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정책 新主流 盧在鳳 라인
  • 조용준 기자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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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哲彦의원 장관직 사퇴후 부상…정치학자, 경기고 출신의 브레인群

샌프란시스코 정상회담 성사시키며 6공의 주요정책 수행 주도권 장악

 盧泰愚대통령과 고르바초프와의 정상회담이 진행중이던 지난 4일, 샌프란시스코 페어몬트호텔에서는 예사롭지 않은‘작은’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李秀正대통령공보수석이 아닌 玄鴻柱 駐유엔대사에게 서방의 언론사 기자들이 모여들어 한ㆍ소정상회담에 관한 한국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을 코멘트해 다라고 요구하고 나선 것이다. 玄대사는 시종 자신감 넘친 얼굴로 세계 유수의 외신기자들에게 명쾌한 브리핑을 했다.

 이‘작은’일은 영어에 능통한 玄대사가 대통령 대변인의 역할을 잠시 빌린, 편의 차원으로 가볍게 넘길 수도 있지만 외교 상식과 대통령 권위를 생각한다면 결코 소홀히 취급 할 수 없는 중대한 사안이다. 청와대 외교의전으로 따져볼 때 대통령공보수석의 입장과 玄대사의 월권, 나아가서는 청와대비서실의 위상까지도 문제가 될 수 있는 일이다.

새로운 북방밀사는 현홍주대사?

그렇다면 玄대사의 위상은 과연 어느 정도 인가.

현홍주씨가 법제처장에서 유엔대사로 자리를 옮긴 것은 지난 4월17일. 당시 국내언론은 민자당 金泳三최고위원과 朴哲彦정무장관사이의‘전면전’보도로 정신이 없던 탓인지 그의 대사 임명 소식과 약력 소개를 1단 기사로 간략히 처리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민자당의 내분사태로 정국이 들끓던 당시 상황에서 유엔대사를 교체할 객관적 정황이 없었는데도 전격적으로 발령이 났다는 점과 그것이 朴장관의 사표제출(13일)로부터 꼭 나흘후에 이뤄졌다는 점을 주의깊게 살펴보면 玄씨의 유엔대사 임명에는 상당한 무게가 실려 있음을 알 수 있다.

 소련대표부가 설치돼 있는 유엔본부야말로 국내외 언론의 민감한 촉각을 피해 對蘇 접촉을 할 수 있는 최상의 장소라 할 수 있다. 玄대사는 이미《시사저널》이 보도(34호ㆍ6월24일자)한 대로 4월 중순을 전후로 부임지인 뉴욕에는 정작 모습을 비치지 않은 채 엉뚱하게 모스크바에 얼굴을 나타낸다.

 한·소 정상회담이 열린다는 소식이 보도 되면서 국내 언론은 과연 누가 막후 밀사 역할을 담당했느냐하는 문제와 관련, 박철언의원을 지목했었다. 장관직 사퇴후 외유길에 오른 그의 행적이 불분명했다는 점과 일본 도쿄에서 소련 KGB측과 접촉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어우러져 만들어진 추측이었다. 그러나 당시 박의원은 북방정책의 일선에서는 이미 손을 놓고 있었다.

 청와대는 玄대사가 북방정책의‘새로운 밀사’역할을 담당한 것인지에 대해 명확한 답변을 피하고 있다. 그러나 여권의 정통한 한 소식통은 간접적으로 이렇게 말한다.“박철언전정무장관과 현홍주 신임유엔대사는 대통령이 가장 신임하는 두명이다.”

 玄대사와 박의원은 공통점이 많다. 6공의 실세라는 점도 그렇고 둘다 서울 법대를 나와 5공시절 안기부를 거친 공안검사 출신이라는 점도 동일하다. 분명한 차이를 들면 玄대사가 경기고 출신인데 반해 박의원은 경북고 출신이라는 점이다. 이를테면 6공 들어 SK(서울 경기)와 TK(대구 경북)를 대표하는 노대통령 핵심 브레인이라는 사실이다.

 그러나 玄대사는 6공 출범 이후 박의원의 독주에 계속 밀렸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다. 12대 전국구로 민정당에 합류한 뒤 노태우후보의 선거대책부본부장으로서, 취임준비위멤버로서 권력이양 작업에 상당한 몫을 담당했던 玄씨가 비교적 한직은 법체처장에 앉았던 것도 박의원이 중심이 된 신주류의 견제에 의한 것으로 알려진다. 李鍾贊의원이 경기고 후배라는 점과 안기부에서 같이 근무했던 경력 때문에 6공 신주류와 대립관계에 있던 이종찬계로 분류되 더욱 견제를 받기도 했다. 청와대의 한 관계자는 玄대사와 박위원의 경쟁이야말로 단순한 경쟁관계 이상의‘앙숙’으로 봐야 할 것이라고 귀띔한다.

 한가지 특기할 만한 사실은 玄씨가 법제처장으로 있으면서도 법제처와는 무관한 외교관계 일에 나름대로 계속 관여했고, 청와대에서도 이를 어느정도 묵인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노대통령이 취임 직후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 당시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졌을 때에도 기자회견 예상 질문답변서를 전담부서인 청와대 공보비서실팀에서 미처 준비하기도 전에 玄씨가 이를 단 두시간만에 직접 작성, 공보실을 아연 긴장케 했다는 일화도 있다.

 대통령 선거 당시 노태우후보가 외신기자들과 회견을 가질 때마다 단골통역으로 나섰던 玄씨는 국제 홍보 및 선전 업무를 도맡았기 때문에 선거후에도 국내에서 정치적 사건이 벌어질 때마다 외신기자들이 가장 즐겨 찾는 인물로 통했다. 6ㆍ29직전 민정당이 은밀히 내각제 개헌을 추진하던 당시에도 玄씨는 외신기자들에게 내각제 개헌의 당위성을 설득력있게 브리핑, 내각제 개헌 쪽으로 기우는 기사를 쓰도록 유도했다고 전해진다. 당시 노태우 민정당대표위원은 이런 그를 “외무장관감”이라고 극찬한 바도 있다.

 정가에서는 玄씨의 유엔대사 임명을 이제 비로소‘제 날개를 얻은 격’으로 해석하고 있다. 그의 왕성한 유엔대사직 임무수행을 두고 뉴욕이 6공 최대의 과업인 북방정책의 전초기지로 다져지고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그러나 이는 玄대사 개인의 성취가 아니라 청와대 내SK그룹의 공동 성취로 봐야 한다는 것이 청와대 주변에서 흘러나온 평가이다. TK와 박의원의 독주에 밀려 오랫동안 그늘에 가려 있던 SK가 이제 비로소 표면에 떠올랐다는 분석이다. 사실 최근 청와대내 SK그룹의 부각은 주목할 만하다.

 청와대 SK그룹은 수면 위의 빙산처럼 외양상으로는 크게 떠오르지는 않는다. 그리고 그시기면에서도 5공시절부터 6공에 이르기까지 완만한 부상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金宗輝 외교안보보좌관, ??明 주소영사처장, 玄대사, 閔炳錫 외교안보비서관 등 4명의 경기고 선후배들이 이번 韓蘇정상회담을 성사시키면서 그 모습을 완연히 드러낸 것이다.

 이들의 팀장격인 盧在鳳 대통령비서실장(마산고 출신)과 노대통령의 인연은 대통령선거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 무렵 노대통령은 한국정치학계의 원로라고 할 수 있는 李用熙 전통일원장관을 찾아가 자문을 구하곤 했는데, 그 과정에서 李씨의 대학제자인 노비서실장의 인연이 시작됐다.

 그뒤 노비서실장은 6공정군의 통치이념을 정립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특별보좌관에 기용되면서 장차 비서실장 임명이 약속되었다고 전해진다. 이런 노실장 주변에 비록 현실정치의 경험은 없으나 이론적으로 탄탄한 기초를 가진 학자들이 결집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이런 정황대로 노비서실장,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 金學俊 사회담당보좌역, 민병석외교안보비서관(국제안보담당) 등으로 이어지는 석.박사출신들과 현홍주대사를 잇는 경기고 라인은 이번 한ㆍ소 정상회담의 모든 실무를 담당, 청와대 핵심 브레인으로서의 그 잠재력을 과시했다. 이는 그동안 말도 많았던 북방정책팀이 청와대의 정치학 박사들에게 완전히 넘어간 것을 의미한다.


경기고 라인 煎장관이 ‘방북설’흘려

 특히 한ㆍ소 정상회담이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일본에 급파됐던 김종휘 외교안보보좌관은 내각제 개헌 구도와 관련, 여야간에 논란을 낳고 있는 국방총장제 신설 등 군구조개편안의 제안자로 알려졌다. 金보좌관은 미국 베이츠 대학에서 수학후 65년부터 국방대학원 교수, 안보문제연구소 소장, 한국국제정치학회 회장 등을 역임한 안보문제의 권위자이다. 김보좌관은 한ㆍ소관계 정상화에 따른 후속조치를 효율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3개 특별대책반중에서 북방정책, 남북관계 2개대책반의 반장을 맡았다.

 흘러간 일이 되고 말았지만 朴澯鍾의원이 문제를 제기했던 박철언의원의‘방북설’로 정가가 온통 시끄러웠던 적이 있다. 박의원의‘평양축전 관람설’은 文益煥목사와 林秀卿양의 잇따른 방북으로 한참 공안정국이 진행중이던 당시로서는 사실 여부에 따라서 공안정국의 정당성과 6공 정부의 도덕성에 결정적인 손상을 입힐 수 있는 미묘한 사안이있다.

 박의원의 방북 사실 여부도 중요했지만 과연 누가 이‘사실’을 흘렸는가는 당시 초미의 관심사였다. 정가의 공통적인 견해는 박의원의 북방 밀사외교에 제동을 걸고 정치적 입지를 약화시킬 의도에서‘방북설’이 흘러나왔다는 것이었다. 박찬종위원은 결정적 단서 제공자의 신원을 밝히지 않았고 언론도 겉으로는 이를 확인하지 않은 채 그냥 흐지부지 넘겨 버렸다. 그러나 그때 《시사저널》에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당시 내각의 모장관이 박장관의 방북설을 흘려준 것으로 돼 있다. 그 장관이 현 청와대의 핵심 브레인을 형성하고 있는 경기고 라인이면서 또한 학맥도 같이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어낸 사람은 흔치 않을 것이다.

 박철언장관의 방북설이 제기된 지 채 1년의 세월도 흐르지 않은 지금, 청와대는 응달과 양달이 서로 뒤바뀌었다는 느낌을 전해주고 있다. 바로 이것이 한국 정치의 주도권을 형성하고 있는 TK와 SK의 현주소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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