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 한 뙈기’
  • 박순철(편집국장) ()
  • 승인 1994.08.1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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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공개념은, 좀더 정의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선택이었다. 법리적 의문 때문에 그것을 단죄해서는 안된다.”

경제학의 명명법에 따르면 공기는 자유재이다. 그 ‘자유’는 돈을 내지 않고도 얼마든지 쓸 수 있다는 뜻의 자유이다. 그것은 운수 사납게 밀폐된 공간에 갇힌 사람이 아니라면 얼마든지 마실 수 있는 양의 공기가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이 원초적 행운에 대해 감사하는 삶은 물론 아무도 없다. 공기의 독과점이 일어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유감스럽게도 땅은 자유재가 아니다. 그것은 경제재이다. 그 ‘경제’는 희소성을 반영한다. 희소성은 가격을 발생시킨다. 대가를 지불하지 않으면 얻을 수가 없다. 그러니까 땅을 소유한 사람도 있지만 땅이 없는 사람도 생겨난다. 문제는 땅이 공기 못지않게 인간의 생존을 본질적으로 규정하는 조건이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땅을 떠나서 살 수가 없다. 누구나 땅 위에서 태어나 그 위에서 먹고 자고 일한다. 죽어서는 땅에 묻힌다. 인간과 땅은 하나이다. 인간은 흙이고 땅인 것이다.

땅 투기 열병 끝에 얻어낸 토지공개념

 그러므로 ‘땅의 경제학’은 사실 경제학이 아니다. 땅 투기의 확실성은 땅이 바로 인간 조건이기 때문에 가능하다. 수요는 늘어도 공급은 늘 수 없다는 사정이 있는 한 땅값은 뒤고 또 뛸 것이라는 이치가 누구 눈에도 분명하다.

 이런 상황에서 땅 투기를 조세로 ‘처벌’하지 않는 한 이에 안 나서는 사람이 이상하다. 그동안 땅 투기 바람이 미친듯이 불 만도 했다. 그런데 땅값이 오른다고 사회적으로 무슨 부가가치가 생겨나는 건 아니다. 사회 전체로는 제로 섬 게임일 뿐이다. 피해자는 돈이 없어 땅 사기에 뛰어들지 못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면 빈익빈 부익부의 구조는 강화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땅 투기는 정의의 문제만은 아니다. 효율의 문제도 그에 못지 않게 심각하다. 효율은 시장경제의 가장 빛나는 프리마돈나이다. 하지만 국민 모두가 어느 곳의 땅을 사고 어떻게 세금을 덜내고 언제 다시 팔까에 몰두해 이리 뛰고 저리 뛰는데 경제가 제대로 될 리가 없다. 자원 배분이 왜곡되고, 물가는 치솟고, 일할 의욕은 떨어지고, 국제경쟁력은 약화되더라도 우선은 내 이웃과의 제로 섬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해진다.

 이 모두는 우리 사회가 ‘실제 상황’으로 경험한 것이었다. 토지 투기의 열병을 치르며 우리는 값 비싼 교육을 받았다. 그 깨달음의 구체적 산물이 토지공개념법들이었다. 토초세법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헌법재판소가 지난 주 토초세에 대해 내린 헌법 불합치 결정은 심오한 법리만이 문제는 아니다. 현재의 결정에는 땅 투기의 모든 고통, 그 해약의 모든 논리가 부담으로 실릴 수 밖에 없다. 이런 부담은 이 기회에 토초세의 악몽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은 모든 힘들 위에 마찬가지로 실리는 무거운 의문부호이기도 하다.

 법리는 숫자의 문제는 아닐 것이다. 그렇지만 지난해 토초세가 부과된 사람이 9만4천명으로 전국 토지소유자의 0.8%에 불과했다는 사실은 중요하다. 이 사실을 자연스럽게 서울 시민의 72%가 땅 한 평도 없고 전국 1천1백만 가구의 절반 가까이가 무주택자였다는 통계와 비교된다. 법은 9만여명의 사적 재산권을 의당 보호해야 한다. 그러면 땅 한 평 없는 사람들, 1천만명인지 2천만명인지 알 수 없지만, 그 많은 사람들은 누가 보호해야 하는가. 땅 투기의 노무나 명백한 소득이전 구조를 보면서, 또 어느 해인가는 땅 값 상승에 따른 불로소득이 1천만 봉급생활자가 한 해 내내 땀 흘려 번 돈의 2배가 되었다는 고통스런 경험을 겪고서, 땅 투기의 탐욕스런 망령을 다시 풀어놓아야 할 것인가.

온 우주의 모든 것에 ‘내 것’은 없다

 토지공개념은 우리 사회가 어렵게 도달한 합의였다. 그것은 우리가 좀더 생기 넘치는 경제, 좀더 정의로운 사회로 가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 거기에 대한 법리적 의문은 입법 당시 땅 투기의 생생한 고통에 의해 묻힐 수밖에 dqtdjT다. 이런 의문이 다시 살아날 수는 있지만, 그리고 헌재의 권위에 의해 확인될 수도 있지만, 그 결정이 토지공개념의 성급한 단죄에 이용되어서는 결코 안된다.

 왜냐하면 토지공개념은 우리 사회의 행복한 미래를 위한 불가결한 초석이기 때문이다. 개인은 마음껏 자유롭지만 그것이 공동체의 이익이라는 확고한 개념에 의해 지탱되려면 공동체의 밑뿌리인 땅은 마땅히 투기로부터 자유로워야 한다.

 그렇게 될 때, 인간 조건 그 자체인 땅이 탐욕으로부터 풀려날 때, 아동문학가 권정생이 노래하듯 땅은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될 수 있는 것이다. 비현식적이기에 아름다운 그 탈속에서 본래 당과 하나였던 인간의 타락한 모습은 이렇게 엄숙한 단죄 속에 조명된다.

 “사람들은 참 아무것도 모른다. 밭 한 뙈기 논 한 뙈기 그걸 모두 내 거라고 말한다. 이 세상 온 우주 모든 것이 한 사람의 내 것은 없다. 하나님도 내 거라고 하지 않으신다. 이 세상 모든 것은 모두의 것이다. 아기 종달새의 것도 되고 아기 까마귀의 것도 되고 다람쥐의 것도 되고 한 마라의 메뚜기의 것도 된다. 밭 한 뙈기 돌멩이 하나라도 그 건 내 것이 아니다. 온 세상 모두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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