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우익 기관차 ‘방위족’
  • 도쿄ㆍ채명석 편집위원 ()
  • 승인 1994.05.26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가노 망언은 활동 재개 신호탄…‘자주국방’ ‘역사 재평가’ 줄기차게 주장



 나가노 시게토(永野茂門) 전 법무장관의 역사 왜곡 발언을 계기로 일본의 ‘방위족 의원’ 그룹에 대한 실체 파악이 시급한 외교 과제로 등장하고 있다. <산케이 신문>의 유아사 히로시(湯淺博) 기자가 펴낸 《국회 族議員》이라는 책에 따르면 ‘족 의원’이란 특정 행정 분야에 대한 전문 지식을 갖추고 이것을 무기로 업계나 관청의 이익을 대변하는 국회의원이다. 즉 업계나 관청의 개별 이익을 위한 발언하고, 정치력을 발휘하는 정치가라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족 의원은 단순한 정책통, 즉 전문가 집단이라기보다는 미국의 로비스트처럼 이익 집단에 가까운 존재이다. 따라서 특정 집단의 이익을 대변하는 족 의원의 존재는 자민당 정권 시절부터 큰 문제점으로 지적되어 왔다.

 족 의원들의 발판은 자민당의 정책 심의 기관인 정무조사회였다. 정무조사회는 농림ㆍ운수ㆍ상공 등 17개 부회로 나눠져 잇고, 소속 의원들은 3개 부회에 동시 등록이 허용된다. 때문에 그들은 당선 횟수에 따라 부회에서의 발언권과 영향력이 구분되었다. 대개 당선 4, 5회에 정ㆍ부회장으로 기용되었는데, 이 때쯤이면 자타가 공인하는 족 의원으로 행세할 수 있었다.

 자민당 정권 시절에는 각료 자리도 이 족 의원을 중심으로 배분되었다. 따라서 각료 경험자도 족 의원 그룹을 움직이는 중요한 존재이다. 예를 들어 하타 쓰토무(羽田孜) 총리는 자민당 정권 시절 ‘농림족 의원’의 대표주자 격이었다. 그가 85, 88년 두 차례에 걸쳐 농수산장관을 지낸 것은 바로 농림족 의원으로서의 영향력을 인정 받았기 때문이다.

 또 이권이 많이 얽혀 있는 건설ㆍ운수 업계의 족 의원으로는 다케시타 노보루(竹下登) 전 총리, 가네마루 신(金丸信) 전 자민당 부총재가 포진하고 있었다. 하타 연립 정권의 농수산장관에 임명된 가토 무쓰키 (加藤六月) 의원도 자민당에서 ‘운수족 의원’으로 활약했던 인물이다.

나카소네 전 총리가 세력확장 기틀 마련
 농림ㆍ건설과 함께 3대 인기 족 의원 그룹으로 분류되는 ‘상공족 의원’으로는 구마가이 히로시(熊谷弘) 현 관방장관이 유명하다. 또 한 후생ㆍ의료 분야의 정책을 좌우하는 ‘후생족 의원’으로는 하시모토 류타로(橋龍太郞) 자민당 정조회장이 있고 와타나베 미치오(渡邊美智雄) 전 자민당 부총재는 현 ‘농수산족 의원’의 보스 격이다.

 그밖에도 교과서 개편, 학교 행사 대 일장기 게양과 기미가요 제창을 강요해온 ‘문교족 의원’과 우정족 의원‘의 영향력도 대단하다. 이에 비해 최근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방위족 의원‘ 그룹은 일본 국내에서도 널리 알려진 존재는 아니다.

 앞서의 《국회 ‘족 의원’》이란 책에 따르면 방위족의원 그룹이 형성되기 시작한 것을 지난 60년대 후반, 이권과는 관계 없는 부처라는 이유 때문에 자민당 의원들로부터 홀대를 받아 처음에는 농수산족 의원 그룹의 4분의 1 규모였다. 그러나 그후 무기 국산화 방침이 결정되어 방위산업이 주목을 받자 ‘떡고물’을 말질 수 있는 분야로 크게 각광를 받게 되었다. 또한 87년에 방위비가 국민총생산(GNP)의 1%를 돌파하는 등 방위 예산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남에 따라 방위족 의원의 세력도 크게 신장했다.

 이 방우이족 의원 그룹의 기틀을 다진 것은 70년 1월부터 약 1년반에 걸쳐 방위청장관을 지낸 나카소네 야스히로(中曾根康弘) 전 총리이다. 나카소네는 옛 일본군 장교로 종군했던 인물로 일찍부터 헌법 개정과 자주국방론을 부르짖어 ‘위험한 청년 장교’라는 낙인이 찍혀 있었다. 그는 또 한때 ‘일본 단독 핵무장론’을 전개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그는 결국 방위청장관을 거쳐 총리에 임명되자 미키 내각 이래 방위비의 상한성으로 존중돼 오던 ‘GNP 1% 이하’ 정책을 간단히 포기해 버렸다. 군사 평론가 후지이 하루오(藤井治?)의 저서 《자위대에 적신호》는 이러한 활약으로 방위청장관 시절 나카소네의 정치 자금은 거의 4배로 늘어났다고 밝혔다.

 작년에 정계를 은퇴한 가네마루 전 자민당 부총재도 거물급 방위족 의원이었다. 가네마루는 77년부터 약 1년간 방위청장관을 지냈는데 그도 재임중 정치 자금의 새로운 루트를 개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가네마루는 퇴임 후 일본전략연구센터라는 방위 연구소를 설립하고 이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사장으로 있던 80년 8월 이 연구소는 일본의 방위비를 GNP의 2.5%로 끌어올려야 한다는 대담한 제안을 내놓기도 했다.

 일본전략연구센터 이사장 자리는 그후 오자와 이치로(小澤一郞) 현 신생당 대표간사에게 넘겨졌는데, 현재는 역사 왜곡 발언으로 법무장관을 사임한 나가노가 이사장을 맡고 있다. 그가 육상막료장(육군참모총장)에서 퇴임한 후 이 센터의 이사로 취임한 것이 인연이 됐다.

 그밖에 방위청을 거쳐간 역대 장관도 방위족 의원으로 방위 정책 결정과 예산 배분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지민당의 가토 고이치(加藤紘一) 의원, 작년 개헌 발언으로 방위청장관에서 물러난 신생당 소속 나카니시 게이스케(中西啓介) 의원을 꼽을 수 있다. 또한 자민당과 그곳에서 떨어져 나온 신생당에는 방위력 증강 정책을 지지해온 우파 의원들을 ‘감춰진 방위족 의원’으로 분류한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책의 저자로 유명한 이시하라 신타로(石原愼太郞) 전 운수장관이 그 대표적 존재이다. 우과 정객으로 널리 알려진 그는 자신의 저서나 기고문을 통해 ‘도쿄군사재판이 일본을 일방적으로 침략자라고 규정한 오류’를 공개적으로 비난해온 인물이다. 특히 나가노 전 법무장관이 “남경 대학살은 조작되었다”고 말한 것보다 4년 앞서 남경 대학살에 대해 강한 의문을 제기한 바 있다. 그는 90년 11월 미국 《플레이보이》잡지와 인터뷰에서“일본인이 남경에서 대학살을 자행했다고 하나 사실무근이다. 그 사건은 중국인들이 억지로 지어낸 거짓말이다”라고 주장함으로써 당시 중국 정부 및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중국인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았다.

오른쪽으로 돌기 시작한 역사의 시계바늘
감춰진 방위족 의원으로 분류되는 정치가들 중에는 보수 우파 의원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그들의 영향력이 방위 정책이나 방위비 증강에 국한돼 왔던 것만은 아니다. 교과서 파동(82년), 일왕 사죄 발언(90년), 종군위안부 마찰992년)에서도 한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취해야 한다는 이른바 ‘대한 강경론’을 주도한 장본인들이 바로 그들이다. 80년대 방위족 의원으로 활약한 후지오 마시유키(藤尾正行) 전 문부장관이 바로 좋은 예이다. 그는 교과서 왜곡 문제가 한국과 중국의 항의로 원점으로 돌아가자 이에 큰 불만을 품고 86년 월간 《문예춘추》를 통해 한국과 중국을 싸잡아 비난했다.

 그는 이 대담 기사에서 ‘한일합방은 한국측에도 그 책임이 있다’라고 주장하고, 미국이 히로시마ㆍ나가사키에 투하한 원자폭탄을 예로 들어 당시 ‘일본만이 침략 전쟁을 했던 것은 아니다’라는 망언을 퍼부었다. 그는 결국 나카소네 총리의 사임 요청을 거절하고 스스로 파면의 길을 선택해 각료 직을 물러났다.

 자민당 정권 붕괴로 족 의원들의 입지가 꼭 이전과 같다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신생당 색체가 짙은 하타 정권이 발족함에 따라 이들의 영향력이 또다시 확대될 가능성이 커지고 있다. 그런 점에서 나가노 전 법무장관의 역사 왜곡 발언은 족 의원들이 활동을 재개하려는 신호탄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

 특히 방위족 의원 그룹은 두 가지 점에서 호소카와 연립정권에 대해 큰 불만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호소카와 전 총리가 취임 직후 지가회견과 시정연설에서 “과거의 전쟁은 침략 전쟁이었다”라고 명백히 규정한 점이다. 이는 자민당 정권의 우파 그룹이 추진해 왔던 ‘과거 역사의 재평가 정책’을 정면으로 부정하는 연설이었다. 또 하나는 호소카와 연립정권이 방위계획대강을 대폭 수정하여 방위비를 삭감하려는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이다. 방위비가 삭감된다는 것은 방위족 의원들의 영향력이 낮아진다는 것을 뜻하므로 이들이 큰 반발을 보인 것은 물론이다.

 호소카와 연립정권 등장으로 한때 왼편으로 돌기 시작한 역사의 시계바늘이 다시 오른편으로 돌려지기 시작했다. 신생당의 오자와 대표간사와 추진하고 있는 ‘보통국가’가 실제로 구현될 경우 그 시계바늘은 자민당 정권 때보다 더 오른편으로 이동할 것임에 틀림없다. 보통 국가로 전환시키려 일본의 견인하고 있는 기관차들이 바로 이 방위족 의원들이기도 하다.
도쿄ㆍ蔡明錫 편집위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