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산의 새 돈준 러시아 타운
  • 부산. 정희상 기자 ()
  • 승인 1994.08.1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미군 상대 텍사스 골목이 ‘달러박스’로 탈바꿈 러시아 상인 연간 10만명 몰려와 1천억원 뿌려

불볕 더위가 기승을 부리던 지난 7월20일 정오, 부산시 초량동 부산역 맞은편에 자리한 속칭 텍사스 골목. 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러시아인 수백명이 골목길을 누비고 있다. 손에 손에 커다란 비닐 가방을 든 이들은 종종걸음으로 이 집 저 집 들락거리며 값을 흥정하거나 물건들을 비닐 가방 안에 담기에 바쁘다.

 약 2km에 달하는 이 골목을 가득 메운 러시아인 행렬은 개미떼를 연상케 한다. 거리양편에는 점포마다 러시아어로 된 간판이 즐비하게 나붙어 있어 러시아의 한 도시에 와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착각마저 들 정도이다. 같은 시각 큰 길 건너편에 있는 한국인 상대 상점들은 더위 때문에 인적조차 뜸해 큰 대조를 보인다.

간판도 러시아어 표기로 바뀌어

 대체 이들은 이 더위에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 것일까. 마침 화사한 양장 차림을 한 러시아 중년 여성 세 사람이 어른 몸집만한 물건 보따리들을 1t 트럭에 옮겨 싣고 있었다. 한 사람의 소매를 붙들고 물어보았다. 이틀 전 러시아 관광선으로 부산항 제1부두에 들어왔다는 나홋카 출신 토냐씨(40)는 “러시아에서 한국 물건이 인기가 좋아 블라디보스토크 도매상에 팔아 넘기려고 부탄가스 열여섯 박스와 화장품 만달러어치를 사가는 길이다”라고 말한다. 여럿이서 관광선을 타고 왔는데, 그 배에는 2백여 명이 각각 팀을 이뤄 같은 목적으로 들어왔다고 한다.

 물건을 가득 실은 트럭은 이곳에서 약 2km 떨어진 부산항 제1부두를 향해 곧장 빠져나갔다. 뒤따라 가본 제1부두에는 세관 마당 곳곳에 러시아인들이 실어온 물건이 즐비했다. 그들의 키만큼 쌓인 작은 비닐가방들에서 냉장고·소파·장롱 등 덩지 큰 물건들에 이르기까지 다양햇다. 한켠에서는 또 한 무리의 러시아인 40여 명이 통선에서 내려 줄지어 세관 검사대를 빠져나와 부산역으로 향한다.

 세관 통선장에 근무하는 김민용 해상감관은 “요즘 러시아인들이 하루 평균 5백 명쯤 이곳 부두를 동해 들어오고 있다”라고 말했다. 그에 따르면, 러시아인이 사가지고 나가는 물건은 하루에 2억~3억원어치에 이른다.

 한국과 러시아가 국교를 튼 지 4년 만에 러시아는 이렇게 한국으로 파고들어 왔다. 4년 전까지만 해도 부산항을 찾는 미 군함 장병들을 상대로 문전성시를 이뤘던 부산역 앞 텍사스 거리는 이제 러시아인들이 ‘점령’했다. 미군을 밀어낸 러시아 상인들의 발길은 5백m쯤이던 텍사스 골목을 2km로 늘려 놓았다. 이 과정에서 6·25 전쟁 때 시작돼 40여년간 미군을 상대해 호황을 누려온 백여 개 유흥업소는 속속 러시아인을 상대로 하는 점포로 업종을 바꾸었고, 지금은 세 군데만이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거리의 간판도 영문 표기에서 러시아어로 바뀌었다.

 텍사스 골목의 변화는 한국이 맞닥뜨린 국제 관계 변화를 상징한다. 20년 동안 미군을 상대해 술집을 경영하다 지난해 러시아인 상대 의류 가계를 낸 김○○씨는 부산에 밀어닥친 변화를 이렇게 설명한다. “90년에 고르바초프가 제주도를 다녀간 직후부터 러시아인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나도 이곳에서 주먹깨나 쓰고, 한때는 밀수하다 걸려들어 철창신세도 졌다. 그런데 러시아인들이 몰려들면서 이 거리를 주름잡던 밥장사·술장사·깡패·밀수꾼 출신들이 배겨낼 재간이 없어졌다. 전부 가게를 내느라 정신 없었다. 처음에 시작한 사람들 중에는 수억원씩 번 사람도 많다. 요즘은 점포가 늘어나서 수입이 처음 같지는 않지만 작은 점포도 하루에 2백만~3백만원 매상은 거뜬히 올린다.

 작년 한 해 부산을 찾은 러시라인은 10만여 명에 달했다. 일본인 다음으로 많은 숫자다. 올해는 6월말 현재 5만4천여 명이 부산을 다녀갔다. 이처럼 해마다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들이 늘어나면서 텍사스 골목도 이름이 바뀌었다. 지난해 12월 이곳 상인 백여 명은 부산시와 협의해 이 거리를 러시아 타운으로 부르기로 했다.

 러시아 타운에서 한국 상품을 사 나르는 러시아인 행렬은 매일 아침 9시께부터 해질무렵까지 이어진다. 이들이 사는 물건은 딱히 무엇이 주종이라고 말할 수가 없다. 러시아의 생필품 부족 현상을 반영하듯이 가전제품·가구·옷·가방·식료품 등 생활용품에서부터 폐타이어와 중고 자동차, 심지어는 아기기저귀에 이르기까지 거의 모든 물건을 대상으로 한다. 그렇기 때문에 러시아타운의 백여 점포는 겉으로느 다들 특정 상품 전문업체라고 표기하고 있지만 거의가 만물상 식으로 운영된다.

관광선 전세내 한국 상품 사재기

 부산시의 한 관계자는 러시아 타운을 ‘달러 박스’라고 표현했다. 물건을 사러 오는 러시아인들이 달러만 가져오기 때문이다. 90년 한·소 수교 직후에 찾아온 러시아인들은 물물교환을 고집하기도 했다. 연어알·명태꾸러미 따위를 가져와 상품과 바꿔달라고 졸랐다. 그러나 큰 장사꾼이 늘어나면서 결제 수단은 달러로 통일됐다. 러시아 루블화는 가치가 계속 하락해 이곳 러시아 타운 점포에서는 벽에 붙여두고 보는 기념품 취급을 받고 있다.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들이 1인당 뿌리는 액수는 방문 목적에 따라 다양하다. 선박 수리차 입항한 선원들은 천~2천달러어치 물건을 산다. 그러나 순전히 한국 상품을 대량 구매할 목적으로 관광선을 전세내 찾아오는 사람들은, 팀을 이루어 수만달러에서 많게는 수십만달러에 이르는 돈을 부린다. 러시아 정부는 1인당 달러 소지 한도를 2천5백달러로 정해두고 있지만 현재는 5천달러까지 자유로이 가져올 수 있다.

 러시아의 경제 사정으로 볼 때 그 많은 달러를 어떻게 akfs할 수 있는지 궁금했다. 러시아 타운의한 저포에서 러시아인을 상대로 통역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는 하바로프스크 출신 알렉산드르씨(46)는 그 내막을이렇게 설명한다. “요즘은 루블 가치가 1달러당 2천루블선까지 떨어졌지만 소련 체제때에는 1달러에 1루블이었다. 당시 해외에 나갈 기회가 많은 당원들과 선원, 외국 주재 상사원들은 국제사회에서 루블 가치가 인정받지 못하는 것을 알고 달러로 바꾸어서 몰래 지니고 있었다. 그 돈이 지금 장사자금으로 나오는 것이다.”

 그의 말에 따르면, 러시아인들이 부산에서 앞다투어 한국상품을 사가는 상황은 러시아 정국의 불안정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부산항에서 일단 물건을 실어 블라디보스토크나 하바로프스크 등 러시아 극동지방 항구를 통과해도 통관제도가 아직 제자리를 잡지 못해 별 제약 없이 반입하 수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관광선을 타고 와서 부산에서 한국 상품을잔뜩 사가는 상당수 러시아인들은 사실상 본국에서 불법 영업을 하는 셈이다.

 러시아인들이 한국 상품을 사가는 목적은 대부분 본국에서 큰 차익을 남겨 팔기 위해서이다. 이들은 크게 두 가지 유형이다. 자기가 직접 좌판을 벌여 파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블라디보스토크 백화점이나 현지 도매상에 넘기는 사람도 있다. 이와 관련해 7월21일 관광선을 타고 부산항에 입항한 루트밀러씨(38·여)는 러시아 현지의 한국 상품 인기도를 이렇게 설명했다. “블라디보스토크에 있는 러시아 무역회사(도매상) 세 곳에서 돈을 합쳐 우리 일행을 보냈다. 우리는 보수만 받고 물건을 사다 넘겨주면 그만이다. 블라디보스토크에는 상점마다 세계 각국에서 들어온 물건으로 꽉 차있다. 이탈리아제와 일본제가 좋다는 것은 알지만 값이 너무 비싸 수요가 없다. 중국제는 값은 싸지만 품질이 떨어져 별로 안 찾는다. 러시아인들은 메이드 인 코리아가 품질과 가격에서 적당하다고 평가한다.

지역 경제 살리는 효자 노릇 톡톡

 부산항을 통해 빠져나간 한국 상품은 러시아의 극동 지역 소비자에게 세배 정도 이문을 남기고 팔린다고 한다. 한국 상품 반입이 러시아에서 ‘잘 나가는’ 장사로 알려지자 무역업자 외에 어선·상선 선원들도 다투어 물건 사기 행렬에 끼고 있다. 부산항 세관 통선장에 근무하는 한 관계자는 “관광객은 거의 백%가 물건 사러 오는 사람들이다. 요즘은 관광선을 못 잡는 러시아인들이 웃돈을 주고 어선을 타고 들어오는 일도 많다. 부산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배삯이 왕복 5백~6백달러인데, 어선을 탄 사람들은 천달러씩 준다고 한다”라고 말한다. 그는 이같은 러시아인들의 입국 러시는 엄밀하게 따지면 규제 대상이지만, 이들이 막대한 달러를 뿌리기 때문에 지역 경제 활성화를 고려할 수밖에 없다고 털어놓았다.

 하루 종일 북적대던 러시아 타운이 문을 닫는 시간은 대략 오후 8시쯤이다. 시에서는 이 지역에 24시간 영업 혜택을 주고 있지만 러시아인들은 주로 배에서 잠을 자기 때문에 밤이 되면 몇몇 유흥업소를 제외한 일반 점포는 한산해진다. 러시아 선박들은 대부분 높은 접안료를 내기가 힘들어 내항에 접안하지 않고 먼바다에 정박해 있다. 때문에 러시아인들은 부두 통선장에서 본선을 드나든다. 통선비용은 거리에 따라 1척당 2만원에서 6만원씩이다.

 러시아 타운이 활성화하면서 거래 과정에서 러시아어 통역은 필수이다. 그러나 전문 통역인력이 없기 때문에 대부분의 점포는 러시아인이나 사할린 교포를 아르바이트 요원으로 쓴다. 이들 중 상당수는 허가받지 않은 체류자이다. 한 가방 전문 점포에서 두달째 통역원으로 일해 왔다는 사할린 교포 황○○씨(43)는 “일당 30달러씩 받는데 요즘 방학 때라 부산 외국어대학 러시아어과 학생을 통역원으로 쓰는 점포가 늘고 있다”라고 말했다.

 지난 4년간 활발한 거래를 통해 부산 러시아 타운은 러시아 극동지역에서 매우 유명해졌다. 이곳 백여개 점포들은 러시아 극동지역 현지에서 러시아인들을 상대로 한 안내 책자와 신문·잡지 광고를 공동으로 내는 등 유치작전을 적극 벌이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은 러시아에서 사고자 하는 상품 내역을 팩시밀리로 보내 미리 주문하는 식으로 거래가 이뤄지기도 한다.

 러시아 타운에서 한국인 점포끼리 경쟁이 치열해지자 최근에는 부작용도 적지 않다. 이곳 상점들은 상품을 주로 부산 인근 중소기업에서 납품받거나 부산 국제시장, 서울 남대문시장에서 구입한다. 그러나 점포 수가 늘어나면서 경쟁이 치열해져 덤핑 판매가 늘어났다. 덤핑 판매가 성행하는 것은 달러 결제가 원인 중 하나이다. 상인들은 물건을 원가에 팔아넘겨도 대금으로 받은 달러를 지하 사채시장에서 팔아 환차익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일부 점포가 앞다퉈 값이 싼 제품으로 경쟁을 하다 보니, 한국 상품 질이 형편없다는 불만을 산다는 점이다. 흠이 있는 물건을 반품 받아주지 않는 점도 문제로 지적된다.

 이같은 불만은 러시아 타운을 두 번 이상 찾아온 러시아인에게서 심심치 않게 들을 수 있다. 지난 7월20일 러시아 타운을 세 번째 방문했다는 나홋카 출신 쿠로치킨씨(42)는 “한국 상인들은 러시아인들을 너무 깔보고 속이는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어리숙하지 않다. 서울이든 부산이든 다 돌아다녀 보고 마음에 드는 물건을 싸게 살 생각이다”라고 말했다. 러시아 무역회사에서 파견돼 물건을 사러온 그는, 지난해 11월 두 번째 부산에 왔을 때 한 점포에서 가죽 점퍼류를 6만달러어치 사갔는데, 며칠후 다른 상인이 그가게에서 똑같은 물건을 절반 값에 사온 사실을 알았다고 한다.

 이같은 러시아 타운의 무질서한 상거래는 러시아 정부측에서도 문제를 삼기에 이르럴T다. 지난해 12월 블라디보스토크 세관이 러시아 타운을 방문해 시장 조사를 해갔는가 하면, 올들어서는 대규모 도매상과 백화점 관계자들이 역시 불공정 상거래를 조사할 목적으로 방문했다. 러시아 정부는 자료를 만들어 부산을 찾는 러시아인들에게 ‘사기당하지 않는 법’을 특별히 주지시키고 있다고 한다.

 일부 피해를 본 러시아인들은 보복을 일삼기도 해 말썽이 되고 있다. 피해를 준 점포에 물건을 많이 준비하게 했다가 가져가지 않는 수법으로 골탕을 먹이는데, 지난 봄 러시아 타운의 한 점포는 2억여 원을 날린 일도 있었다. 또 어떤 러시아인들은두번째 방문할 때 그 점포를 찾아가 도둑질을 하기도 한다. 부산 경찰청 외사과의 한 관계자는 “지난해 러시아 타운에서 발생한 범죄 중 앙심을 품은 절도가 23건이나 적발됐다”라고 밝혔다.

무질서한 상거래 바로잡아야

 러시아 타운내 일부 상인들의 비뚤어진 상술을 한국 상품 전체의 이미지를 떨어뜨린다는 점에서 문제가 도니다. 부산시는 러시아 특수가 지역경제 활성화에 큰 도움이 된다며 러시아인들을 계속 유치하려고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무질서한 상거래와 품질 저하로 러시아 상인들의 불평이 높아가자 대책을 마련하는 데 골치를 앓고 있다. 부산시는 지난 4월 러시아 타운에 러시아인을 위한 전용 안내소를 설치하고 러시아어로 된 부산 관광 안내문 11만장을 배포했다. 또 상인들에게는 가격 정찰제를 실시하라고 요구했다.

 그러나 러시아 타운을 보는 부산시의 고민은, 이 거리가 이중적이라는 데 있다. 러시아 타운을 관리하는 부산시의 한 관계자는 “신발 산업 사양화로 몰락해가던 부산 경제가 러시아인들 때문에 되살아났다. 러시아 상인들은 달러 박스 그 자체다. 사실 법적으로는 규제해야 할 일도 많지만 그들이 한 해에 뿌리고 가는 돈이 천억원 대로 추산되어, 지역 경제를 생각하게 된다”라고 털어놓았다.

 예브게니 발코비치 주부산 러시아 영사의 표현에 따르면, 부산 러시아 타운은 러시아로 열린 ‘한국의 얼굴’이다. 최근 들어 러시아인들은 러시아 타운에 쏠렸던 그들의 활동 무대를 서서히 넓혀 싱가포르와 중국으로 발길을 돌리는 추세이다. 그만큼 일부 한국 상인과 상품에대한 불신이 커져가고 있다는 뜻이다. 동북아 국제 정세 변화를 상징하는 러시아 타운의 수준을 높이는 일은 이제 더 이상 부산 사람들의 몱만은 아닌 것 같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