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출 달러 갉아먹는 ‘엔고’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4.07.2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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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자금담당자, 환차손 피하려 전전긍긍

현대그룹 자금담당자들은 ‘초엔고’를 불안한 눈길로 지켜보고 있다. ‘엔환을 위험에 노출되지 않도록 노력하라’는 지시를 수차례 받았지만, 워낙 환율 오름세가 가팔라 살얼음판을 걷는 심정이다. 이 그룹의 강연재 부장은 “중화학 업종이 몰려 있는 현대그룹이 엔화 강세로 인한 영향을 가장 많이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포항제철은 천억엔에 달하는 엔화 표시 부채 가운데 일부를 달러화로 바꿀 것을 검토하고 있다. 그러나 외환담당자 입장에서는 매우 조심스럽다. 가지고 있는 부채의 환율이 급변동할 때는 이에 따른 위험을 피하기 위해 환율이 안정된 유리한 통화로 바꿀 권리를 사는 것(통화 옵션)이 좋지만, 이같은 안전장치를 하는 데는 상당한 돈(프리미엄)이 든다. 만약 통화 옵션 계약을 체결한 후에도 엔화 강세 현상이 지속된다면 자금담당자는 칭찬을 받겠지만, 달러 강세(엔화 약세)로 상황이 반전된다면 프리미엄을 날리는 셈이된다. 옵션 프리미엄은 위험에 대한 일종의 보험료이지만 이를 경영자가 이해해줄지 불안한 것이다.

 삼성물산은 최근 엔화에 대한 경각심을 높이는 내용의 전문을 영업부서에 보냈다. 엔으로 오퍼(수입)를 낼 때는 특히 주의를 요망하며, 수출과 수입 자금 간에 불일치 현상이 발생할 때는 즉각 자금부와 협의하라고 부탁했다. 이 회사 윤영섭 국제금융과장은 “호들갑을 떨 정도는 아니지만 엔고가 요주의 대상인 것은 틀림없다”라고 지적한다.

 엔화 초강세는 영업 활동에서 발생하는 환율 · 금리 급변동 위험을 제거해야 하는 자금담당자들을 극도의 긴장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 한국전력 김준수 국제자금부장은 “최근의 엔화 초강세는 이해하기 힘들다. 이런 예측 불허가 더 피를 말린다”라고 털어놓았다. 환율 결정 이론에 의하면 엔화는 달러화에 대해 약세를 보여야 한다. 일본 경제는 미국 경제에 비해 상황이 좋지 않으며 정국이 불안정하기 때문이다. 최근 엔과 달러 간의 환율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엔고는 한국 경제에 좋은 영향을 미쳐 ‘빛’이 크지만 ‘그늘’도 만만치 않다. 일본과 경합하는 수출 쪽은 느는 재미가 쏠쏠하지만 수입 쪽은 불리할 수밖에 없다. 엔화 가치가 올라갈 때는 일본으로부터의 수입을 줄이는 것이 좋지만, 줄이고 싶다고 해서 줄여지는 것이 아니다. 구조적으로 일본에서 기계류와 원 · 부자재를 사와야 하기 때문이다. 대우그룹은 계열사 구매담당자에게 하청업체로부터 부품을 조달할 대 일본산 원 · 부자재가 있는가를 꼼꼼히 따져, 있다면 사지말도록 지시했다. 이것은 소극적 대처 방법이지만, 엔고를피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인 국산화가 매우 더디기 때문에 할 수 없다.

 엔고 파장을 줄이는 한 방법은 일본에서 사오더라도 수입 대금을 엔으로 지불하지 않고 달러로 결제하는 것이다. 그러나 일본 부품상들은 거의 대부분 엔으로 결제하라고 요구한다. 이 요구는 받아주지 않을 재간이 없다. 대부분 반드시 사와야 할 핵심 부품이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은 팔 때는 물론 살 때도 종종 이같은 서러움을 당해야 한다. 기업 담당자들은 이런 처지를 자조적으로 ‘乙의 입장(불리한 구매자. 큰 소리를 치는 구매자는 甲의 입장)’에 서 있다고 표현한다.

 쌍용그룹은 올해 그룹 전체로 60억엔이 부족(쇼트 포지션)할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그룹 재무팀의 류성림 과장은 “초엔고는 점점 무디어질 것으로 전망되지만, 몇 개월은 경영 면에서 추운 겨울이 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라고 내다본다.

 대기업들은 수출입 거래를 할 때 선물화계약을 통해 환율 변동에 따른 위험을 피해간다. 그러나 환율 예측력이 뒤떨어지고 다양한 헤징(위험 해피) 기법에 대한 경영자의 무지가 뒤엉켜 상당한 환차손을 입고 있다고 외환은행의 한 딜러는지적한다. 지난해 국내 제조업체들은 경상이익의 14.7%(5천8백52억원)나 되는 돈을 환차손으로 앉아서 갉아먹었다.

엔 부채 많은 기업 ‘발등의 불’
 돈을 주고받는 자본거래에도 엔고의 함정은 도사린다. 엔화 표시 부채가 많은 기업은 좌불안석일 수밖에 없고, 엔화 표시 부채를 어떻게 관리하느냐가 발등의 불이 되고 있다. 외화 부채와 자산을 일치시켜 놓으면 환차손이나 금리 부담은 발생하지 않지만, 현실 세계에서는 불일치 현상이 왕왕 일어난다.

 포항제철은 외화 표시 부채의 35% 정도가 엔화 표시 부채이다. 재무제표가 만들어지는 연말게 환율이 여전히 백엔대 밑이라면 상당한 외환 평가손이 날 수 있지만, 포철은 그렇게 될 공산이 희박하다고 본다. 한 자금담당자는, 올해 수출을 통해 8백억엔을 벌고 수입과 부채의 원리금 상환으로 5백50억엔을 지출할 계획이어서 현금 흐름상 큰 문제는 없지만, 엔화의 향방에 따라 울거나 웃을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말한다.

 한국전력은 외화부채 총 68억달러 중 10%(7백억앤) 정도의 엔화 표시 부채가 있는데 이 중 일부를 내년 6월에 갚아야 한다. 이 회사는 이 빚을 1백66엔일 때 달러화로 바꾼 후 다시 100.42엔일 때 엔화로 돌려 놓았다. 두 차례 통화 스와프를 통해 표시 통화가 원상 회복된 것이다. 김준수 부장은 “내년 6월에 엔화 환율이 백엔을 웃돈다면(엔화 약세) 상환 부담이 적어져 유리하다”고 설명한다.

 널뛰듯 하는 엔화는 올해 기업 자금당담자들을 괴롭히는 최대의 적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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