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 수령 김정일을 만나라
  • 안병찬 (편집인) ()
  • 승인 1994.07.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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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삼 대통령은 빠른 시일 안에 호랑이굴에 들어가 통일의 길을 다져나가야 한다.”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살아 있을 때, 평양에 가서 그를 만나 남북 정상회담을 갖게 되어 있던 김영삼 대통령은 누구보다 수지를 맞춘 인물로 보였다.

 어떤 사람은 김대통령이 상대적으로 체구가 큰 김일성한테 눌려 텔레비전의 그림이 초라할 것이라고 흉을 보았다. 혹은 평양회담에서 별 성과 없이 돌아오기만 해봐라 하고 벼르듯이 말하는 극우파도 있었다. 김대통령의 평양행을 가리켜 ‘알현하러 가나’하며 우스개 섞어 비웃는 소리마저 들렸다. 첫 남북 정상 대좌는 이모든 잡음을 뛰어넘어 통일로 향하는 도정에서 가장 역사적이고 민족적인 사건으로 기록될 것이 분명해 보였다.

 필자는 그런 김영삼 대통령에게 갈채를 보내려고 때를 기다리던 참이었다. 노련하고 노회한 김일성 주석을 평양으로 찾아가 만나기를 주저하지 않은 일은, 민족 문제를 앞장서서 풀어 나가겠다는 김대통령 의지의 소산이라고 믿고 싶었던 것이다. 필자는 김영삼 대권 후보가 정권을 쟁취하려고 3당 합당의 이름으로 중국 고전소설 《수호전》에 나오는 무송처럼 호굴을 두려워하지 않고 뛰어든 담대함을 보였다고 풍자한 적이 있었다. 그때에 비한다면 호굴 중의 호굴인 평양에 들어가서 늙은 대호(大虎)격인 김일성을 직접 만나는 일은 얼마나 자주적이고 민족적인가.

김일성 사망이 ‘애통’했을 김대통령

 김대통령이 그런 과업을 안고 바야흐로 정치적 성취감을 맛보려던 때에 별안간 북한 주석 김일성이 사망해 버렸으니, 그 죽음을 가장 안타깝게 여길 사람으로 김대통령말고 누가 있을까. 물론 김대통령이 품었을 안타까움은 조의와는 다른 것이었으리라고 짐작한다. 친모를 북한 간첩한테 잃은 김대통령이므로 우선 개인적으로 김일성을 조문할 마음이 일어날 리 없다. 그는 분단 한국에서 책임이 가장 무거운 공인으로서 김일성 변고에 애통함을 느꼈으리라는 생각이다.

 생각해 보면, 동양에서는 조의가 집단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일이 가끔 있어 왔다. 군신유의(君臣有義)나 부자유친(父子有親) 같은 유교적 도덕률의 뿌리 때문에 국장을 치를 때면 백성들이 집단적으로 눈물을 흘렸던 것이다. 유신정권 초반인 74년 8월, 총격으로 목숨을 잃은 박정희 대통령 부인 육영수여사의 국민장 영결식 때도 비슷한 반응이 일어났다. 묵은 신문을 뒤져 보면, 육여사 영구가 꽃수레에 실려 국립묘지로 향할 때 백만 인파가 몰렸고, 연도에서 집단으로 애도하고 오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애도의 물결이 전국에 넘쳐 각 도에 마련된 빈소에 조문객이 줄을 이었다고도 했다.

 89년 2월에 치러진 일왕 히로히토의 국장 때는 어땠는가. 그가 88세로 사망하던 날 도쿄의 왕궁 밖에는 땅바닥을 치며 통곡하는 시민이 많았으며, 끝없는 조문 행렬이 이어졌다.

 주석 김일성을 잃은 북한의 집단적 통곡에서 특이한 점은 그 열렬한 종교적 색채와 분위기에 있다. 김일성의 인격은 천재를 넘고, 민족의 태양을 지나, 신격의 경지에 이르고 있었다. 그리하여 김일성주의는 당을 군신부자당(君臣父子黨)으로 개편하고 주체사상의 견고한 틀을 구축한 것이었다.

김정일, 화국봉보다 단단한 발판

 필자는 북한 중앙 텔레비전이 방송위성을 통해 세계로 내보낸 화면 중에 군복을 입은 만경대혁명학원 어린 학생들이 김일성 동상 앞에서 집단 통곡하는 장면을 보면서 연상한 장면이 있다. 태평양전쟁 말기 미군이 사이판 섬을 완전히 점령한 45년 7월 전율할 사태가 일어났다. 사이판 섬 북단 높이 2백54m인 마피 곶에서 일본인 주민 수백 명이 약간 남은 일본군과 함께 집단 자살을 한 것이다. 자식을 벼랑으로 밀어 떨어뜨리고 나서 부모가 뛰어내렸다. ‘히로히토 천황 폐하’를 위해 일어난 ‘인민사원’ 종단식 죽음의 집단 행동이었다.

 중국의 모택동 주석이 사망한 것도 김일성과 같은 82세 때였다. 위대한 도사(導師) 모택동은 투명한 유리관 속에 김일성보다 18년 앞서 안치되었다. 모택동 유리관 밖의 중국공산당 조문 서열 1위는 모택동의 ‘좋은 후계자(好接班人)’라던 총리 겸 제1부 주석 화국봉이었다. 조문 서열 2위는 모택동 부인 강청이 밀던 문혁파 왕홍문 부주석.

 그런데 조문 서열 3위인 국방부장 섭검영은 모택동 국장 직후 화국봉과 연합하여 문혁파인 4인방을 타도했다. 모택동의 ‘좋은 후계자’인 화국봉은 얼마 안가서 개방파 실권자인 등소평에게 자리를 내주었으나 등소평도 모택동 사상의 깃발을 내리지 않았다.

 김정일은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인민 위에 새 수령이 되었다. 화국봉보다는 단단한 발판을 갖춘 ‘후계자’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김일성주의를 고수하되, 권력을 다른 사람들과 분점하고, 경제적 활로를 열기 위해 중국식이나 베트남식 개방 정책을 받아들여야 할 형편이다. 필자는 김영삼 대통령이 새 수령 김정일과의 남북 대좌도 추진하여, 빠른 시일 안에 평양 호굴을 찾아가 통일의 길을 다져나가야 한다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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