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화와 칼’ 증오한 조센징의 참 벗
  • 조형균 (자유 기고가) ()
  • 승인 1994.08.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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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조선인 원폭 피해자’도운 오카 목사 영면

한국에게 8 . 15는 ‘광복의 날’로 다가오지만,  일본인에게는 히로시마 .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사건으로 각인되어 있다.

 전후 반세기 가까이 일본인은 ‘우리는 세계에서 유일한 피폭국이며 이렇게 비인도적 으로 당했다’고 되새기며 후손에게 끊임없이 주지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10만에 가까운 한국인 강제 징용 노동자들도 피폭자라는 사실은 애써 숨긴다. 배상 . 보상 요구가 두려워서이다.

 일본에는 한국인 피해자의 원혼을 달래는 추도비가 두 군데 세워져 있다. 히로시마 평화공원 건너편에 외로이 서 있는 ‘한국인 피폭자 추도비’는 가해자인 일본이 세운 탑이 아니라 재일거류민단 교포들이 경비를 모아 세운 것이다.

 그러나 나가사키 평화공원에 서 있는 ‘한국인 피폭자 추도비’는 같은 비석이지만 전혀 다르다. 79년 일본인 유지들이 80만엔을 거두어 사죄하는 뜻으로 세운 것이다. 이 일을 성사시킨 이가 바로 와카 마사하루(*正*) 목사이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원폭을 맞은 상처는 똑같다. 그런데 일본인의 상처는 아시아 침략의 죄과라고 하지만 한국인은 나라 빼앗기고 강제로 끌려와 매 맞고 허기진 배를 웅크리다 희생당한 것이다. 그러니 일본인이 저들에게 사죄하고 비석이라도 세워야 할 게 아닌가.”

 56년 도쿄에서 신학 공부를 마치고 목사가 되어 나가사키에 부임해온 이래 30여년간 오로지 한국인 수난의 역사를 도굴하고 이에 대한 배상과 보상을 일본 정부에 촉구하다 우익 청년들에게 수차례 테러를 당해온 오카 목사는, 7월22일 자정 지켜보는 이 없이 혼자 숨을 거두었다.

군 교관 시절 ‘전쟁 반대’ 하다 철창행

 1918년 오사카에서 태어난 그는 어려서 한국인 . 중국인 . 백계 러시아인 들과 함께 소학교 교육을 받았다. 31년 그가 중학에 진학 할 무렵부터 한국인에 대한 멸시가 가중되었다. ‘짱꼬로’와 함께 ‘조센징’은 당시 사회에서 중국인과 한국인을 멸시하는 말로 입버릇처럼 되어 있었으며, 오카 목사는 부친이 일본인의침략 근성을 개탄하는 소리를 들으며 성장했다. 그는 34년 해군에 입해 11년간 근무하다 종전을 맞았는데, 마지막 2년간은 해군사관학교 통신 교관이었다.

 45년8월6일 히로시마에 투하된 원폭의 버섯구름을 멀리서 바라본 그는 생도 수십 명을 숲속으로 데리고 가 외쳤다고 한다.“우리는 하나님을 배반한 이 전쟁을 그남두어야 한다!” 사관생도들은 그를 미친 놈으로 몰아붙였고, 그는 영창에 갇혔다. 그리고 며칠뒤 일왕이 방송으로 항복 . 패전을 선언하자 목사가 되야겠다고 결심했다. ‘일본이 망한 것은 가짜 신인 천황의 오도(誤導)로 참 하나님과 참 사랑을 몰랐기 때문이니 이들에게 참 하나님을 가르쳐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는 38년 19세 때 세례를 받고 기독교인이 된 몸이었다. 어머니의 감화도 컷다고 한다.

 그는 38세의 청년 목사로 취임한 나가사키는 히로시마 이어 두 번째로 원폭이 투하된 지역으로 조선인 노무자들이 엄청나게 희생된 곳이다. 그러나 누구도 그 일에 대해 말하지 않았다. 그는 중앙 정부 . 현 정부 . 시청 . 군청 등을 찾아다니며 당시의 참상을 취재했다. 그너나 그가 얻은 것은 일본이 조선인 피폭 실태를 전혀 조사하지 않았으며 앞으로도 절대 손대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뿐이였다.  그는 곧 동지 15명을 규합하여 온갖 힘을 다해 실태를 조사했다. 그리하여 82년 이후 12년동안 ≪원폭과 조선인≫이라는 방대한 자료집을 여섯 권 펴냈다.  그는 “강제 노역을 시킨 일본 정부와 미쓰이 . 미쓰비시 . 스미토모 등 하수인 기업에 배상 . 보상을 촉구하는 근거 자료를 마련하기 위해서 이 책을 펴냈다”라고 밝혔다.

 이들을 상대로 오카 목사와 ‘나가사키 조선인의 인권을 수호하는 모임’은 다음과 같은 요구를 관철하기 위해 힘을 쏟아 왔다. ?한국인 노무자들이 학대 . 학살 당한 사실을 너희가 직접 조사하라 ?사죄하라 ?보상하라 ?이상의 죄를 뉘우치고 현재의 재일 한국인 인권을 보장하라 ?두 번 다시 아시아 침략을 하지 않겠다고 서약하라.

 그는 이 조사를 마치기까지도 또 하나의 전쟁을 치렀다. 수많은 방해, 조소와 냉대, 전화 . 편지 협박은 물론 테러까지 당해야 했다. 그는 71∼83년 나가사키 시의회 의원일 때 정치인 자격으로 조사 . 보상을 따졌으며, 의회 회의 석상에서 우익 청년 3명에게 심한 구타를 당하기 하였다.

 패전 후 맥아더 사령부 지시로 일본 경찰 고등계가 복명한 보고서에는 일본 본토 네섬(훗카이드 . 혼슈 . 시코쿠 . 규슈)에만 무려 2백36만5천2백여명의 한국인이 강제 연행되어  노예 노동에 종사하였다고 되어 있다. 이 중 나가사키 현에 7만2천명, 나가사키 시에 3만∼3만2천 명의 한국인 노무자가 있었다. 오카 목사의 조사에 따르면, 나가사키에서는 한국인 노무자 2만명이 폭격당해 만명이 즉사하였다. 그럼 나머지 조선인의 해방은 어떻게 됐다는 말인가.

“내가 가장 증오하는 적은 천황”

그가 이같은 의문에서 출발한 것이 나가사키 현내 항만이나 섬 들에 대한 실태 조사이다. 그곳 섬은 모두가 지하 탄광 지역으로, 한국인 노무자들은 18시간 노동을 강요당하며 굶주림과 매질에 시달리다 죽어가다. 하지마 탄광만 해도 5백명의 한국인 노무자가 갇혀 있었는데 그 중 1백22명의백골이 발견되었다 (≪시사저널≫ 제143호 54 ∼62쪽 참조). 사망자 명단 등 탄광 노무자 자료를 오카 목사가 쓰레기장에서 발견한 것이다. 이들 명단에서 신원이 밝혀진 사람이 45명인데, 그 가운데 한 명이 전북산업대 이복렬 교수의 숙부 李*玉씨. 이씨는 19세 때 강제 징용으로 그 곳에 가서 고흔이 되었는데. 백골마저 아직인도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90년 KBS 텔레비전이 광복 45주년 프로 그램으로 오카 목사의 이야기를 방영하자 국내의 연고자들은 다투어 그에게 원조를 요청 했다. 오카 목사는 스미요시 지하 공장에서 폭격당한 유금수씨와 석임순씨 모자를 위해 늙은 몸을 이끌고 가두 모금을 하기도 했다. 그이 도움으로 이들은 일본에서 치료를 받고 피폭자 수첩을 교부다게 되었다. 그가 사망하기 전인 6월14일자로 필자에게 보내온 편지에는 ‘92년 이래 우리(나가사키 재일 조선인인권을 지키는 모임)가 계속해온 사가(佐*) 현 조선인 . 한국인 노무자(전시중)의 실태조사(강제 연행 . 강제 노동)를 금년 4월에 끝냈습니다. 6월18일에는 ≪원폭과 조선인≫ 제6집을 내게 되어 매일 기운이 솟고 있습니다. 8월 이후에는 무마모토 현, 가고시마 현에서도 이 일을 착수할 생각입니다.’

 92년 처음 내한하여 한신대학 신학대학원 강당에서 설교 첫마디에 “진작 와 뵙고 일본인이 한 일들을 사죄드리고 싶었지만, 외국으로 나가려면 내가 가장 증오하는 적인 천황가의 국화 무늬가 찍힌 여권을 신청해 받아 야 하므로 내키지 않았다”라고 했던 그의 말이 생각난다.
曺亨均 (자유 기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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