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자는 왕이다”
  • 오민수 기자 ()
  • 승인 1994.05.1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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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 무한 경쟁 시대 돌입 … “생존 전략은 오로지 친절”



현실에서야 절대 그럴 리 없겠지만, 의사들 사이에선 ‘흰 가운을 입은 의사 앞에 서면 비록 자기가 대통령이라고 해도 고분고분해야 한다’는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한국에서 병원과 의료 소비자, 의사와 환자 간의 관계를 상징하는 말이다. 병을 앓는 자에게 병원은 곧 권력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그것은 저항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 일단 병원 문을 들어서면 누구든지 사회적 지위와 관계를 허물고 병원의 권력 구조 속으로 신속하게 편입하기 마련이다.

그 권력의 기울기는 담당 의사를 정점으로 저 아래의 환자에 이르기까지 아주 가파르다. 반면에 병원에서 의료진이 환자를 돌보고 치료하는 과정은 느려터졌다. 이것이 한국 의료계의 고질이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의학박사 김주환씨가 3년간 갑상선암과 투병하다 사망하기까지 겪은 형편없는 한국의 의료 서비스에 분통을 터뜨리며 《임상 투병 수기》를 써냈을 정도다. 의사조차 환자의 처지가 되면 ‘환자의 권리’를 누릴 수 없었던 것이다.

이처럼 한국의 병원이 환자에게 퉁명스럽고 고압적으로 된 까닭은 바로 경쟁의 무풍지대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사정이 달라지고 있다. 가만히 앉아서 환자가 찾아오기만을 기다리던 시절은 지났다. 바야흐로 전체 병원 업계가 무한경쟁 시대로 돌입하고 있는 것이다.

2차 진료기관으로 중급 병원의 선두주자 격인 서울 제일병원은 94년을 ‘변신의 해’로 정했다. 매달 첫째 월요일 이 병원의 원장 이하 전직원은 한 자리에 모여 ‘내가 먼저 변하자’는 구호를 외치고 각오를 다짐한 뒤 업무를 시작한다. 기업체에서나 볼 수 있는 풍경이다. 올해로 개원 30주년을 맞이한 이 병원은 급변하는 의료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원장단·고문  등으로 ‘변신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이 위원회에서 다룰 사안은 그야말로 병원내 모든 문제이지만, 당장 눈에 띄는 변화는 환자에 대한 서비스 강화이다.

4월1일부터 제일병원에서는 모든 직원이 자가용 출퇴근을 할 수 없다. 원장이라고 예외는 아니다. 자가용을 몰고 오는 환자의 편의를 위해서이다. 진료 시간은 올해 1월1일부터 오전 8시30분으로 앞당겼다. 그래서 의료진을 포함한 전 직원은 8시30분까지 자기 자리에 앉아 있어야 한다. 그리고 장시간 대기하는 환자의 고통을 줄이기 위해 그동안 부분적으로 시행하던 예약 제도를 올해 안에 전면 실시할 예정이다. 이미 운영하던 제도지만, 하루에 한 가지씩 주제를 잡아 환자와 보호자에게 각종 질병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던 의학 강좌를 더욱 강화했다. 의료진이 독점하던 정보를 공개함으로써 환자를 치료 과정에 끌어들이겠다는 것이다.

“이제는 병원도 변신하지 않고는 살아남을 수 없습니다. 내년부터 의료시장 개방으로 어떤 형식으로든 선진 의료가 한국시장에 진입하리라는 것은 뻔한 일이고, 한국내 병원끼리의 경쟁도 더욱 치열해질 것입니다. 규모로 경쟁하던 시대는 지나가고 환자의 만족도를 포함한 ‘의료의 질’로 경쟁하는 시대가 된 겁니다. 우리 병원의 변화도 바로 이런 시대 흐름에 따른 생존 전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제일병원 관계자의 말이다. 이러한 변화는 비단 중·소형 병원에 한정된 것은 아니다. 하지만 비대한 대형 병원의 자구 노력은 몸놀림이 가벼운 작은 병원보다 힘겹고 고통스럽다. 그래서 각 병원은 우선 조직 자체를 흔들지 않으면서도 비교적 손대기가 쉬운 ‘친절한 병원 만들기’에 골몰하고 있다.

호텔 개념 도입 … 보호자 없는 병원까지
그런 의미에서 《시사저널》이 국내 최초로 실시한 ‘의료의 질’ 평가에서 환자 만족도 부문 1위를 차지한 고려병원은 행복한 편이다(제230호 커버 스토리 참조). 《시사저널》기사가 나간 이후 의료진을 포함한 고려병원의 전 직원은 ‘Best 1'이라는 글씨를 큼지막하게 새긴 배지를 만들어 가슴에 달고 다닌다. △의료진 △기기 및 시설 △의료진 및 사무요원의 친절성 △진료 절차의 편리성 △병원의 제반 환경 등 다섯 항목에 관한 종합 평가에서 최고 점수를 받은 고려병원은 요즘 각 병원의 움직임에서 분명 앞서가고 있는 셈이다. 비록 환자가 주관적으로 느낀 점을 점수로 계산한 것이지만, 경쟁 시대에선 어쩌면 바로 이 점이 가장 중요할지도 모른다.

반면 암과 고혈압 부문에서 2관왕을 차지했지만 환자 만족도 부문에서 6위에 그친 연세대 신촌세브란스 병원은 요즘 전직원을 대상으로 친절 교육이 한창이다. 친절 교육은 1년 내내 이루어진다. 친절 교육에 드는 예산 2억3천만원도 이미 확보했다. 4월2일부터 병원장·의료원장·학장·중진 교수 등 고위층을 대상으로 우선 실시한 교육에서, 원로 의사들은 젊은 강사가 시키는 대로 환자에게 허리를 굽혀 깍듯이 인사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교육 과정에서 일부 원로 교수가 “의사가 진료만 잘하면 되지 그런 데까지 신경써야 하느냐”며 반발하기는 했지만, 대세를 어쩌지는 못했다. 그 대세란 ‘1등만 있고 2등은 없다’는 시장 경쟁 논리이다.

이처럼 병원이 무한경쟁 시대에 적응하려면 권력의 꼭대기에 서 있던 사람들이 스스로 권위 의식을 깨는 절차를 거쳐야 한다. 일종의 통과의례이다. “앞으로 수도권에만 약 1만5천 병상이 더 늘 예정이고 재벌 그룹이 앞다퉈 병원 업계에 뛰어들고 있는 상황에서, 스스로 변화하지 않으면 도태된다는 위기의식에 다들 공감하는 실정입니다. 병원 내에서 어느 누구도 이런 변화를 거역할 수 없을 것입니다.” 연세대 의대 한 교수의 시각이다.

요즘 기존 대학병원 관계자들의 관심은, 6월 개원하는 대우그룹의 아주대학병원과 10월 개원 예정인 삼성그룹의 삼성의료원에 쏠려 있다. 엄청난 자본, 기업식 경영기법, 첨단 시설과 장비, 국내외 우수 의료진 유치, 철저한 고객 서비스를 내세운 두 병원의 개원은 기존 병원 판도를 뒤흔들 만큼 위력적이다. 의료진의 수준은 제쳐놓더라도 두 병원은 한국 병원의 고질을 싹 뜯어고치겠다는 태세다.

우선 병원 자체가 환자의 동선까지를 고려해서 설계된 인텔리전트 빌딩이다. 두 병원 다 완전 전산화를 통해 종이 없는 병원, 즉 ‘3시간 대기 3분 진료’라는 한국 병원의 고질을 없애고, 간호사는 간호 업무에 전념하고 의사는 진료와 치료만 하게 함으로써 국내 최초로 ‘보호자 없는 병원’을 만들 예정이다. 친절은 기본이다. 물론 친절에 대한 보험수가는 없다. 그러나 친절하지 않고서는 병원 이미지가 좋아질 리 없다. 더구나 처음 문을 여는 것이다.

약 1천9백억원을 투자한 대우그룹의 아주대학병원(수원시 팔달구 원천동)은, 병원에 호텔 개념을 도입했다. 내부 인테리어도 호텔처럼 단장했다. 환자는 호텔에서 룸서비스를 받듯이 병실에 누워 수시로 의료진을 호출할 수 있다. 서울로 가는 지역 의료 소비자를 소화하겠다는 각오다. 서울 강남구 일원동 6만여 평에 들어서는 삼성의료원은 의료 서비스 면에서 국내 최초로 검진·입원·수술·퇴원을 당일에 끝내는 ‘낮 병동(Day-Clinic)’ 체제를 도입할 예정이다. 환자의 시간적·경제적 손실을 최소화하겠다는 뜻이다. 뒤늦기는 했지만 이제 불친절하기 그지없던 한국의 병원에도 서비스 질의 차별화를 통한 ‘고객 끌어들이기’ 바람이 불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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