不感의 韓銀, 제몫찾기 여전히 숙제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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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립 40주년-‘독립성’바탕, 중앙은행 제 역할 확고히 다져야

‘제도가 미비해도 운영의 묘를 살리면 된다??는 논리가 있다. 통화신용정책을 둘러싼 재무부와 한국은행의 마찰에서 흔히 동원되는 논리이다. 그러나 그 허구성은 되풀이되어 확인되고 있다. 지난 82년 6월28일에 있었던 대출금리 인하조치의 경우도 그렇다. 재무부는 시중은행의 대출금리를 14%에서 10%로 내리려고 하면서 금융통화운영위원회에 추인을 요구해왔다. 이미 결정된 사항이지만 요식행위의 하나로 금통위의 고무도장이 필요해서였다. 한은총재가 그같은 폭탄조치는 할 수 없다고 버티자 재무장관은 직접 금통위에 나가 제안설명을 하고 이를 통과시켜버렸다. 84년 양도성예금증서(장당 액면가격 1억원) 도입시에도 마찬가지였다. 금통위는??금리수준이 일반서민이 이용하는 보통예금이나 정기예금보다 높다??고 반대의견을 표시, 도입을 보류했으나 재무부 지시로 즉시 원안대로 통과돼버렸다.

 이는 많은 사례 가운데 일부일 뿐이다. 한은 직원들이“설사 제도로 명문화돼 있을지라도 되지 않는 판국에 운영의 묘 강조는 예속화를 더욱 가속화시키는 것??이라고 분통을 터뜨리는 것도 최고 의결기관인 금통위를??통과위??로 전락시킨 재무부의 독단을 염두에 둔 것이었다.

 지난 12월 우리나라의 중앙은행인 한국은행은 창립 40주년을 맞았다. 신관벽에는‘경축 40주년??이란 대형 플래카드가 바람에 나부끼고 있었으나 축제분위기만은 아니었다. 한은은 ??不感의 장년??을 맞았지만 중앙은행으로서의 위상찾기는 제자리걸음이기 때문이다. 6ㆍ29선언 이후 계속 맴돌기만하던 한국은행법 개정 논의는 지난해 11월 장기과제로 유보하자는 금통위 답신을 양측이 받아들여 일단락됐다. 중립성 확보라는 최대의 과제는??미완성교향곡??이 된 셈이다. 한은과 학계에서는 차제의 한은법개정을 비롯, 중앙은행의 제 역할을 확고히 규정하자는 논의를 다시금 진전시키고 있어 주목된다.

 한국은행의 40년사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었다고 표현할 수 있다. 결과만을 놓고 볼 때 한은은 이 책무를 게을리한 데 대해 호된 질책을 받아 마땅하지만, 한은을 일방적으로 매도하기에 앞서 짚고 넘어가야 할 사정도 있다. 고려대 李弼商교수(경제학)는“한은이 중앙은행으로서 제 역할을 못해낸 것은 정부와 정치권의 간섭과 규제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성장을 지원하기 위해 불가피하다는 그럴싸한 구실로 풀려나가지 말아야 했을 돈이 엄청나게 풀려나갔고 이제 중앙은행의 권한은 빈 껍데기에 불과했다는 것이다.

 전경련 부설 한국경제연구원 閔丙均연구위원도“급하게 추진된 경제 성장정책을 지원하는 성격이 강했던 탓에 한국은행의 중앙은행으로서의 목소리를 죽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제 금융산업도 시장기능에 의해 운용됨이 바람직하다고 볼 때 금융은 민간에 돌려지는 것이 타당하다. 금융산업의 효율성을 도모하기 위해 중앙은행에 독립성을 부여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많은 문제들은 관치금융에서 그 원인을 찾을 수 있다는 것이 학계의 공통된 견해이다. 바탕색으로 칠해진 것이 극심한 인플레이션이었고 소수 재벌로의‘정책금융 몰아주기’는 경제력집중과 산업구조의 왜곡을 가져왔다. 한국은행의 실증분석에 의해서도 이는 입증되고 있다. 지난 30년간 총 금융기관 대출금 중 정책금융이 차지하는 비율은 적게는 25%에서 심지어 80% 사이를 오간 것으로 나타나 있다. 이 비율이 낮을 때는 물가가 안정돼 있었고 높을 때에는 물가상승률이 엄청났던 것이다. 정부와 재벌의 틈새에서 신음해온 것은 한국은행을 비롯한 은행들이었다. 시장논리로 놔두었다면 은행 두어개는 문을 닫아야 정상이었다. 그래서 고육지책으로 나온 것인 韓銀特融이었다는 것을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안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피해자는 국민이었다. 은행돈은 국민의 것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그 결과‘가진자??와??가지지 못한 자??의 경계선이 뚜렷해져 빈부격차는 더욱 심화됐다.??박영복사건??을 필두로 李ㆍ張사건??등 대형 금융부조리가 판을 친 것도 관치금융의 형태로 나타난 정경유착의 결과였다. 최근 비판의 표적이 된 재벌들의 땅투기도 정부가 돈줄을 쥐고 있던 데서 가능했다.

 한국은행의 중립성은 5ㆍ16군사정부가 밀어붙인 제1차 한은법 개정(62년 5월)을 계기로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미국 연방준비위원회법에 바탕을 둔 본래의 법은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확고히 보장해주는 것이었다. 1차개정 후 失權회복을 위한 한은의 노력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고개를 들었으나 성과는 없었다.


운영민주화 등 스스로의 변신 노력도 필요

 경제성장을 뒷받침하고 통화가치의 안정을 도모한다는 목표아래 출범한 한국은행은 그동안 우리가 겪어냈던 정치ㆍ사회적 격변만큼이나 숱한 풍상의 길을 걸어왔다. 창립된 지 2주일만에 6ㆍ25동란을 맞아 전비조달과 전시인플레 수습에 나서야 했고 경제개발이 추진되기 시작한 60년대 이후엔 개발자금 마련과 배분에 동원됐다. 또 70년대엔 성장에 따른 인플레 수습에, 80년대 후반에 국제수지 흑자관리에 매달려야만 했다. 정부가 차려놓은 밥상의‘설거지??에 때로는??악역??을 강요당하기 일쑤였다. 40년이 지난 지금 초대 한은 총재였던 具鎔書씨(작고)가 창업사에서 한 말은 그대로 살아남아 있다.??중앙은행은 정부기관임은 틀림없으나 거대한 정치적 압력에서 초연할 수 있는 독립성이 보장되어야 한다.??

 한국은행이 중앙은행으로서의 제목소리를 내지 못한 이유가 한은 내부에도 있었다는 점 또한 간과할 수는 없다.

 서울시립대 李根植교수는“한은의 중립성은 반드시 보장돼야 하나 한은도 운영을 민주화해야 한다. 금융전반에 대한 자료공개, 금통위 운영상황 공개 등 구태를 벗기 위한 변신을 시도해야 한다??고 침을 놓는다. 쌍용경제연구소 오동휘소장도??한은의 중립성보장은 금융국제화, 금융산업 경쟁력 제고를 위한 바탕이 된다. 그러나 한은도 기계적 독립을 계속 주장해서는 안돼며 독불장군이 되어서는 더구나 안된다??라고 주문한다.

 통화신용정책은 보수성과 중립성을 생명으로 한다. 팽창지향적이고 인기에 영합하기 쉬운 정부가 관장하기에는 기본성향부터 맞지 않는다. 또 운영의 묘’를 강조하고 있으나 이는 양측이 대등한 관계일 때야 가능한 것이다. 金建총재가 기념식사에서 제시한??물가안정과 금융기능의 정상화??라는 비전은 독립성이 부여될 때 가능한 것이다. 인류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발명품은 불ㆍ바퀴ㆍ중앙은행이라는 말이 있다. 창립 40주년, 우리도 제대로 기능하는 중앙은행을 가져야 한다는 당위성에서??한은의 몫은 한은에??돌려져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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