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질러진 전파’ 잘 담는 게 문제
  • 성우제 기자 ()
  • 승인 1994.06.02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청자 날로 확산 … ‘선택’ 단계 넘어서

“시청자 운동 등 적극 대응책 시급”
원하든 원하지 않든 한국도 이젠 직접 위성방송 시대에 접어 들었다. 지난 89년 일본 NHK가 방송위성(BS)을 통해 본격적으로 방송을 시작한 후 몇백만원대 파라볼라 안테나를 구입할 여력이 있는 일부 계층에서만 위성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으나, 91년부터 홍콩의 스타TV가 통신위성(CS)을 타고 등장한 이후에는 사정이 크게 바뀌었다. 10여 개에 이르는 국내 안테나 제작업체가 일본 . 홍콩 방송을 동시에 수신할 수 있는 겸용 안테나를 개발해 판매하기 시작했고, 최근에는 값도 60만 ~ 70만원대로 떨어졌다. 게다가 92년께부터는 공청 안테나가 아파트 입주조건의 하나로 떠오르면서 가입비 6만 ~ 10만원만 내면 텔레비전 수상기가 위성방송을 24시간 쏟아내게 되었다. 더구나 몇몇 일간지와 잡지, 심지어 방송 매체에서도 위성방송 프로그램을 소상하게 안내한다. 이제는 수신기가 없는 국민의 60% 이상이 위성방송에 대해 알고 있을 만큼 위성방송은 우리와 친숙해졌다(63쪽 도표 참조).

 최근 방송 관련 연구원이나 학자들이 위성방송 수신 가구 수를 40만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으나, 지금으로서는 추정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다. 방송학자 가운데는 백만 가구 이상이 시청하고 있다고 보는 이도 있다. 수신기 한개로 수십 가구가 시청하는 아파트 단지의 가구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뿐더러, 지역 유선방송들이 위성방송 프로그램을 공급하고, 노래방이나 호텔 같은 숙박업소에서도 위성방송을 받기 때문이다.

 위성방송은 큰 돈을 내고 선택하는 단계를 넘어섰다. 버스에서 운전기사가 틀어놓은 라디오를 억지로 들어야만 하는 것처럼 위성방송은 이제 보는 단계가 아니라 보여지는 단계에 진입해 있다.

청소년 문화에 큰 영향
 한국방송개발원이 올 2월 전국의 만 13세 이상 남녀 1천2백명을 대상으로 <텔레비전 수용 행태와 미래 한국방송에 대한 시청자 의식>을 조사한 결과에 따르면, 20~30대의 80% 이상과 10대의 69%가 위성방송을 본 적이 있다고 응답해, 주로 젊은층이 위성방송을 많이 시청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위성방송 수용층은 젊은층을 중심으로 하여 위아래로 크게 확산하는 추세를 보이고 있다. 서울 봉천동의 한 아파트에 살고 있는 회사원 ㅊ 씨는 “종일 방송되는 NHK 때문에 아이가 텔레비전에만 매달려 있어 공청 안테나선을 잘라버렸다”라고 말했다. 서울 용산전자상가의 한 수신기 판매업자는 올 들어 수신기를 찾는 사람이 줄기는 했지만 “2~3년 전부터 어학공부를 한다면서 수신기를 사가는 학생이 많고, 최근에는 부모님께 효도한다면서 찾는 사람이 많다. 일본 말을 배운 60대 이상 노인들이 NHK만 보면 너무 좋아하기 때문이다”라고 했다.

 어떤 장애도 없이 전파를 타고 국경을 넘어온 낯선 외국 문화가 국민의 일상 생활 속에 자리잡은 징후는 곳곳에서 보인다. NHK화면에 자주 등장하는 스모가 위성방송 시청자들에게는 이제 낯설지 않다. 엉덩이를 훤히 드러낸 그 선수들이 처음에는 혐오스러웠지만, 어느 때부터인가 규칙을 알게 되자 이제는 재미를 붙였다는 시청자도 많다. 특히 위성방송의 대중음악 프로그램이 젊은층에게 알게 모르게 많은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견해도 나온다. 팝 칼럼니스트 임진모씨는 “대중 음악 분야에서는 이미 5,6년 전부터 일본 유명 가수의 영향을 받고 있다. 외국 가수의 모습이 텔레비전에 비치면 무의식중에 따라가게 마련이다. 팬들의 그런 욕구 때문에 한국의 대중 스타도 이미지 관리를 위해 거기에 맞출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홍콩과 일본의 대중 문화가 질보다 감각에서 우리보다 앞서 있다고 지적한 임씨는, 어떤 매체보다 쉽게 즉각적으로 접할 수 있는 위성방송이 청소년이나 대학생 문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고 분석했다.

 일본 문화 개방을 둘러싸고 몇 달 전에도 한 차례 논란이 있었으나 위성방송만 놓고 본다면 그 논란은 이제 무의미해 보인다. 한국의 일반 가정에서도 일본 NHK의 2개 채널과 홍콩 스타TV의 5개 채널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게다가 일본위성방송주식회사(JSB)가 운영하는 유료 텔레비전 와우와우(WOWOW)도 한국에서는 매우 인기 있는 채널로 자리를 잡았다(62쪽 도표 참조). 상업 방송으로 월2천엔씩 수신료를 받는 와우와우 채널은 스크램블(비밀통신 주파수대 변환기)을 걸어놓아 디코더(암호 해독기)가 없으면 수신할 수 없다. 밀반입된 디코더를 1백만~2백만원에 구입한 한국 시청자들은 매달 일본으로 수신료를 보내는 편법을 통해 와우와우의 영화 . 오락 프로그램을 시청하고 있다.

“새로운 방송문화 정책으로 맞서야”
 “위성방송이 먼저 개방을 이끌고 있는 상황이다. 일방적으로 들어오는 외국 방송이 한국 시청자를 확보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보이고 있고, 이에 따라 한국의 방송 문화 질서가 흐트러지는 기가 막힌 상황이다.” 전석호 교수(중앙대 . 신문방속학)는 “수신기 판매를 법적으로 허용했으니 국가 간의 스필오버(전파의 국경 월경)는 이제 논란 대상이 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한국은 그동안 일본에 스필오버 문제를 제기하였으나 국제법상 구속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일본의 ‘비의도적 스필오버’라는 주장에 밀리고 있는 형편이다. 홍콩과 일본은 아예 아시아 . 태평양 지역에서도 방송장벽을 전면 철폐하자는 주장을 내놓았는데, 95년 무궁화 위성 발사를 준비하고 있는 한국은 각국의 문화적 전통을 침해하지 않는 경우에 한해 자유화하자는 조건부 개방론을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유럽 이외에는 어느 대륙에서도 위성방송과 관련해 국가 차원의 규정이 마련되어 있지 않을 뿐더러, 특히 자본과 기술에 의한 자유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아시아에서 그 같은 규정을 당장 마련하기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다.

 외국의 위성방송을 수용하는 것이 가져오는 긍정적인 효과도 많다. 서울대를 비롯한 몇몇 대학에서는 위성방송을 교육프로그램으로 활용하고 있고, 일반 시청자들은 한국의 공중파 방송에서는 볼 수 없는 다양한 프로그램을 서비스 받을 수 있다. 그러나 방송학자들은 현재 일방적으로 수용만 하는 처지인 한국의 경우 새로운 방송 문화 정책을 마련해 적극 대응해야 한다고 지적한다. 안수근 교수(부산경상전문대 . 방송학)는 “텔레비전의 영향력은 장기간 누적되어 효과가 나타난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한다. 외국 방송은 자국의 관점에서 제작 . 송신되기 때문에 정치 선전 및 상업적 지배와 문화 침투 수단이 되고 있다”라고 분석하고, 지금과 같은 일방통행을 쌍방통행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시급히 마련해야 한다고 말했다. 위성방송을 통한 외국 문화 유입을 차단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려운 지금 시민 감시기구나 단체에서 시청자운동을 전개하고, 국내 텔레비전도 종일 방송을 실시하든가 위성방송과 경쟁할 수 있는 편성 전략 및 프로그램의 질적 개선을 이루어 시청자의 욕구를 충족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양담배나 농산물 같은 일반 상품과 달리 공중에 떠다니는 위성방송이라는 상품은 텔레비전을 켜기 전에는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 틈을 타 우리 안방에 파고든 위성방송은, 문화 종속말고도 기술 의존과 광고를 통한 경제 종속마저 초래할 가능성이 매우 높다. 아시아가 강대국 문화 산업의 각축장이 되어 가고, 앞으로 한국을 가시청권으로 삼을 위성수는 10자리를 넘어서서 100자리에 이르게 될 것이라는 전망도 나온다. 소극적인 방어 전략이 아니라, 정부가 문화 부문에 대한 경제 지원 정책을 확고히 설정하고 장기적이고 집중적인 지원책을 마련해야 한다는 주장이 관련 학계에서 강력하게 제기되고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成宇濟 기자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