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공화국은 국민적 합의 얻었나?
  • 편집국 ()
  • 승인 1990.07.01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단 한번의 내각제’둘러싼 논란, 오늘의 개헌논의와 무관치 않아

한국정치사에서 내각책임제의 경험은 짧다. 1960년 4ㆍ19혁명 이후 7ㆍ29총선, 8ㆍ18총리인준, 8ㆍ23내각구성으로 출범된 將勉정부가 이듬해 5ㆍ16군사혁명으로 무너지기까지 8개월여가 고작이다.

 이처럼 짧고도 유일했던 경험을 평가하는 데에 지금도 논란은 여전하다. 당시 개헌은 국민적 합의를 바탕으로 이루어진 것이었던가, 아니면 제헌 때부터 내각책임제를 당론으로 표방해온 민주당과‘살아남기 위한 탈출구’를 찾던 자유당이 영합해서 이룬 것인가?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전 4ㆍ19주체 학생세력 일부에서 나온 국회해산 주장과 장면씨 휘하의 민주당 신파 일각에서 제기한 개헌반대운동은 국민의 지지를 받았던가? 이런 논란은 오늘날 제기되고 있는 개헌논의에서도 결코 지나쳐서는 안될 요소로 보인다.

 당시 개헌의 국민적 합의성 여부에 대한 첫 의문은 4ㆍ19혁명이 있기 2년 전인 58년 여름 자유당 일부 중진과 민주당 구파 중진들이 수안보온천에서 은밀히 만나 내각제개헌을 논의 했다는‘설’에서 비롯된다. 장면총리 비설실장을 지낸 바 있는 安元英 전의원의 체험 저서《제2공화국》에는“당시 85살인 이승만대통령이 갑자기 죽을 경우 민주당 신파 지도자인 장면부통령이 권력을 승계토록 되어 있어, 이를 우려한 자유당 일각에서 민주당 구파와 손을 잡고 개헌을 추진했다. 이를 반영이라도 한 듯 4월26일 이대통령의 하야성명이 있던 그날 하오 열린 국회에서 여야는 만장일치로 개헌안을 의결했다”라고 쓰여 있다.

 이에 대해 당시 국회개헌안기초위원장을 맡았던 鄭憲柱 전의원은“나는 그 자리에 없었지만 여야 몇몇 의원이 만난 것은 사실인 것으로 알고 있다”고 회고한 뒤“그들은 당시 경색된 정국을 풀어보자고 모였을 뿐”이라고 밝혔다. 그는“자유당쪽 참석자들은 이 대통령의 왕당파가 아닌 온건파들이었고, 민주당에선 구파인 兪鎭午 金義澤 染一東의원 등이었던 걸로 알고 있다”며“흥정 운운은 그분들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분들이 그후‘흥정의 대가’를 받은 것이 없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국민적 합의 여부에 대해 이를 객관적으로 판단할 구체적인 근거는 없다. 당시의 개헌 방식이 요즘처럼 국민투표에 의한 것이 아니라 국회에서의 간접투표로 처리된 데다 여론조사도 실시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鄭전의원은 당시 국민적 합의가 이루어져 있었다고 확신하면서도“여론이라야 신문의 보도가 고작인 때여서 다른 수단으로 민의를 가늠할 수 없었다”고 말했다.

 그럼에도 개헌안이 표결에 부쳐지기 전, 일부 학생세력 사이에서 국회해산 주장이 나왔고, 민주당 신파에서도 대통령중심제 고수론이 대두된 사실들을 미뤄보면 정치권 안팎에서 반대론이 있었음은 분명하다. 더욱이 자유당 일각에서 대통령중심제가 유지될 경우 있을지도 모를 정치적 보복으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주도록 보장책을 요구했던 것(李基澤《한국야당사》)을 볼 때 개헌반대론도 예사로운 것만은 아니었던 듯하다.

 이에 대한 반론도 있다. 일부 학생들의 국회해산 주장은 許政내각이 5월6일 국회취임연설에서 4ㆍ19혁명을‘사태’라고 비하하는 등 학생들의 비위를 거슬려 과도정부와 국회 자체를 불신하면서 나온 불만으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신파 일각의 대통령중심제 유지론은 장면의 집권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주장이다.

 아무튼 기구했던 내각책임제의 짧은 경험은 시작부터 논란의 소지를 안고 출발했던 셈이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