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은 고향 하늘에 떠 있었습니다”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4.05.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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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일교포 작가 양석일씨 ‘뿌리 찾기’ 동행취재 / 제주도에서 사촌과 첫 해후



제주에는 ‘고사리 장마라는 것이 있다. 한라산 중턱에 지천으로 자라나는 고사리들이 막 자라기 시작할 무렵인 매년 4~5월께 많은 비가 내리는 것을 일컫는 말이다. 비록 여름의 본격장마는 아니더라도 다른 때에 비해 많은 비가 내린다.

 梁石日씨(55)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제주 땅을 밟던 날도 그랬다. 제주 상공은 두터운 구름으로 덮여 있었고, 빗줄기가 비행기 창을 두드렸다.

 착륙하기 위해 비행기가 두터운 비구름을 뚫고 들어가는 순간, 비행기가 흔들렸고, 양석일씨의 눈망울도 심하게 흔들렸다. 그는 그토록 그리던 땅을 찾아가면서도, 어디에 착륙할지 몰라하는 이방인을 닮아 있었다.

 사실 제주가 그의 고향은 아니다. 그의 고향은 일본 오사카(大阪)일 뿐. 제주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고향일 따름이다.

 양석일. 지난해 그의 소설 《택시 광조곡》과, 택시 기사들의 이모저모를 엮은 실용 도서 《택시 드라이버 일지》가 영화 <달은 어디에 떠 있나>로 각색되어 일약 유명해진 재일교포 작가.

 사실 국내에서 그의 소설 《달은 어디에 떠있나》(인간과예술사)가 출간되기 전만 해도 그에 대한 지식은 이 정도가 전부였다. 그의 소설보다는 영화가 더 유명했으며, 그보다는 같은 재일동포 감독 최양일씨가 더 화제가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모르고 있었다. 영화 《달은 어디에 떠있나》가 만들어지기까지는 무려 13년이란 세월이 걸렸다는 사실을. 양석일씨의 소설이 출간되자마자 최양일씨가 찾아와 영화로 만들겠다고 요청해 허락을 받아 갔다는 사실을.

교포 취직 쉬운 택시기사로 10년
 사실 양석일씨와 최양일씨는 묘한 인연으로 얽혀 있다. 두 사람 모두 조총련계 재일동포였다는 사실도 그렇고, 부모들의 고향이 제주도라는 것도 그렇다. 더구나 영화로 인해 동시에 유명해졌으니, 그 두 사람이 이러한 현세 뒤의 전생 어디쯤에선가 질기고 두터운 끈으로 동여매어졌음 직도 하다.

 50줄을 훨씬 넘긴 지금에야 제대로 작가로서의 대접을 받기 시작한 양석일은 어떤 사람일까.

 그는 40년 오사카에서 아버지 梁俊平씨와 어머니 李春玉씨 사이에서 5남매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러나 그는 어린 시절을 홀로 보냈다. 누나 둘과 여동생 둘이 어려서 병으로 죽었기 때문이다. 아버지는 오사카에서 ‘가마보코(어묵)’ 공장을 했기 때문에 경제적으로는 그런 대로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아버지는 대단한 거구로 술을 무척 즐기는 편이었다고한다.

 소년 양석일은 고등학교 졸업후, 오사카에서 가까운 고베(神戶) 대학 문학부를 지원했으나 떨어지고 말았다. 그런 그가 본격적으로 문학 수업을 닦은 것은 18~23세 때였다. 시인 구로다 아키오(黑田喜夫)와 작가 노마 히로사토(野向宏) 등이 그에게 영향을 준 사람들이다.

 25세 되던 해에 미술출판업을 시작했으나 29세가 되던 무렵 실패했다. 그 일로 많은 빚을 져 오사카에서 살게 되지 못하게 되어, 지방에서 한때 커피 전문점을 열었으나 다시 망했다. 토쿄에서 한국인 친구의 일을 돕기도 하고 이리저리 흘러다니면서 방랑 생활을 했다. 이 시절 그는 “거의 4개월 동안 물만 먹고 산적도 있었다”고 말한다.

 31세가 되던 70년, 18~22세에 썼던 시를 모아서 시집《   는 어디에》를 출판함으로써 일본 문단에 등단했다. 그러나 결혼과 함께 아이가 태어나고 생활에 쫓기느라 문학과는 다시 거리가 멀어졌다. 어느날 그는 공원 벤치에서 택시기사 모집 공고가 난 신문을 보고 택시 기사 노릇을 시작했다. 그는 “보통 교포라면 가게의 허드렛일도 맡겨 주지 않고, 취직도 못한다. 그러나 택시는 일이 너무 힘들어, 항상 기사가 모자랐기 때문에 교포도 취직할 수 있었다”라고 당시의 분위기를 전한다.

 이후 그는 내리 10년동안 도코에서 택시 기사로 생활했다. 10년째 되던 신년 밤, 손님을 태우고 심야의 거리를 달리던 그의 택시가 10t 트럭에 받히는 사고를 당했다. 손님 3명 중 1명이 죽고 2명이 중상을 당하는 대형사고였다. 그도 한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퇴원후 마음 같아서는 택시 일을 그만 두고 싶었으나 막상 갈 곳이 없었다. 그래서 복직했는데 3개월 후 다시 사고를 당했다. 이번에는 굳은 결심으로 퇴직했다. 그가 다시 문학수업을 하고,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그 때부터였다.

 그 결실이 81년에 나온 소설 《택시 광조곡》이다. 그 이후 그는 《단층해류》《밤의 강을 건너라》등을 발표했으나 그다지 주목을 받지는 못했다.

일본 NHK 텔레비전 제작팀도 같이 와
 그러다가 그의 소설이 최양일씨에 의해 영화화하였고, 《택시 광조곡》은 일본에서 최근 까지만 20만부 이상이 팔려 나가게 되었다. 그의 서울행과 제주행에는 일본 NHK텔레비전의 다큐멘터리 제작팀이 동행했다. 일본에서 그에 대한 관심도를 짐작할 수 있게 하는 대목이다.

 이것이 그의 간단한, 그러나 그의 55년 생애를 통괄하는 약력이다.
 제주도에서 그의 아버지의 고향은 서귀포시 중문 대포리 1864번지였다. 다만 중문 대포리라는 말을 들었다는 사실만 어렴풋이 기억하고 있을 따름이었다.

 따라서 그의 이번 제주행은 사실상 ‘뿌리찾기’나 마찬가지였다. 혹, 생존해 있을지도모를 그의 일가 친척을 찾아 나선.
 그가 이틀 밤을 묵은 곳은 서귀포 근처 삼방산 자락 바로 밑 조그만 어촌이었다. 그와 일행이 그곳으로 가는 동안, 비가 그쳤고 달이 조금씩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윽고 그를 태운 차가 삼방산에 도착할 무렵, 활짝 갠 밤 하늘에 별과 달이 맑은 모습을 드러냈다. 그달은 분명 그가 어떤 곳에 와 있는지를 환하게 비춰주고 있었다. 그 달빛 아래는, 흐드러지게 피어난 유채꽃밭이었다. 바로 거기가 아버지의 땅이었다.

 그 땅에서 그는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했다. 민박집의 응접실에서 새벽 3시를 넘기도록 소주 파티가 열렸다. 그는 들뜬 기분 때문인지 동행한 사람들이 따라주는 대로 맥주와 소주를 번갈아 마셨다. 그는 과묵한 성격이었으나 연신 웃는 낯으로 담소를 즐겼다.

 사실 그가 이곳으로 오는 과정이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그가 조총련계였으므로, 그를 초청한 인간과예술사의 곽의진 대표는 통일원과 안기부 등에 ‘대북 주민 접촉 승인서’를 받아야 하는 등 여러 곡절을 거쳤다. 최양일씨의 경우, 한국에 들어오기 전에 조청련계에서 민단으로 거취를 바꿈으로써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되었다. 사실 최양일씨는 양석일씨와 제주도에 동행하기로 약속돼 있었으나, 태흥영화사가 그를 붙잡는 바람에 약속이 깨어졌다.

 이튿날인 4월17일은 양석일씨에게 행운의 날이었다. 아침에 그와 일행이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바로 대포리 동사무소였다. 여기서 그는 먼지가 풀풀 날리고, 노랗게 변색된 호적부를 들추기 시작했다. 마침내 그는 아버지와 어머니의 명단을 호적부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일본 땅에서만 서로 얼굴을 맞대던 그들 일가족이 낯선 제주 땅, 그러나 고향인 그곳에서 다시 새롭게 조우하는 찰나였다.

 그는 동사무소 직원들의 협조를 얻어 그의 친척들도 찾을 수 있었다. 그가 찾은 친척은 여자 사촌동생, 즉 그의 아버지의 형님의 딸이었다. 올해 53세인 해녀 梁年壽씨가 바로 그였다.

 양연수씨가 바다로 ‘해녀질’을 나갔다는 말에 따라 그는 다시 바닷가로 나섰다. 거기서 그는 수십년 동안 잊어버리고 살았던 혈육을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마침내 해녀 여동생의 손을 꼭 잡았다.

 그의 소설 《달은 어디에 떠 있는가》는 곧 김희갑 작곡ㆍ양인자 작사ㆍ조용필 노래로 나올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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