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거치며 상스러위지기 시작
  • 편집국 ()
  • 승인 1990.06.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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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년대엔 중진이 당 대변…金大中총재, 민주당 ‘입’맡아 정치적 도약

제1공화국 시절 집권 자유당의 대변인으로 趙凉 씨를 꼽는다면, 야당에선 단연코 민주당의  曺在千선전부장, 曺부장의 간결하면서도 논리정연한 논평은 지금도 높이 평가되고 있다. 1963년 민주당의 ‘입??으로 등장했던 金大中씨(현 평민당총재)도 간결한 논평으로 언론에 각광을 받으면서 정치인으로 탄탄히 자리잡아 갔다. 金씨는 당시 의원이 아니어서 설움을 많이 받았다.

 특히 李哲承의원과 사이가 좋지 않아 발표문 내용 때문에 손찌검을 당하는 경우까지 있었다. 당시만 해도 정당의 대변인이라는 직책은 공식적으로 없었고, 선전부장이 그런 기능을 맡았다. 선전부장은 국회부의장직에 임용될 만한 당내 유력한 중진이 맡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어 요즘처럼 초선의원들이 대변인을 맡는 것과는 사뭇 형편이 달랐다.

 제3공화국에 들어 초대 공화당 대변인으로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尹  씨가 취임했다. 그는 언론인이 정당 대변인으로 ‘변신??하는 길은 열였으나 당시 잇따른 창당의혹사건의 와중에서 단명에 그쳤다. 이어 외신특파원 출신인  徐仁錫 , 언론인 출신인 盧錫?  , 경향신문 논설위원 출신인 申泂植,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인 申東 , 민주당 신파 출신인 金在凉 (현 민자당의원), 공화당 기획부장 출신인 金昌 , 교육영화공사사장 출신인 申煥植, 교수 출신인 李海元, 율사 출신인 吳有邦 씨(현 민자당의원) 순이었다. 吳씨는 재임중 10?26를 맞아 공화당의 종말과 함께 대변인직도 내놓아야 했다.


80년대 야당 부침따라 대변인 양산돼

 양당에서 李忠煥, 宋元英,  汶植, 韓甲侏, 朴永 , 金泳三, 金守韓  , 李重戰씨 등이 공화당과 맞선 신랄한 ‘입??이었다. 이 중 정치급류가 굽이치는 고비 때 여야 대변인의 맞수를 살펴보면 3선개헌 당시의 김수한, 유신선포 때의 신형식과 김창근과 김수한, 10?26 때의 오유방과 鄭在原씨 등이다. 특히 김수한씨의 ??입??은 재빠르고 매워서 대치정국 때 ??말씨름판??의 선발선수롤 뽑혀 언론에 자주 등장했으나, 한편에선 ??신경질적인?? 대응으로 대변인의 품위를 지키지 못했다는 평도 받았다. 그 시절 유정희 대변인으로는 조선일보 편집부국장 출신인 李錫植 , 경향신문 정치부장 출신인 鄭在 씨가 있다. 두 대변인은 朴正熙대통령을 향해 공화당 대변인과 벌인 ??충성경쟁??으로 유명하다.

 얼어붙은‘80년의 봄??에 이어 출범한 민정당의 첫 대변인은 동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인 朴敬 씨. 이어 텔레비전 뉴스앵커 출신인 奉斗玩 , 조선일보 편집국장 출신인 金瑢泰(현 민자당의원), 한국일보 편집국장 출신의  ?明 (현 민자당의원), 서울신문논설위원 출신인 李  씨(현 민자당의원)가 차례로 민정당의 ??입??이 되었다. 13대국회 들어 ??약한 여당??의 ??작은 입??을 사상계 편집장 출신인 金重 (현 민자당의원), 검사 출신인 朴 太(현 민자당의원),가 맡았으나 朴씨는 3당합당 이후 유임돼 ??큰 입??이 됐다.

 80년대에는 야당의 부침이 심한 데다가 김대중·김영삼씨의 당권경쟁, 그리고 金種泌씨의 등장이 겹쳐 야당의 ‘입??은 양산되었고, 이들의 ??말??도 그만큼 거칠어졌다. 민한당은 동아일보 조사부장 출신인 金元基(현 평민당의원), 경향신문 논설위원 출신인 金  , 판사출신인   相씨 순이었다. 국민당 대변인은 신아일보 편집부국장 출신인 金種河, 약사회부회장 출신인 金 泰씨(현 민자당의원) 등이었다. 85년 2?12총선을 앞두고 창당된 신민당 대변인은 한국일보 해직기자 출신인 朴實씨와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洪恩德씨. 洪씨는 李海雨총재 시절 대변인을 맡으면서 李총재의 ??구상??을 앞질러가 두 김씨로부터 눈총을 받았고, 13대총선에 무소속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3대 들어 평민당 대변인은 인권변호사 출신인 李相侏씨(현 평민당의원)와 현 대변인인 金 植씨이며, 민주당은 조선일보 기자 출신인  淸源(현 민자당의원), 변호사 출신인 李仁濟(현 민자당의원), 경남신문 기자 출신인 姜三 씨(현 민자당의원) 순이다.

 13대에는 이상수씨가 평민당대변인로 등장한 것을 시작으로 여야 대변인에 율사출신들이 기용됐다. 이런 경향은 5공청산 악법개폐 등 전문적 법률지식을 갖춘 논리적인 논평이 요구되는 시대적 필요에서 비롯된 듯하다.

 공화당 대변인은 신아일보 정치부장 출신인 金文元씨(현 민자당의원)와 舊공화당 공채1기 출신인 조용직씨가 맡았다.

 재야 대변인은 5공시절 민추협의 경우 중앙일보 기자 출신인 李協(현 평민당의원), 韓光玉(현 평민당의원),    씨 등이었다. 이들은 국내언론에 한줄도 보도되지 않는데도 줄기차게 全斗煥정권을 향해 가시돋친 논평을 했다. 6공 이후 전민련과 진보정당모임 대변인을 朴 東씨가 맡아 고군분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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