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BS 찬바람에 휩쓸려간 “바른소리”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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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시장》의 작가 金洪信씨,‘경찰의 노조원 폭행’멘트로 출연금지 조치 당해

사태 발생 2개월을 넘기고 있는 KBS는 지금‘유사 계엄상태’에 있다. 유신시절 개헌의‘개’자만 꺼내도 잡혀들어가던, 그 찬바람 이는 긴급조치 비슷한 것을 연상케 하는 분위기가 있다. 중무장한 병력이 상주는 안할지언정 조그만 꿈틀거림이나마 상황이 일어나는 즉시 자동으로 투입되고 있고 무전기를 든 사복경찰이 방송국 곳곳을 배회하고 있다. 방송정상화 이후 일반 프로그램에서는 KBS사태에 대한 어떤 종류의 언급도 허용되지 않고 있다.

 KBS 제2라디오의 <정다운 가곡>을 맡고 있는 박인규 프로듀서는 지난달 제작복귀 후 처음 내보낸 방송의‘오프닝 멘트’에서 KBS사태를 얘기했다는 이유로 제작권을 한때 박탈당했다가 복귀한바 있다. 이 멘트의 내용은 대강“사태로 한달여 동안 방송을 못해 드린 점 죄송하다. 좋은 방송을 위한 노력으로 이해해주시면 고맙겠다”는 내용이었다. 다른 한명의 라디로 프로듀서도 같은 경우로 제작권을 일시 뺏긴 적이 있다.

 ‘계엄’의 찬바람은 사원들에게만 부는 것이 아니었다. 하고 싶은 말을 참지 못한‘탤런트 소설가’에게도 이 바람은 어김없이 불어와 왜소한 그의 몸을 큰 힘 안들이고 방송국 밖으로 날려보냈다. 《인간시장》의 작가 金洪信씨. 올해 나이 43세인 그는 이제 본업인“소설이나 쓰는 데 전념해야”하게 됐다.

 상업주의 소설가 또는 르뽀작가로 알려진 김씨는 비판적 의견을 적극적으로 표현하는 축에 드는 사람으로 문단에서 통하고 있다. 세속적 인기 탓에 지난 82년 이후 텔레비전과 라디오에 특A 대우를 받으며 출연해온 그는 올해 4월 봄철프로 개편 때 KBS 라디오 서울의 <라디오 매거진>이란 프로그램의 MC를 맡았다. 담당 프로듀서의 말로는 고사 끝에 어렵게 이루어진 계약이었다고 한다.

 저녁 7시20분부터 9시까지 방송되는 이 프로그램은 생활·교통·날씨 등의 정보를 노래와 함께 전하는 내용으로 꾸며져 있으며‘김홍신의 세상만평’이란 코너도 포함돼 있다. 진행자 김씨는 자신의 차를 몰고 다니며 발견한 교통법규 위반차량의 번호를 적어 방송에 그대로 내보내는 등‘소년 같은 정의감’을 발휘하며 이 프로그램에 재미를 붙여왔다. 그러나 방송 3일만에‘사태’가 일어나 출근할 필요가 없어졌는데 이것이 김씨에게는 KBS에 보다 적극 ‘개입’하게 만든 계기가 됐다.

 다름아닌‘KBS지키기시민회의’란 모임을 김씨가 이때 주도한 것이다.“KBS를 걱정하는 시민들의 모임이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시작한 이 운동에는 박홍 서강대총장, 한상진 서울대교수, 박인제 변호사 등 각계 12명이 준비위원으로 참여했으며 문인은 김씨 외에 김규동시인이 뜻을 함께 했다. 김씨가 간사인 이 모임은 사태진행 과정에서‘서기원사장의 선퇴진’을 줄곧 주장해 왔다.

“언론 제자리 지키기는 국민을 지키는 것”

 김홍신씨는 5ㆍ18정상화 후 다시 마이크를 잡은‘세상만평’코너에서“언론이 제자리를 지킨다는 것은 결국 국민을 지키는 것이다. 일반국민이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이것이 언론을 통해 여론화되지 않으면 아무런 의미가 없는데 여기에 언론이 건강하게 존재해야만 하는 이유가 있다. 행여 KBS사태가 고위 정치인사들의 국민들을 우습게 아는 시건방진 행동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길 바란다”고 말했다. 그후로도 2~3일에 한번씩은 빗대어서라도 관련문제를 건드리고 지나갔다.

 김씨는 언론에 대한 이같은 소신이“지난날 소설을 쓰면서, 또 출판업을 하면서 겪었던 고통들로부터 절감하게 된 것”이라고 했다 그는 80년 계엄하에 콩트집 《도둑놈과 도둑님》관련으로 모처에 잡혀가 혼이 난 적이 있으며 현장고발소설 《인간시장》을 낸 이후로는 각계로부터 가족납치 위협 등 협박에 시달린 경험을 갖고 있다. KBS사태 언급 절대금지가 요구되는 상황에서 김씨에게 회사측으로부터 경고가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지난 6월12일 저녁 6시30분경, 방송을 하러 들어오던 김씨는 드디어 KBS를 떠나게 될 사건과 맞닥뜨렸다. 구속자석방ㆍ경찰력철수 등을 요구하며 철야농성에 들어가는 노조집행부의 출정식이 경찰의 저지로 엉망이 되고 있는 순간을 지켜보게 된 것이다. 김씨를 흥분시킨 것은 경찰 방패에 찍히고 군홧발에 짓밟힌 노조원들의 비명과 그들의 얼굴에 범벅이 된 피. 상기된 얼굴로 스튜디오에 들어선 김씨는 프로그램작가가 써준 월드컵 얘기를 읽다말고 그 말을 결국 꺼내고야 말았다.

 “…저는 본대로 사실대로 말하라고 배웠습니다.…오늘 오는 길에 아직도 KBS에 파견 돼 있는 경찰병력과 KBS 직원들 사이의 몸싸움 현장을 보게 됐습니다.…프로듀서 한사람이 피투성이가 됐고 어떤 이는 허리를 다쳤으며 여직원 한명은 또 발밑에 깔려 비명을 지르고 있었습니다.…참 안타깝고 우울한 일입니다.…만약 이 방송을 했다고 내일부터 그만두라면 그만두겠습니다. 담당 프로듀서에게도 어떤 불이익이 생길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된다면 여러분과 저는 대한민국이 민주국가인지를 다시 생각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다음날 아침 서기원사장 주재로 열린 간부회의는 김홍신씨에 대해 출연금지 조치를 결정했다. 담당프로듀서는 김씨에게 이 사실을 따로 통보할 필요가 없었다. 예상하고 있던 그가 먼저 전화를 걸어왔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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