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안법 진짜 파동은 이제부터 시작 /개혁 의지와 현실 조화가 문제 해결 관건
  • 이흥환 차장대우 ()
  • 승인 1994.05.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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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품 표준화 등 유통 전문화 시급하다”

농안법(농산물 유통 및 가격안정에 관한 법률)파동의 뚜껑이 억지로 닫혔다. 법 시행을 6개월 뒤로 미루는 편법이 동원됐다. 야당은 ‘위법’이라고 부채질을 해댄다. 정작 문제는 6개월 뒤에 예상되는 사태다. 청와대ㆍ농수산부ㆍ민자당의 정책 결정자들이나 도매법인ㆍ중매인 등 이해 당사자들 어느 누구도 6개월 뒤에 제2 파동이 없으리라고 장담하지 못한다.

 개정 농안법의 핵심은 중매인들의 도매업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자신들의 집단 이익을 단칼에 없애버리는 조처에 중매인들이 들고일어났다. 결과는 유통 기능 마비였다. 유통의 ‘정맥’이 멈춰버린 사태다. 정부는 일단 ‘혈액 순환을 시키고 보자’는 방법을 택했다. 집단 이익을 지키려는 중매인들의 집단 행동에 정부가 무릎을 꿇고 백기를 든 셈이다.

 그러나 유통 문제 전문가들 사이에서는 농안법 파동은 이제부터 시작이라는 시각이 우세하다. 개혁을 부르짖는 청와대와 기득권을 지키려는 유통 종사자 간의 불꽃튈 대립도 미완으로 봉인된 농안법 파동의 재폭발을 부채질한다. 중매인들의 집단행동은 신농정의 일환으로 유통 구조 개혁을 꾀했던 김영삼 정부의 뒷덜미를 내리친 셈이다. 정부가 발끈했다. 이번에는 중매인뿐만 아니라 도매법인까지 포함시켜 농안법을 전면 재수정하겠다고 벼른다.

 이 과정에서 농수산부 실무 담당자들만 죄인 취급을 당했다. 1년 전부터 농안법 시행을 예고했고, 중매인들의 집단 반발이 예상되었는데도 법 시행에 필요한 사전 조처를 취하지 않은 채 가만 엎드려만 있었다는 것이 죄명이다. 농수산부라고 할 말이 없지 않다. 유통 업무를 담당하는 한 실무자는 “농수산물과 공산품은 특성이 다르다. 유통 과정만 손댄다고 해서 유통 구조가 개선되지는 않는다. 부패되기 쉽고 생산량 변동이 심하며 상품의 규격화ㆍ표준화가 어려운 것이 농수산물의 특성이다. 유통 마진이 많은 것도 그 때문이다. 유통 구조를 개선하려면 상품의 표준화 등 선결 조건을 먼저 해결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가락동이냐 청량리냐 따라 포장 달라
 농수산물 유통 구조의 문제점이 지적된 것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다. 공용 도매시장 기능을 갖춘 가락동시장을 설립한 것도 유통 구조를 개선하려는 노력의 하나였다. 현재의 농산물 유통 체계는 크게 2원화해 있다. 하나는 공용 도매시장인 최대 규모의 가락동시장을 경유하는 이른바 제도권 유통이고, 다른 하나는 재래 시장이라 불리는 유사도매시장을 통하는 것이다. 서울의 청량리ㆍ영등포 시장이 2대 재래 시장으로 꼽히며, 야채나 과일 등 청과물 유통을 주로 담당한다.

 생산지에서 올라온 농수산물은 가락동시장 내의 지정도매법인에 상장됨으로써 유통의 첫 단계를 밟는다. 상장된 상품은 중매인과 매매참가인의 경매를 거쳐 소매상에게 넘겨지고, 이어 소비자에게 연결된다. 이것이 제도권 시장을 통한 유통 체계의 기본 골격이다. 이번 농안법 파동은 바로 가락동시장의 중매인들이 중매 업무, 즉 상장 물품의 경매를 거부한 것이 발단이 되었다.

 비제도권인 청량리나 영등포의 청과시장에는 지정도매법인을 통한 상장 과정이 없다. 생산자가 바로 위탁상에게 상품을 위탁하면, 위탁상은 중상이라 불리는 중간판매상에게 넘기고, 이어 소매상→소비자의 과정을 밟는다. 재래식 유통이다.

 재래 시장으로 가느냐 가락동시장으로 가느냐에 따라 산지에서 출하되는 상품의 포장부터 달라진다. 청과물 중 신선도 유지가 상품의 질을 결정짓는 딸기의 경우 같은 비닐하우스에서 재배된 것이라도 출하되는 과정에서 ‘제도권 딸기’와 ‘비제도권 딸기‘로 구분되는 것도 이원화한 유통 체계 때문이다(아래 상자 기사 참조).

 우선 가락동으로 납품되는 것은 규격 스티로폴 용기에 담아야 한다. 경매에 붙이기 위해 상품을 규격화하는 것이다. 이른바 ‘박스 딸기’다. 8㎏들이 박스 1개 값은 5백원. 이에 비해 재래 시장에 납품하는 것은 재래식 ‘양은’ 용기에 담아서 출하한다. 이른바 ‘다라이 딸기’다. 이 두종류의 딸기는 운임이나 인건비에서도 차이가 난다. 박스 딸기의 경우 운임은 적게 들지만(1개당 7백원선) 용기 밑바닥에서부터 가지런히 잘 깔아주어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많이 든다. 다라이 딸기는 속 모양새는 볼 것 없이 용기에 담은 후 겉모양 새만 추스려 뚜껑을 닫으면 그만이니 인건비는 적게 들지만, 그 대신 운임이 박스 딸기보다 비싸다(한 다라이 당 천원선).

 가락동 도매시장이든 재래 시장이든 대략 5단계를 거치는 위의 유통 체계는 난마처럼 얽혀 있는 전체 유통 과정의 극히 일부일 뿐 이다.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기는 하지만 그나마 제도화한 위의 두 갈래 유통 체계에 변칙적인 유통 관행이 끼여든다. 밭떼기가 대표적인 한 예다. 주로 도매인이나 중간판매상이 개입한다. 영등포 재래시장 ㅎ청과위탁상인 ㄱ씨의 말. “농민들이 농자금이 부족하니까 농작물을 수확하기 전에 출하선도금을 미리 받는 경우가 많다. 이른바 밭떼기다. 이 밭떼기 값은 정상적인 유통 체계의 공급 가격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변칙 유통인 셈이다. 주로 유사 도매 시장인 재래 시장으로 흘러들어 온다.”

 농수산물 유통 과정의 특징 중 하나는 일반 공산품과 달리 영세한 다수 생산자와 분산된 소비자를 연결하기 때문에 여러 경로를 거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대량 집합분산의 형식이다. 생산자와 소비자가 직접 접촉하는 재래식 5일장과는 극명하게 대비된다. 생산자→수집상→반출상→도매시장→중간도매상→소매상→소비자 단계로 유통되는 물량은 전체 유통량의 60% 이상을 차지한다.

 농수산물을 생산하는 영세 농어민 숫자는 93년말 현재 약 6백만명으로 추산된다. 지역적으로도 분산되어 있다. 생산량 조절이 쉽지 않다. 게다가 지난해처럼 냉해나 풍수해 등에 직접적인 영향을 받기도 한다. 생산량을 사전 계획으로 조절할 수 있는 공산품과는 기본적으로 조건이 다를 수밖에 없다.

“유통 기능도 생산자에게 맡기자”
 농안법이 겨냥하는 것 중의 하나는 농수산물의 가격 안정이다. 농수산물, 특히 양곡을 제외한 수산물과 청과류는 신선도에 따라 오전과 오후 가격이 달라질 수 있다. 또 생산량 조절이 쉽지 않은 탓에 과잉 생산했을 경우 가격 폭락을 막을 길이 없다. 반면 생산량이 조금만 줄어도 가격은 폭등하기 마련이다.

 농수산물의 유통 비용, 즉 유통 마진이 많은 것도 이러한 농수산물의 특징 때문이다. 생산량 조절이 어렵고 유통 과정에서 위험부담이 크다는 것은 곧 유통 과정에 개입하는 ‘손’이 많아진다는 것을 뜻한다. 가락동 시장의 도매법인이나 중매인, 재래 시장의 위탁상이나 중상들이 생산자와 소비자 사이의 유통 과정에 끼여들어 변칙 가격을 형성하는데 톡톡히 한 몫을 하는 것이다.

 농안법의 기본 취지 중 하나도 유통 구조의 최소화다. 중매인의 위탁 판매로 인한 도매행위, 경매가격 조작에 의한 매점매석, 밭떼기 등을 근절하겠다는 것이었다. 농촌경제 연구원의 조사 결과도 가락동 중매인의 위탁 판매 도매 행위가 평균 9%의 이윤을 남긴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유통업계 일부에서는 ‘유통의 전문화’를 주자한다. 유통이라면 곧 가격 조작과 폭리를 연상하는 인식이 없어져야 하며, 유통도 전문 분야의 하나로 자리잡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가 형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가락동시장 한 도매법인의 ㅂ씨는 “도매상ㆍ위탁상ㆍ중간상이라고 하면 무조건 도덕적으로 지탄 대상이 되는 사회 분위기에서는 정상적인 유통 관행이 정착되기 힘들다”라고 주장한다.

 지난해 4월 유통 정책을 담당하는 농림수산부의 한 고위 실무자는 유통 관계자들의 한 모임에서 자신이 구상한 유통 구조 혁신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 실무자는 ‘품목별 생산자 조직을 육성해 농어민들이 생산에서부터 수집ㆍ판매ㆍ수출에 이르기까지 일관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유통 구조 혁신의 핵심이라고 주장했다. 모든 유통 기능을 가능한한 생산자들이 직접 주관하게 함으로써 유통과정에서 발생하는 부가가치를 중간업자에게 돌리지 말고 생산자 몫이 되도록 한다는 구상이다.

 민주당 농수산위원회의 김영진 의원은 “정부가 공기능보다는 민간 위탁관리 체제를 도입해야 하며, 5배가 넘는 가락동 도매시장의 과포화 상태를 빨리 해소하기 위해 공영 도매시장을 확충해야 한다”라고 주장한다.

 94년 5월의 농안법 파동은 정상적인 유통체계 정착을 위한 몸부림의 하나다. 현실을 무시한 맹목적인 개혁 구호나, 기득권을 지키기 위한 집단이기주의, 정책결정 과정에서의 명분 찾기만으로는 왜곡될 대로 왜곡된 유통 질서를 바로잡기 힘들다. 농수산물 통계 자료를 작성하는 곳만도 다섯 군데가 넘는다. 유통 정보도 일원화해 있지 않다. 상품 규격화의 길은 요원하기만 하다. 경매제도도 아직은 정착 단계일 뿐이다. 재래 시장 기능을 무시할 수도 없다. 농안법이나 농수산물유통개혁 기획단 같은 법이나 제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법을 시행하고 기획안을 실천할 조건을 형성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 이번 농안법 파동이 남긴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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