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수의 진보 맞대결
  • 김재일 부장대우 ()
  • 승인 1994.07.28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사안보다 극좌?극우 양극단…‘진보의 용기’와 ‘보수의 지혜’합칠 때

지난 16일 오전 10시 서울 언론회관 20층 국제회의장에서는 항일?건국?반탁?방공 운동과 관련된 80여 단체가 참여한 자유민주민족회의(민족회의)가 열띤 분위기 속에서 출범했다. 여기에는 대다수가 노년층에 가까운 4백여 인사가 참석해 자리를 꽉 메웠다. 이철승 이민우 유치송 박용만 오제도 김점곤 채명신 박창암 정재호 이찬혁 유호준 정시봉 이도형 양동안씨 등 지명도가 쟁쟁한 이들의 이름만 들어도 모임의 성향을 어느 정도 짐작할 만하다. 모임을 주도한 이철승 전 신민당 대표는 대회사에서 “우리는 국가 위기시 봉기하는 연합구국전선으로서 주인 의식을 가지고 반공입국의 정신으로 자유민주 통일 국가를 지향할 것이다”라며 기염을 토했다. 이 모임은 또 창립선언문에서 , ‘좌익 세력을 제거하고 우리의 건국 이념과 정통성을 선양하는 국민적 노력의 선두에 서겠다’거 다짐했다.

 이 모임이 있기 2주 전 연세대 백주년 기념관에서는 재야 인사, 학생, 시민단체 관계자 5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민족회의)가 발족했다. 천주교 정의구현사제단 등 종교단체와 진보정당추진위원회?전노협?한총련?흥사단(서울지부) 등 60개 민간 단체가 참여한 이 ‘민간 통일 운동체’는 김상근 한국교회협의회(KNCC)인권위원장, 이창복 전국연합 상임의장, 박순경 전 목원대 교수를 상임의장으로 선출했다. 이 모임은 결의문을 통해 ‘95년을 통일 원년으로 맞을 수 있도록 대중적 통일운동의 활성화에 주력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이 모임은 또 ‘모든 반통일적 경향’을 우리 사회에서 추방하겠다고 강조했다.

 공교롭게도 두 모임의 약칭이 같다. 그러나 참여한 인사의 면면을 볼 때 성격은 상반된다. 자유민주민족회의가 선언한 ‘좌익 세력 제거’란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에 참여하고 있는 이른바 진보 성향의 인물과 단체를 지칭하고, 후자가 추방하겠다고 결의한 ‘반통일적 경향’이란 전자에 속한 보수 성향 인사들의 사고와 행태를 겨냥한 것임에 틀림없다. 김상근 자주평화통일민족회의 상임의장은 “자유민주민족회의를 주도하는 인사들의 면면과 족적을 볼 때 역사에 역행하는 반통일 세력임이 분명하다”라고 말했다.

상대방 전면 부정?매도가 문제

 이렇듯 우리 사회에서는 사사건건 상반되는 시각과 목소리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다. 정치?경제?사회?노동?문화개방 문제 등 대부분의 현안에 관해 견해가 양분돼 있다. 특히 북한과 관련한 핵, 김일성 사망, 남북 정상회담, 통일 문제에 가서는 더욱 날카롭게 맞부딛치며 국론 분열이 심하게 드러난다. 의견의 다양화는 성숙한 사회의 징표로 바람직스러운 것이다. 문제는 상대의 처지와 의견을 전적으로 부정하고 매도하는데 있다.

 이들의 입장은 북한을 보는 시각과 태도에 따라 크게 온건파와 강경파로 나눌 수 있는데(송 복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의 분류), 사안마다 극명하게 대조를 이룬다(16쪽 상자기사 참조). 김일성의 남북 정상회담 제의를 한쪽에서는 ‘통일로 나가는 중요한 계기’라고 평가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국제 제재를 일시 모면키 위한 술책’으로 받아들인다. 지미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의 역할에 대해서도 ‘엄청난 일을 해 냈다’(리영희 한양대 교수) ‘우리는 그에게 크게 빚졌다. 고맙고도 부끄럽다’(김근태 국민회의 대표)라는 평가와 ‘순진한 아마추어’(이철승) ‘아직 평가하기 이르다. 김일성의 메시지만을 일방적으로 전달했다’(안응모 한국자유총연맹 사무총장)는 평가로 엇갈린다. 자유총연맹이 발행하는《자유신문》은 당시 ‘카터, 김일성의 나팔수로 전락’이라는 제목을 붙여 보도했다.

 김근태 대표를 비롯한 대북 온건파는 김일성이 죽기 전 서울에서 제 2차 남북 정상회담이 열릴 것이라고 예상했으나, 강경파 대부분은 북한이 평양 회담만을 따먹고 말 것으로 예측했었다. 이들의 견해는 김정일의 능력에 대한 평가와 김정일 체제의 장래를 전망하는 데도 판이하게 갈린다. 따라서 김정일과 회담을 해야 하느냐라는 문제에서도 온건파는 ‘당연히 해야 한다’이고 강경파는 북한 체제가 안정될 때까지 서두르지 말고 ‘기다려야 한다’이다. 김정일 체제의 앞날에 대해서는 온건파가 대체로 공고해지리라고 예측한 반면 강경론자인 조갑제 《월간 조선》부장은 “비극적이고도 단명으로 끝난다”라고 단언한다. 북한이 생존하려면 개혁?개방을 해야 하는데 지난 20년간 실질적인 북한 지도자였던 김정일은 김일성과 동일 티켓으로 봐야 하므로 그에게 개혁?개방이란 자기 부정이자 자가당착이라는 것이다.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이냐’가 핵심

 북한에 대한 시각과 입장은 얼마나 많은 정보를 얻어 얼마나 정확히 아느냐라는 문제와 직결될 수 있다. 리영희 교수는 “나는 순진한 사람이 아니다. 저들(강경파)에 비해 정보와 자료를 훨씬 많이 가지고 있다. 저들은 실상을 너무 모른 나머지 광적 냉전 이데올로기에 빠져 있다”라고 말한다. 한편 보수언론인으로 분류되는 《월간 조선》조부장은 “나는 자유민주주의 신봉자요 사실주의자다. 북한 실상을 제대로 안다면 99%가 내 생각과 같을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따라서 북한을 보는 시각과 입장의 차이가 반드시 정보의 질이나 양과 상관이 있다고 보기는 무리인 것 같다. 객관적이어야 할 예측과 전망이 정반대 방향으로 나타난다는 것은 각자의 성향과 희망이 가미됐기 때문일 것이다. 마치 ‘배를 먼저 갈라놓고, 약을 먹기보다 수술하는 것이 옳다’고 주장하듯이, 이미 고정된 자신의 성향에 맞춰 정보를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다분한 듯하다. 양측의 대립되는 시각은 결국 김일성과 북한 정권을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문제로 귀결된다.

 리영희 교수는 “북한은 친일파나 민족 반역자가 중심이 된 국가가 아니라 총 들고 항일 빨치산 했던 사람들이 지도층을 이룬 국가다”라고 말한 바 있고, 지금도 그 말을 수정할 용의가 없다고 잘라 말했다. 그는 북한인권 문제와 관련해 “나는 남북한을 평가하는 데 같은 잣대를 적용한다. 과거 30년 동안 한국에서의 인권 탄압과 다름없는 상태가 북한에도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한편 ‘진보적 보수주의자’로 불리기를 원하는 안응모 자유총연맹 사무총장은 “김일성은 범죄집단의 괴수이자, 사교 교주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이 선전하는 김일성은 90%이상이 날조된 허구다. 북한을 국가로 보는 데 문제가 있다. 국가라면 최소한 인권?복지?자유를 갖춰야 하는 것 아닌가”라고 북한 정권을 질타한다. 온건파가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대해 관대한 반면 강경파는 뿌리 깊은 원한과 불신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같이 갈린 입장을 흔히 말하는 진보 대 보수로 분류할 수 있을까. 양측은 상대방을 보수 혹은 진보로 보기를 단호하게 거부한다. 대북 온건파는 강경파를 보수가 아니라 ‘극우 반공 집단’ ‘광적이고 맹목적인 반공 세력’ ‘냉전 시대의 유물’ ‘반통일 세력’이 라고 부른다. 반면 강경파는 상대방을 “진보라니, 턱도 없는 이야기다”라며 ‘좌경 극렬 분자’ ‘친공 반동세력’ ‘진보를 가장한 좌익 반국가 세력’이라고 지칭한다. 서로가 상대방의 가치를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는 서구적 의미와는 다르게 쓰이고 있다(22쪽 기사 참조). 또 성향과 관점에 따라 그 정의를 각각 다르게 내린다. 원래 보수는 현상과 체제 유지를, 진보는 현상 타개와 체제 변화를 중시한다. 이는 곧 변화의 속도와 범위에 관한 개념으로 역사 진행을 보는 태도와 상관이 있다. 송복 교수는 우리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란, 이데올로기에서는 자유민주주의 성향이냐 사회주의 성향이냐, 또 민주화 투쟁과 관련해서는 정권은 그대로 두면서 정책을 바꾸느냐 정권자체를 바꾸느냐라는 입장으로 나뉠 수 있다고 말한다. 그 기준은 시대 상황과 쟁점에 따라 유동적이며 지금은 불변의 잣대가 안맞는다는 것이다. 지난날 민주화 투쟁 세력 가운데 일부는 권위주의 체제와 독재 정권에 대한 반발로 김일성이나 북한에 대해 긍정적인 평가로 기운 측면이 있다.

 한상진 교수(서울대?사회학)는 “현실적으로 우리나라에서 보수파는 현재의 기득권구조를 유지하려는 측이고 진보는 비정상 상태인 분단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사고와 행동을 일치시키려는 입장이다”라고 말한다. 반면 보수파 학자로 유명한 한 교수는 보수?진보는 사회주의자들의 구분법이라며 “오늘날은 사회주의를 포기하는 것이 진보다”라고 주장한다. 한 전문가는 냉전이 끝난 지금도 우리의 경우 분단이라는 특수 상황 때문에 이데올로기에 의한 분류는 아직 유효하다고 말한다. 보혁 논쟁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 진보와 보수는 확실한 실체로 자리 잡았다고 보기는 어려우며, 흔히 사용되는 진보?보수라는 용어는 실제 의미와는 다소 차이가 있다고 할 수 있다.

 현안과 시국에 관한 견해가 명백히 양분되는 지금의 현상을 진보?보수로 분류하는 데는 전문가의 의견도 찬반으로 엇갈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분된 목소리의 이데올로기적 성향, 그리고 대북 정책과 태도에서 변화를 추구하는가를 기준으로 할 때 넓은 의미의 진보와 보수로 구분해도 크게 무리는 없을 듯하다.

 진짜 문제는, 사안이 생기면 극좌와 극우라는 양극단으로 치닫는 불건강한 현상이다. 비근한 예로 최근 국회에서 시작돼 전국을 뒤흔든 조문 파문을 들 수 있다. 조문 파문은 이를 질의한 몇몇 야당 의원들의 진의(사안의 본질)와는 상관 없이 색깔 논쟁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비화한 것이다. 이는 곧 대북관계의 이중성, 즉 김일성의 역사적 죄과와 외교 혹은 대화 상대로서의 북한의 실체를 별도로 보지 않고 뭉뚱그린 데 있다. 이와 관련해 상이 군인들에게 자기의 지구당을 점거당했던 이부영 민주당 최고위원은 국회 본회의 발언을 통해 “이같은 정치 공세는 한국판 매카시즘의 부활"이라고 단정하고, “세계가 변하는데 우리만 동북아시아 귀퉁이에서 과거의 잔영을 되씹으면서 시간의 미로를 헤매고 있어서야 되겠는가”라고 반문했다.

 경제정의실천연합(경실련)도 조문 논란과 관련해 엄청난 곤욕을 치렀다. ‘김주석의 사망에 대해 애도 표시를 한다는 것은 국민정서상 용납하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김주석을 만날 예정이었고, 또 동양 윤리적 전통을 고려할 때 우리 정부가 의전상으로라도 조의를 표하는 것은 바람직하다’는 성명을 낸 후 경실련은 빗발치는 비난?항의 전화에 시달려야 했다. 이렇게 된 데는 언론의 왜곡보도도 한몫했다. 서경석 경실련 사무총장은 “이래 가지고서야 합리적인 제3의 목소리가 설 자리가 없지 않은가”라며 안타까워한다.

 이같은 언론과 여론의 반응은 김일성과 북한 정권에 관한 한 우리 국민의 감정이 얼마나 곤두서 있는가를 반증한다. 서총장은 “시민들의 반응에 놀랐다”라고 실토했다. 남북화해와 공존을 주장하면서도 실제로는 정서조성이 안돼 있는 현실을 확인했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 정권의 죄상에도 불구하고 과거를 극복해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중간 입장의 목소리가 설 수 있는 풍토가 조성돼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통일 외치면서 정서는 반통일

 그렇다면 북한을 어떻게 볼 것인가, 북한은 과연 변했고 변할 것인가. 중간 입장이라 할 수 있는 서진영 교수는 “신좌익?신우익이라는 이분법적 사고로는 남북한 문제에 제대로 대처하지 못할 뿐더러 변화하는 세계에 적응하지 못한다”고 말한다. 그는 또 북한이 어떻게 변하느냐가 문제이지, 북한의 변화 자체는 역사적으로 돌이킬 수 없다고 주장했다. 이와 관련해 이름을 밝히지 말라고 요구한 한 정치권 인사의 관점은 상당한 설득력을 지닌다. 그는 북한에 대해서는 이제 현상유지적 시각보다는 변화의 시각으로 보는 것이 더 정확하다고 말한다. 너무도 빨리 변하는 국제 정세를 보는 시각으로 한반도 문제를 보는 것이 역사의 흐름에 더 부합한다는 것이다. 그는 북한이 주체적 자립보다는 상호의존적 자립의 중요성을 이미 인식했다는 징후를 읽고 있다고 주장한다. 그는 북한을 일단 진보의 시각으로 보고 대응은 보수적으로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말한다.

 통일은 국민 모두가 외치는 민족적 과제이자 시대적 명제인데도 실제로 우리 사회에는 반통일적 정서 또한 만만치 않게 자리잡고 있다. 이는 쓰라린 역사적 경험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안게 된 자체 모순이기도 하다. 큰 틀 자체가 변하는 지금이야말로 진보의 용기와 보수의 지혜가 합쳐야 할 시점인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