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자대장경을 만들자”
  • 합천ㆍ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5.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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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판 대장경은 죽은 사상서” … 조계종, 개혁사업으로 전산화 지원 결정



 조계종 개혁회의는 최근 “불교를 바꿀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대장경 전산화”라는 해인사 대장경연구소 승려들의 작은 외침에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 지난 92년 해인사의 한 승려가 시작한 팔만대장경 전산화 사업이 최근 조계종 개혁회의를 통해 종단사업으로 내정된 것이다.

 팔만대장경 전산화 사업은 현재 경남 합천에 목판으로 보존되어 있는 국보 32호 팔만대장경의 모든 내용을 컴퓨터에 입력해, 프로그램을 만들고 한글로 번역하여 누구나 쉽게 찾아보고 연구할 수 있게 하는 일이다. 강식진 교수(부산대ㆍ중문학)는 “대장경을 그대로 목판 인쇄해 묶으면 왠만한 아파트에는 책상 하나도 제대로 들여놓을 수 없을 만큼 거대한 분량이다. 뿐만 아니라 거기에 담기 천여 가지 경저에 대한 색인 작업이 되어 있지 않아 입체적 분석은커녕 어디에 어떤 내용이 있는지를 찾기도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라며 전산화 작업을 환영하고 있다.

한국 승려들. 일본 신수대장경으로 공부
 대장경은 부처의 법문과 불자들의 규범 그리고 이에 대한 주석을 집성해 놓은 불교 성서로서, 팔만대장경(고려대장경)은 한문 경전 가운데서 가장 중요한 저본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보다 20여년 전에 중국에서 간행한 송판대장경이나 그보다 훨씬 후에 나온 일본의 신수대장경보다 체재나 내용이 월등하여 동양 삼국을 대표하는 대장경으로 꼽힌다.

 그러나 이와 같은 평가는 1900년대 신수대장경이 활자본으로 나오기 이전까지의 일이다.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술을 자랑하던 팔만대장경의 영예는 홀판 이라는 새로운 세대의 출판  문화에 적응하지 못함으로써 오래 전에 빛을 잃어버린 셈이다. 그런 의미에서 해인사 대장경연구소(소장ㆍ종림 스님)의 승려들은 팔만대장경이 상실한 동양 불교의 지도력을 회복하려는 결사단원들이라 할 수 있다. 종림 스님(50)을 비롯해 서강(38) 환암(35) 등 해인사 승려 4인은 지난해 초파일부터 ‘대장경 전산화에 불자 여러분을 모십니다’라는 켐페인을 펼쳐 왔다. ‘대장경 내용를 전자책(시디 롬)으로 발간하는 대불사에 불자 여러분의 동참을 바랍니다’라고 쓰여진 캠페인용 팜플렛에는 경판과 똑같이 새겨진 반야심경 판본을 10만원에 판매한다는 광고도 실려 있다. 그러나 8만 회원을 모집하겠다는 이들의 목표는 그다지 쉽게 이루어질 것 같지 않다. 지금까지 약 천명이 호응해 왔으나 인건비를 제외한 총경비 20억원에는 턱없이 부족한 실정이다. 92년 해인사 입구에 대장경연구소를 세우면서 종림 스님의 속가(俗家)를 팔아 마련한 컴퓨터 몇 대와 50명 가량의 자원봉사자가 이들이 확보한 재원의전부이다. 그러나 이들은 대장경 전산화 작업에 대한 몰이해야말로 가장 큰 장애물이라고 털어놓는다. 정보를 독점해옴으로써 기득권을 누려온 불교계의 몇몇 인사는 말할 것도 없고 불교계 내부에서조차 ‘우리보다 기술과 자본이 넉넉한 나라에서 완서한 후 사다 쓰는 것이 낫지 않는냐’고 반문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종림 스님은 “개혁회의에서 지원해 준다는 사실은 이 사업의 뜻을 바로 알아줬다는데 의미가 있다”고 말한다.

 대장경연구소의 전산화 산업을 맞고 있는 혜묵 스님은 “팔만대장경의 실패는 한국 대장경학과 한국 불교의 실패를 의미한다”라고 강조한다. 우리가 ‘나무덩어리’를 창고에 모셔놓고 썩어가게 내버려둘 동안 일본은 이를 저본으로 삼아 신수대장경를 재창조하고 활판 인쇄해 보급함으로써 ‘한국 불교의 교학을 완전히 일본 교학의 종속시켰다’는 것이다. 그는 “지금까지 세계에 전해지는 30여 종의 대장경 가운데 고려대장경은 그 자체로서 최고의 판본을 자랑하지만 이에 반해 한국 대장경학은 최하 수준에 머문다”라고 지적했다.

 그는 또 “일본이 신수대장경을 만들기 전까지 우리나라 고려대장경의 가치는 절대적이었다.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만든 신수대장경이 오히려 가장 완전한 대장경으로서의 고려대장경의 지위를 빼앗은 셈”이라고 말했다. 즉 한국은 물론 미국 중국 등 세계의 불교학은 1차 정보를 완전히 신수대장경에 의지함으로써 목판 고려대장경은 과거의 영광만을 안은 채 불교사적 의미를 잃게 됐다는 것이다.

 부처의 발만사천 법문이 들어 있는 고려대장경은 세계 어느 나라와도 다른 한국 불교의 사상이 들어 있는 불교 성서이다. 그러나 1천6백년의 전통을 가진 한국 불교는 현재에 이르러 고려대장경을 저본으로 하여 만든 일본의 신수대장경에 불교 공부의 대부분을 의지하는 실정이다. 종림 스님은 “한국의 학승과 불교학자들이 일본을 유학가는 것이 오늘날 한국 불교의 현실”이라고 말한다.

 고려대장경은 아직 활판으로 찍힌 적이 없다 그것을 읽고 싶은 사람을 합천으로 찾아가서 관광객을 상대로 한 장에 2천원씩 받고 파는 탁본을 16만장 사서 보든가 동국대학교 출판부가 이를 묶어 펴낸 방대한 분량의 전집을 구해야 한다.

 강식진 교수는 “한적(漢籍)의 목판을 이경하여 출판한 서적을 사거나 보관하여 사용해본 사람은 그것이 얼마나 지둔하고 부정확한지 알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한다. 활판으로 인쇄되거나 시디 롬에 담아 몸피를 줄이고 본문 색인을 통해 정보화하지 않는 한 고려대장경은 독서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죽은 사상서’라는 것이다.

 성태용 교수(건국대ㆍ중문과)는 “대장경의 전산화는 고려 때 팔만대장경을 조성하는 것보다 더 큼 의미가 있다”라고 강조한다. 이를 통해서만 한국 불교학은 거듭날 수 있다는 것이다. 고려대장경 전산화는 대장경을 원형 그대로 전산화는 것뿐 아니라 그것을 대장경과 비교하며 데이터 베이스를 구축하고 번역해야 한다.

 해인사 종림 스님은 고려대장경이 소멸되어 간다는 사실을 가장 먼저 간파한 사람이다. 그는 습기와 해충에 의해 대장경이 소멸되어 가는 속도보다 훨씬 더 한국의 가장 위대한 사상서 하나가 스러져가는 것에 주목했다. 그가 합천의 선방에서 몸을 일으켜 서울 광화문의 한 컴퓨터 학원을 찾기 시작한 것은 꼭 10년 전 일이다. 그는 8만1천3백40장의 경판이 새겨진 1천5백12가지 경전을 전산화하는 일이야말로 한글 창제 못지 않은 불사라고 생각한다.

“전산화하면 세계 불교학 기본서 될 것”
 그는 “고려대장경은 한역 대장경 중 최고 판본이지만 판본이라는 것은 필사와 활자의 중간 단계일 뿐이다. 우리나라가 세계에서 최초로 활자를 발명한 나라라고 하지만 고려대장경을 활자화하지는 못했다. 일본의 대정 신수대장경이 불교학의 기본 텍스트로 사용되는 것은 오로지 활자본이라는 이점 때문이다”라고 말하며 고려대장경을 전산화한다면 세계 불교학의 기본텍스트가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현재 일본ㆍ중국ㆍ대만은 한적의 전산화뿐 아니라 불전의 전산화를 놓고 경쟁을 벌이고 있다. 특히 미국은 세계 각국의 불교 경전을 전산화하여 하나의 불전으로 재편하는 일을 시도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팔리어ㆍ영어ㆍ범어 등으로 씌어진 경전을 하나로 통합하려는 것이다. 버클리 대학 랭카스터 교수를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세계 불전 재편 사업은 세계 불교학이 재구축되는 계기를 마련하는 것이다. 랭카스터 교수 등이 팔만대장경의 전산화 작업에 깊은 관심을 보이는 이유는, 수많은 종파가 경쟁하는 일본 불교에 비해 조계종이 이끄는 한국 불고가 이러한 통합 전자대장경을 내는 데는 훨씬 효율적이라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랭카스터 교수는 최근 “고려대장경을 콤팩트 디스크로 만드는 것은 중요하고도 시급한 일이다. 미국종교학회를 통해 팔만대장경 시디 롬을 출판하고 세계 시장에 보급하는 일을 맡겠다”고 할 정도로 전자대장경 구축에 열의를 보이고 있다.

 종림 스님은 세계 불교계가 전자대장경ㅇ이라는 새로운 시대의 경전을 탄생시키려고 하는 시도를 가리켜 ‘시간 싸움’이라 표현하고 있다. 그는 “앞으로 10년 내에 모든 것이 끝날 것”이라고 내다본다.

 세계 최초의 목판을 만들어낸 뒤로 7백년 동안 활판의 시대를 창고에서 견딘 팔만대장경이 세계 최초의 한역 전자 대장경으로 다시 태어날 날이 다가오고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해 한 불교학자는 “이것은 불사인 동사에 국사이다. 고려 때 그랬듯이 나라 전체가 참여하고 지원해야 한다”라고 강조했다.
합천ㆍ金賢淑 차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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