고 있는 주인공들이 거리의 어떠한 기호들 속에 파묻혀, 어떠한 텍스트를 생산해 내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다. 80년대의 거리는 군부 독재에 대한 저항의 주도권을 대중적으로 확보해 나간 거리였던 반면, 90년대의 거리는 소비 문화의 기호들이 강력한 주도권으로 대두되고 있다. 즉 투쟁의 깃발을 든 주체가 변혁운동의 침체와 함께 거리의 주도권을 소비 문화의 기호들에게 넘겨준 셈이다.

 그런데 이 거리에서의 주체는 당연히 신세대, X세대이다. 이들이 공통성은 이들로 하여금 스스로 의적적ㆍ무의식적으로 자기 도취하며, 스스로를 과장하고, 자발적으로 자기를 신격화하는 ‘자아지시적 블랙홀’로 안내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X세대는 상품을 직접 소비하지 않고, 광고 그 자체만 소비하더라도 이미‘X세대의 신화’에 빠져든다.
 이른바 세상이 변했다는 것인데, 이를 정확히 표현하면 계급 투쟁의 조건들이 변했다는 것에 다름아니다. 따라서 그들이 현실적으로 어떻게 운동해 나가고 있느냐, 이들에 대한 과잉 담론을 어떻게 정화할 것이냐가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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