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풍속화 ‘육체와 전쟁’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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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신체’ 개념 변화로 몸관리 비상

문제는 육체이다. 정신의 하위 개념이던 육체가 정신을 장악하기 시작했다. ‘우리 시대는 젊음, 건강, 육체의 아름다움에 대한 강박관념을 지니고 있는 시대’이다. 이 강박관념과의 치열한, 그러나 거개가 패배하고 마는 전투가 현대적 삶의 풍속화이다. 육체와 전쟁을 벌이는 이 새로운 인간형을 서양의 한 학자는 ‘연기하는 자아’라고 명명했다.

 연기하는 자아는 시각 이미지가 등장하면서 탄생했다. 영화와 대중 인쇄매체, 라디오 그리고 텔레비전과 광고의 ‘융단 폭격’은 언어의 시대를 이미지의 시대로 뒤바꿔 놓았다. 이 소비 문화가 정착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방정식이 태어났으니, 젊음은 곧 아름다움이고, 아름다움은 건강과 동일시되었다. 자기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것이 생명을 연장하는 것이고, 젊음을 지속시키는 노력이 사회적 성취이기도 했다. 새롭게 출현한 인간형은 당연히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출했고, 강력한 전염력을 과시했다.

아름다움=날씬, 남성다움=근육질

 80년대 초반에 수입된 ‘다이어트’라는 낯선 용어는 식생활 양식이 급격하게 뒤바뀐 80년대를 거쳐 최근에는 육체 관리(산업)라는 좀더 전문화?다양화한 형식으로 우리 의식과 일상을 파고들고 있다. 육체 관리 산업은, 소비자들의 고발에 간혹 발목을 잡히기도 하지만 연일 ‘승전보’를 올리고 있다.

 다이어트를 비롯한 육체 관리 산업은 20대 초반의 젊은 여성은 물론 남녀를 불문하고 10대에서 50대에 이르는 모든 계층을 ‘사로잡고’있다(51쪽 표 참조). ‘왜 수면중에 지방이 분해되는가!’ ‘노출의 계절에도 자신이 있다’ ‘순수 생약성분의 한방 다이어트’ ‘3분 통화로 날씬해질 수 있다’ ‘피부의 나이를 젊게’ ‘저주파로 주름살을 제거’등등 신문 광고 지면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육체 관리 산업의 현란한 목소리가 실린다.

 광고뿐 아니다. 텔레비전이나 영화의 주인공들은 광고보다 더 섬세하게 대중을 ‘조종’한다. 대중은 화면 속의 날씬한 여성, 건장한 남성을 아무런 여과 없이 자기의 모델로 삼는 것이다. 날씬함이 아름다움이다, 근육질이 곧 남성다움이라는 등식을 영상 매체가 수시로 주입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체형?체중?피부?몸짓에서 패션?화장?액세서리에 이르기까지 외모?외관에 관한 대중의 담론은 일정한 틀을 형성하고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한다. “얘, 너 살찐 것 같다”라는 말은 젊은 여성에게 가장 큰 욕설이고, “이봐, 아랫배가 그게 뭐야”는 장년기의 나태에 대한 핀잔이 된다. 육체와 외관에 관한 이같은 민감한 관심과 반응은, 건강 염려증이라는 ‘한국병’과 무관하지 않다.

 표준 체중(자기 키에 100을 뺀 뒤 거기에 0.9를 곱한 수치)에서 20%를 초과하는 비만 환자나 10~20% 사이로 과체중인 사람들에게 체중 감량은 절박한 치유법이다. 최근 새로운 다이어트 상품을 개발해 호응을 얻고 있는 풀무원식품의 유윤희 식생활연구실장에 따르면, 91년 현재 우리 국민의 19%(5명 중 1명)가 비만이다. 미국의 26%에 견주면 낮은 수치이지만 그 증가율은 심각하다(55쪽 상자기사 참조).

 문제는 과체중이나 비만증 환자가 아니다. 물론 이들도 검증되지 않은 다이어트법의 무차별 공급이라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 형편이지만, 그것은 어쨌든 치료의 차원이다(54쪽 기사 참조). 문제는 정상 체중인데도 ‘체중?체형 강박증’에 사로잡힌 젊은 여성들이다. 이들에게는 음식을 거부하는 거식증이나, 한꺼번에 많이 먹었다가 이를 토해버리는 폭식증과 같은 섭식 장애가 나타나기도 한다.

 거식증이나 폭식증은 분명한 정신질환이다. 주로 젊은 여성에게서 나타나는데, 12~18세 여성 백명 가운데 1명꼴로 발병률이 높다. 재단법인 ‘청소년 대화의 광장’이 내놓은 ‘청소년 다이어트 행동 연구’에 따르면, 구미 지역에 살지 않는 여성들이 몸무게와 몸매를 구미 기준에 맞춤으로써 최근에 거식증 발병률이 증가하고 있다.

 폭식증은, 자발적인 다이어트를 시작하면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보고된다. 폭식과 과도한 단식을 반복하기 때문에 이 환자는 몸무게의 편차가 크다. 이들은 사회적 승인욕구가 크고, 그래서 대인관계에 매우 민감하다. 거식증처럼 자아 정체성이 약한 성격인 사람이 발병률이 높다. 외국의 한 연구를 보면, 위와 같은 젊은 여성들의 섭식 장애는 여성 특유의 환경에서 기인한다. 여성은 유전적으로 지방이 많고, 심리적으로는 ‘신체적으로 매력 있는 여성이 더 여성적이며, 적게 먹는 허약한 실루엣이 여성적’이라는 인식이 고정되어 있는 것이다. 또 여자 어린이는 가정과 학교에서 외모가 좀더 중요하다는 ‘학습’을 받는다.

 체중?체형?외모에 대한 강박증은, 식습관으로 대표되는 라이프 스타일 변화가 일차적 원인이지만, 비만이나 과체중이 아닌 대다수 현대인들에게는 ‘육체에 대한 인식 변화’가 가장 큰 요인으로 보인다.

‘육체의 환경’ 바꾼 할리우드의 썬탠

 양의 동서를 막론하고 날씬한 몸매가 아름다운 육체라고 공인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문학 평론가 이동연씨는 ‘육체의 관리와 문화효과’(《문화과학》 제4호)에서 육체 관리의 역사를 다음과 같이 간추린다. 원시 부족사회 여성의 요란한 몸치장은 개성 표현이 아니라 부족이 그 여성에게 부과한 집단?주술적인 여성상이었다. 중세 시대의 육체는 영혼과 견주어 부차적이거나 불경한 것이어서, 육체 관리란 건전한 정신을 함양하려는 종교인들의 자기 수련이었다. 근대에 들어와 육체는 ‘성담론’과 더불어 육체 자체의 생동적 측면이 활성화하기 시작했다.

 20세기 들어 양차 세계대전을 거치면서 육체는 전면에 나섰다. 출산과 노동을 목적으로 하던 여성의 풍만한 육체, 다듬어지지 않은 남성의 건강한 육체가 전혀 새로운 환경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방치에서 관리로 이행한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썬탠이다. 검게 그을은 피부는 노동자의 것으로 아름다움과는 무관했다. 그런데 금세기 초 할리우드의 스타들이 썬탠을 시작하자 검게 그을은 피부는 휴일(휴가)을 성공적으로 보냈다는 징표가 된 것이다.

 언어에서 이미지 시대로 바뀐 것은 ‘내부지향형 인간’에서 ‘외부지향형 인간’으로 이동했음을 뜻한다. 외부를 전제로 한 육체는, 육체를 통한 쾌락, 만족되지 않는 욕망의 무한궤도에서 벗어날 수 없는 삶이 되고 만다. 이렇게 정신으로부터 분리된 육체는 육체자체만을 위한 육체 관리 현상을 동반했다. 구미 학자들은 이를 나르시시즘과 연결해 분석했다.

 육체를 우선하는 이 새로운 나르시스트는 과도하게 자의식적이고, 자기 건강에 늘 불안을 느끼며, 결함과 노쇠의 징후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개성이 하나의 상품인 듯 자아를 팔려고 하면서도 정서적 경험에는 굶주려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나르시스트에서 한 걸음 나아간 인물형이 ‘연기하는 자아’이다. 시각 이미지가 점령한 소비 문화 시대에서 인간은 새로운 테마를 좇는다. 그 테마를 수식하는 형용사들은 ‘매혹적인’ ‘놀라운’ ‘매력적인’ ‘관심을 끄는’ ‘ 뛰어난’ ‘창조적인’ 따위이다. 이들은 ‘타인이 당신을 좋아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것’ 즉 개성 만들기에 매진한다. 표정관리, 좋은 대화술, 몸짓까지 육체 관리에 포함된다. 그러니 육체를 우선하는 이들은 타인 앞에서, 궁극적으로는 자기 자신에게도 ‘연기하는 자아’인 것이다.

 구미에서도 그러하지만 국내에서는 특히 육체 언어 문법에 관한 연구(kinesics)가 거의 없다. 육체는 저만치 앞서가는데 정작 그 육체의 ‘주인’인 우리는 육체의 변화를 주도하는 새로운 문화 현실에 넋을 놓고 있는 형국인 것이다. 정신과 분리된 육체의 현실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정신과 육체 사이의 간극에 후기 자본주의의 정치?경제?문화적 작동 원리와 그 지형도가 자리잡고 있다고 학자들은 말한다.

 정신과 육체의 분리는 인간이 인간을 인간으로서 인식하는 ‘주체의 정체성’에 심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후기 자본주의 시대, 절정을 향해 치닫는 소비 문화 시대의 가장 절박한 화두는 육체이다. 다름 아닌 우리 육체에서 ‘매우 낯선 병목현상’이 일어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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