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 홍 총장에게 묻는다
  • 편집국 ()
  • 승인 199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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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세웅 신부의 공개 질의/“모순된 주장이 참된 용기인가?”

‘한총련 배후’발언으로 공안파문을 불러일으켰던 서강대 박 홍 총장은 7월29일 예정되었던 공식 일정으로 미국행 비행기에 올랐다. 박총장 발언 이후 많은 총장들과 지식인들이 그의 ‘용기’를 찬양했다. 한때 경찰은 그의 ‘용기’를 물리적으로 보호했다. 언론들은 연일 그의 ‘용기’를 증폭시켰다. 그러나 우리 사회에는 그의 ‘용기’가 도덕적 바탕을 갖춘 용기인가를 고통스럽게 검증하는 또 다른 양심이 있다. 천주교 정의구현전국사제단의 함세웅 신부는 그 ‘양심’의 기고문을 《시사저널》에 보내왔다. 함신부는 박신부와 신학대학 동기생이다.《시사저널》은 함신부의 글을 실으면서, ‘용기’와 ‘양심’이 보다 열려진 자리에서 이성적으로 논의되기를 기대한다.〈편집자〉

 7월 초만 해도 우리는 남북 정상회담을 앞두고 통일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과 꿈을 간직하고 있었다. 통일원을 주축으로 한 실무자들의 일손도 바쁘게 움직였다. 다른 때와는 달리 실무 협상에서부터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다. 다소 이견이 있었으나 그것은 다 부차적인 것이었을 뿐 핵심적인 것은 모두 합의가 된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가. 김일성 북한 주석이 사망했다는 것이다.

김일성의 죽음이 남긴 것

 다른 때 같았으면 모두들 기쁨의 함성을 울렸겠지만, 정상회담을 겨우 두 주일 앞두고 전해진 소식은 우리에게 놀라움과 함께 큰 아쉬움을 안겨주었다. 북한에서 거의 절대적 귄위를 지닌 그가 살아 있을 때에 xd일에 대한 물꼬가 트여야 하는데, 이제는 통일 논의가 오히려 몇 걸음 뒤로 물러나지 않을까 하는 염려와, 통일을 예시하던 한 가닥 희망의 불빛이 혹시 꺼지는 것이 아닐까 하는 불안이라 할까 또는 좌절감 같은 것이 스쳤기 때문이다. 의미는 다소 다르겠지만 어쨌든 김영삼 대통령도 김주석의 죽음에 아쉬움을 표했다. 이때의 우리 마음은 나름대로 순수성을 지녔다 하겠다. 김일성도 어쩔 수 없이 죽어야 하는 한 인간임을 우리는 역사의 현장에서 목격한 것이다.

 미움과 증오와 저주의 대상이었던 그의 죽음이 우리에게 아쉬움을 주었다는 것은, 하느님의 섭리의 오묘함과 함께 여러 상징적 의미가 있다고 생각된다. 임종 체험의 공통적 요소라고 할까. 사람은 죽을 때에 순수함을 되찾는다던데 김주석이 죽음에도 그런 의미가 있었을까. 사실 카터 전 미국 대통령이 김주석에 대하여 전해준 내용 중에 더러는 종교적 흔적이 있었기에 신앙이라는 관점에서 많은 것을 생각해 보았다.

 어쨌든 김주석의 죽음은 그에 대한 이제까지의 우리의 편견과 미움을 상당히 중화시켰던 것이다. 그 직후 언론은 앞으로의 북한 체제를 여러 시각에서 상상하고 가능성 있는 모습을 나름대로 그려 주었다. 남북문제와 통일 관계 전문가들도 훌륭한 식견으로 많은 것을 제시해 주었다.

 특히 대담에 나온 전문가들은 김일성 북한주석의 사망 이후 북한이 내부적으로 분열되거나 또는 혼란에 빠질 가능성도 갖고 있지만, 북한이 혼란에 빠져서는 안되고 오히려 하루빨리 안정되어 남북 정상회담이 성사되기를 공통으로 강조했다 북한이 내부적으로 안정을 되찾아야 남북대화가 순조롭게 이루어질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참으로 전문가다운 수준 높은 식견이라 생각되었다.

 사실 그 며칠 간은 어떤 이의 말대로 가히 김일성 증후군이라 할 정도로 온통 그와 통일에 관한 희망 얘기뿐이었다. 이런 가운데 국회에서 정부측과의 질의 응답 과정에서 야당 의원들이 예정되었던 남북 정상회담이니 김일성 북한 주석의 죽음에 대해 외교 정책적으로는 물론 인륜적 측면에서도 조의 표명을 고려해 줄 수 있지 않겠는가라고 조심스럽게 물음을 던졌다. 그리고 정부측의 원론적 답변으로 잘 끝났다.

냉전시대 논리가 국민 혼란시켜

 그런데 여당 의원들은 ‘조의 표명’에 대한 조심스러운 물음에 이의를 제기하며 그 물음의 뜻을 왜곡한 채, 전쟁 주범에 조의가 웬말이냐는 식으로 목청을 높이며 문제의 핵심을 엉뚱한 데로 몰고갔다. 또한 이에 대해 정부측의 분명한 태도, 즉 부정적 답변을 구체적으로 강요하다시피 했다. 답변에 나선 한승주 외무부장관은 온갖 궤변의 질문이 쏟아졌어도 그 함정에 빠지지 않고, 학자다운 소신으로 일관되게 국제 외교 사회에서는 영원한 동지나 영원한 적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설명과 함께, 국익을 위해서는 적국의 대표에게도 조의를 표할 수 있다는 외교 원론을 펼쳤다. 그는 김일성 북한 주석의 사망에 대해서는 김영삼 대통령이 아쉽다라고 한 표현이 정부의 공식적 표명의 모두라고 생각해도 좋다는 식으로 답변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 이후 신문·방송은 별것도 아닌 이같은 내용을 ‘조문 논쟁’‘조문파동’이라는 제목을 달고 확대·과장 보도했다. 그러자 그 이전에 가졌던 남북대화의 긍정적 면이 소리 없이 사라지면서 반공 냉전 논리와 함께 북한에 대한 부정적인 면이 크게 부각되기 시작했다. 이것은 참으로 슬픈 우리 내부의 분열과 소모일 뿐이었다. 어쨌든 이 문제는 여당과 야당 등 서로의 이해 속에서 일단락된 셈이 되었다.

 그런데 그 이후 변덕스러운 신문과 방송들은 온통 북한 체제에 대한 부정적 측면들을 크게 부각하여 국민들을 헷갈리게 하면서 대화와 화해와 일치를 지향하기보다는 오히려 과거 냉전체제의 논리를 반복하면서 기계적 반공의식을 북돋우고 있다. 사실 야당 의원들의 주장대로 북한에 조의를 표했다면, 그것은 우리가 넉넉함과 정치적으로 앞선 성숙함을 보여주었음은 물론 앞으로 이어질 북한과의 대화에서도 인간적 신뢰와 함께 도덕적 힘을 발휘할 절호의 기회가 아니었을까 상상해 보았다.

폭력 학생 꾸짖더라도…

 그런데 7월18일 청와대에서 있었던 대통령과 대학 총장들과의 간담회에서 박 홍 신부는 “학생 운동의 배후에는 주사파가 있고, 주사파는 사노맹에 의해 조종되고 있으며, 그 배후에는 북한의 사로청과 김정일이 있다”는 엉뚱한 발언을 했다. 이 사실이 신문에 보도되면서 많은 사람이 놀라 학생운동 전체를 매도하게 되었다. 신문·방송은 ‘이때다!’하고 목청을 높여 학생들을 외길로 몰기 시작했다. 박 홍 신부의 엉뚱한 발언에 대해 우리 사제들은 참으로 큰 부끄러움과 슬픔을 느꼈다. 왜냐하면 그것은 너무도 무지한 비상식적 발언이었기 때문이다. 물론 학생들의 과격성·폭력과 잘못된 시위를 꾸짖고 바른 방향을 제시하는 것은 마땅하고 좋은 일이다. 그러나 학생운동과 농민들의 우루과이 라운드 협정 비준 반대가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발언은 무책임한 것이다. 박 홍 신부는 많은 증거를 갖고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는 하나도 증거를 내놓지 못하고 있다. 참으로 무서운 일이다.

 그래서 우리 사제들이 모여 숙고하고 의견을 나누었다. 박 홍 신부의 무책임한 발언에 쐐기를 박고 학생과 농민 등 관계자들에게 부끄러운 마음으로 사죄를 청하기로 했다. 박 홍 신부의 무책임한 거짓 발언은 이번이 처음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제단 성명에서도 밝힌 바 있지만, 지나 82년 5월 한국교회사회선교협의회의 이른바 반미 선언과 관련해 많은 목사와 사제들이 검찰에 끌려가 조사를 받고 있던 중에, 박 홍 신부는 그 과정과 깊은 내용을 모른채 느닷없이 기자회견을 통해 천주교 신부들은 선언문에 서명한 일이 없다고 발표했다. 이 때문에 개신교 목사들이 거짓된 사람으로 오해되어 가톨릭과 개신교 성직자들 사이의 신뢰가 깨어지게 되었다. 목사들께 참으로 죄송스러운 일이었다. 박 홍 신부는 결국 공안 정국에 편승해 재야 민주 세력이 분열하고 탄압 받는 데 빌미를 제공한 것이다.

박총장 발언은 ‘언어의 폭력’

 또한 그는 91년 5월 젊은이들의 잇단 분신 죽음에 대해 “배후가 있다. 자살 특공대가 있다. 근거가 있다”는 발언을 하여 가족은 물론 우리 모두의 마음에 큰 슬픔을 안겨 주었다. 결국 검찰은 박 홍 신부의 무책임한 발언에 힘입어 유서 대필 사건을 조작하여 강기훈 청년을 구속했다. 박 홍 신부가 말한 배후, 박 홍 신부가 말한 근거란 무책임한 발언뿐이었다. 한 사제의 무책임한 발언으로 억울한 청년이 지금도 옥살이를 하고 있다.

 강기훈 사건은 한국판 드레퓌스 사건으로 불린다. 나는 사제로서 속죄하는 마음으로 인권운동가 서준식씨의 청을 겸허하게 받아들여 강기훈씨 무죄 석방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결국 3년 만기가 되도록 별 힘이 되어주지 못한 것을 늘 죄스럽게 생각한다.

 그런데 박 홍 신부는 이번에 또 엉뚱한 발언을 했다. 몇 사람이 아닌 학생운동 전체를 매도한 것이다. 그는 지난해부터 어떤 모임에 서든지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그저 반ㅂㄱ된 말뿐이다. 박신부와 자리를 같이한 사람들은 누구나 그런 말을 수없이 들었다. 그러나 그의 말에는 논리성이 전혀 없다. 단순히 ‘북한의 지령이 있다’‘봤다’‘들었다’‘증거가 있다’는 식이다. 처음 듣는 사람들은 당황하면서 놀란다. 그러나 두 번 세 번 듣노라면 그것은 그의 단순한 반복어법임을 쉽게 알 수 있다. 7월초 무주에서 있었던 대학 총학생회의에서도 같은 말을 했는데 반응이 신통치 않았다. 그런데 묵살 당했던 그의 발언이 7월18일 청와대 식탁에서부터 그 권력의 힘을 배경으로 경색된 공안 정국에 힘입어 언론에 실리게 된 것이다.

 여당 의원들도 말했지만, 그의 발언에는 문제가 있다. 우선 그는 주사파와 사노맹을 구별하지 못하고 있다. 그저 배후 조종이라고만 주장할 뿐이다. 그런데 검찰의 기소문을 보아서도 명백한 것은, 사노맹은 주체사상을 무섭게 비판하는 고전적 사회주의라고 할까 북유럽식의 사회주의를 그리는, 그 사상적 성격과 조직이 전혀 별개인 것으로 현재는 박노해 시인 등 중심 인물이 구속되어 사실상 해체된 것이다. 그런데도 박 홍 신부는 기자들의 끈질긴 질문에 “그게 다 그거야, 그것은 다 사촌이야!”하면서 궤변을 되풀이하고 있다. 더구나 농민들의 우루과이 라운드 반대운동도 북한의 지령에 의한 것이라는 발언은, 농민들의 찢어진 가슴에 소금을 뿌리는 잔인한 일과 같다.

 김영삼 대통령은 박 홍 신부의 발언을 용기 있는 지성이라고 칭찬했다. 동료 사제가 용기 있다고 칭송받으니 참으로 기쁜 일이다. 그러나 참으로 그것이 용기인가? 학생들을 매도하는 일이 결코 용기일 수 없다. 참된 용기란, 대통령 앞에서 개혁정책 추진의 일관성 결여 지적, 상무대 비리 사건의 진상 규명 요구 또는 관계 가족에 대한 부정 의혹, 여론 환기 같은 내용의 발언이 아닐까. 대통령의 뜻에 맞고 공안 부처가 즐기는, 논리적 근거가 없는 모순된 주장이 어떻게 용기 있는 발언이 될까. 어느 철학자의 말대로 이것은 분명 ‘언어의 부패’다. 더구나 박 홍 신부의 말은 ‘언어의 폭력’이다.

언론이 선동하는 “십자가에 못 박아라!”

 그는 늘 말한다. 병균은 미워하지만 병자를 사랑해야 한다고, 나병균은 없애야 하지만 나병 환자는 껴안아야 한다고. 그리고 5,6공 청산 또는 광주학살 진상 규명에 대해서는 늘 용서와 사랑을 강조한다. 참으로 훌륭한 사제적 발언이다. 그런데 그는 학생운동에 대해서는 그 논리를 반대로 적용하여 학생들을 제거해야 할 병균으로 간주하고 있다. 이것은 논리적 모순이며 무서운 거짓 이론이다. 그런데 신문과 방송은 박신부의 논리적 모순, 거짓된 주장을 너무나 잘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묻거나 지적하지 않는다. 다만 박 홍 총장 지지자가 많다고, 주사파는 뿌리를 뽑아야 한다는 식으로 엉뚱하게 초점을 흐리며 국민들을 호도하고 있다. 김일성 북한 주석의 애도 장면에 대해 언론은 광신적·집단적 히스테리라고 해석해 보도하고 있다.

 사실 개인적 소신이든, 정치적 확신이든, 또는 애국심이든, 나아가 종교적 신앙이든 그 앞에 광(狂)자가 붙으면 그것은 다 문제가 있다. 종교적 광신이 제일 무서운 병이 아닌가. 예수 그리스도도 유대교의 광신적 무리에 의해 죽음을 당했다. 그뿐 아니라 그는 거짓된 여론, 인민재판 식의 선동, ‘십자가에 못 박아라! 십자가에 못 박아라’하는 군중의 외침, 그 여론에 의해 죽어갔다. 오늘 우리 언론의 현실에서 우리는 비슷한 징후를 본다. 큰 활자와 큰 소리는 무조건 옳은 소리로 전달하고, 소박하고 진실된 목소리는 작은 글자로 또는 앞과 뒤가 다 잘린 채 왜곡되어 전달된다.

 우리는 성서를 하느님의 말씀, 사람을 살리는 구원의 말씀이라 고백한다. 그리고 거짓말은 사람을 죽이는 죄, 또는 사탄의 말이라 부른다. 같은 말이지만 사람을 살리는 말과 죽이는 말이 있다. 약자를 대변하여 희망을 주는 구원의 말과 권력자의 편에 서서 억울한 사람을 누르는 불의한 말이 있다. 성서는 늘 살아 있는 말씀으로 우리에게 다가온다. 우리 시대에 참으로 이런 말씀이 필요하다.

 일제 치하에서 일본 천황에게 충성을 다했던 거짓 언론, 군부 독재 치하에서 그 독재자들을 찬양했던 언론, 82년 4월 부산 미문화원 사건과 관련해 최기식 신부가 구속되었을 때 가톨릭을 온통 용공으로 매도했던 언론, 임수경양과 문규현 신부의 방북과 관련해 온갖 음해와 거짓을 보도했던 언론, 그 언론은 지금 민족 앞에 깊이 뉘우쳐야 한다. 우리 교회가 민족 앞에, 학생 청년 앞에서 반성하듯 한국의 언론은 회개하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 70년대 동아·조선 투위의 자유언론 투쟁을 모범 삼아 언론인은 참으로 정도를 걸어야 한다. 논리성을 기초한 진실을 보도하고 온갖 망상의 궤변을 청산해야 한다.

 진리의 전당, 상아탑의 상징인 대학 총학장들이 툭하면 청와대에서 모임을 갖는다. 권력의 시종이 아닌 진리의 힘, 권위의 활력소로서의 대학 지성인이기를 애타게 바라는 마음이다. 현실의 모순에 도전하는 청년 학생 그리고 대안적 공동체를 꿈꾸며 고뇌하는 젊은이들, 이들의 끊임없는 이의 제기와 새로운 사상 추구, 이것이 바로 미래를 위한 창조적 원동력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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