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부군》의 저자 李 泰씨
  • 이성남 문화부차장대우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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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돼야 원혼 잠든다"

6ㆍ25전쟁중 지리산 골짜기에서 병들어 신음하던 한 젊은 빨치산은 그에게 당부했다.“대장동무는 꼭 살아서 돌아가 주세요. 그리고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어간 우리들 삶을 기록해주세요??라고. 52년3월, 남부군 전체 대원 6백50여명에 거개가 처참하게 몰살당하는 가운데 토벌군에게 체포된 그는??살아남았다.??그로부터 前歷을 숨기며 살아온 40여년 세월.

 88년 7월, 그가 굳이‘패자의 기록??이라는 단서를 달아 기록한《남부군》이 출간되었고 충격적인 화제를 낳는 가운데 40여만부 이상 팔려나갔다. 90년 6월, 정지영감독에 의해 영화화된《남부군》은 개봉된 지 보름만에 전국 15개 극장에서 40만명의 기록적인 관객을 동원하여 극장가의 불길을 당기고 있다. 무엇이《남부군》에 대한 폭발적인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을까?

 그가 밝혔듯이 지나치게 왜곡되어 전해온‘흉악무도??한 빨치산에게 인간의 따뜻한 숨결을 불어넣어주었기 때문일까? 혹은 오랫동안 반공 이데올로기에 길들여진 젊은 세대에게 역사 교과서에서 알 수 없었던 금단의 세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했기 때문일까? 물론 이런 것도 하나의 원인일 수 있겠지만 정작 더 큰 관심은 한 인간의 행적에 모아지고 있다. 해방정국에서 비판의식이 강한 한 지식인은 왜 빨치산이 되었으며 그는 그 안에서 무엇을 보았는가? 바로 이 명제야말로 세대간ㆍ계층간의 첨예한 이념대립으로 몸살을 앓고 있는 오늘의 세대들에게 가장 큰 관심사이기 때문이다.

●배우 안성기가 젊은 날의 자신을 열연하고 있는 영화《남부군》을 보면서 눈물을 많이 흘리셨다는데 어떤 장면에서 우셨습니까?

 하동군 악양전투에서 소련전사를 안락사시키는 장면이었습니다. 폭격을 맞아“엄마??를 부며 신음중인 소년전사를??이제 네 할 일 다 했으니 엄마한테 가라??고 총을 쏘던 모습이 눈에 선했습니다. 영화에서는 여자대원(이혜영 역)이 실행했지만 실제로는 남자대원이 총을 쏘았습니다. 간호병 박민자(최진실 역)와 헤어지는 장면도 감회가 깊었으며 안성기가 절규하는 마지막 장면도 인상적이었습니다. 젊은날의 나의 초상, 동료ㆍ애인의 모습이 재현된 영화를 보면서 타임머신을 타고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는 것 같았다고나 할까요.

●촬영현장에 직접 가셔서 고증도 하셨다면서요?

 지리산 노고단, 영암 월출산, 고창 선운사 계곡, 포항 보경사 계곡 등 촬영장소에는 다섯 번 정도 갔습니다. 그런데‘산천의구??라는 말은 맞지 않더군요. 간호병 박민자와 헤어지던 돌다리는 그대로 있지만 길은 전부 시멘트로 포장되고 집집마다 슬레이트 지붕에 텔레비전 수신기가 달려 있어 촬영하기엔 부적합하더군요.

●영화 표현상 원작의 내용과 달라진 점은 없습니까?

 원작에 등장하는 1백40여명의 인물 중 비슷한 유형의 사람을 묶어 영화에서는 동일한 사람으로 설정했습니다. 중앙대학교 출신 이상열과 연희대학교 영문과 수석 졸업자인 김 영(최민수 역)을 동일하게 묶은 것이 그 예입니다. 또 빨치산과 토벌군의 노래겨루기 장면에서 본래는 서로 군가를 불렀지만 영화에서는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려는 의미에서‘두만강 푸른 물에…??를 불렀지요. 전체적으로 의도하는 바는 같기 때문에 큰 무리는 없다고 봅니다.

●저서에서는 합동통신사의 한 기자가 어떤 과정을 거쳐 북한 국영통신인 조선중앙통신사 소속 기자가 되었으며 결국 어떻게 빨치산이 되었는지가 충분히 설명되어 있지 않습니다.

 합동ㆍ한국ㆍ공립 등 3개 통신사 직원 2백여명을 모아놓고 북한 중앙통신에서 파견된 책임자 박덕수가 연설을 했어요. 이튿날 가보니 그 수가 절반으로 줄어 있었고 또 2~3일 후에는 거의 안나왔어요. 의용군 나간 사람도 있고 도망간 사람도 있고 여러 가지 이유 때문이겠지요. 최종적으로 여남은명이 선발되었습니다. 당시 남한정부에 비판적이었던 사람, 개혁의지를 가졌던 진보성향의 사람들을 그들이 골라냈던 거지요. 돌이켜보면 인생이란 소총의 총알 같은 것이 아닌가 해요. 시발점에서 몇 밀리미터의 차이가 멀리가서는 2~3백미터 간격으로 벌어지는 것과 같다고 봅니다. 그렇게 달라질 수 있는 순간을 인식 못하다가 나중에 보면 그렇게 되어 있는 사실을 깨닫게 되지요.

●그동안 여러 인터뷰를 통해서 이론적인 공산주의자는 아니었다고 분명히 밝히셨습니다. 그러나 사회 모순에 비판적인 견해를 가졌던 지식인의 한사람이었고,‘우측’에서 보면‘좌경’이었다고 하셨습니다. 그 당시 시대적 상황을 알려주십시오.

 법이 없는 사회였습니다. 우익청년단의 테러를 다루는 태도만 해도 지나치게 편파적이었습니다. 한쪽은 맞아죽어도 못본척하고, 때려죽인 사람이 도리어 영웅이 되는 사회였습니다. 좌익청년을 때려죽여서 그 시체를 남산의‘동번원사??라는 절 마루밑에 처넣어둔 일도 있었습니다. 좌익이나 반정부 계열 사람에게는 인권이 존재하지 않았던 시절이었지요.

●합동통신사 기자 재직 당시 쓴 기사 중 기억에 남는 것은 어떤것입니까?

 한 해 사이에 배가한‘아동범죄’기사와‘밤거리 여인의 실태조사’‘쌀값파동’에 관한 기사들입니다. 그때는 5개 신문에서 통신기사를 받으면 주는‘특종상’제도가 있었는데 몇차례 상을 받은 적도 있습니다.

●빨치산 대원은 주로 어떤 인물들로 구성되었습니까? 누구나 입산하면 유격대원이 될 수 있었습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그당시 대한민국 법률 치하에서는 살 수 없는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대구 10월사건, 2ㆍ7사건, 여순사건에 관련된 사람이거나 좌익기관에 협력해서 수배를 받든가 박해가 예상되는 사람들이 많았지요. 이념에 의한 선택이라기보다는 인간관계 때문에 입산한 사람이 더 많습니다.

●‘보급투쟁'이라는 이름으로 민가에 들어가 약탈행위를 한 행위는 정당화될 수 있습니까?

 그것은 남한 빨치산이 소멸되어간 가장 큰 원인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지원도 없었고 근거지가 될 만한 고안도 없는 상태에서 빨치산 투쟁이 불가능했기 때문에 무리가 간 것이지요. 지리산이 제일 크다고 하지만 반경 15km만 나가면 민가가 있는 야지였기 때문에 15km 원 안에 있는 상태니까 빨치산이 근거지로 삼을 수 있는 여건이 못되었지요. 유격전이 성립할 수 없는 여건에서 투쟁을 하자니 약탈을 하지 않을 수 없었고 결국은 빨치산의 존립 자체를 위협하는 일이 되었지요.

●그 과정에서 민간인 학살행위는 없었습니까? 책에 나오는 황대용 같은 빨치산 때문에 그들이 폭력을 일삼는‘인간백정??이라는 인식이 심어진 것은 아닌가요?

 적어도 남부군에서만은 양민학살이나 방화행위는 없었습니다. 부락민의 방에는 들어가지 말라든가, 절대적으로 필요치 않은 물건에 손대지 말라는 훈시를 받았지요. 그러나 추운 겨울날 마을에 내려가면 구들장 뜨뜻한 안방에 자꾸 들어가게 되고, 산에 치는 꿀벌의 꿀을 따먹는 일도 있었지만… 황대용은 인간을 이념의 도구로 여기는 인물인데 빨치산 가운데 아주 특별한 경우에 듭니다.

●주민들로서는 달갑지 않은 손님이었을텐데요

 해방지구에서는 협조적이었고 그밖에는 비협조적이었지만 총칼이 있으니까 반항하는 일은 없었어요. 주민들은 좌도 우도 없이 그저 난리나 빨리 끝났으면 하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남부군 총사령관 이현상을 처음 만났을 때의 소감은 어떠했습니까?

 그는 전체 당원으로부터 굉장한 존경을 받고 있었어요. 그래서 전북도당에 있을 때보다 남부군 직속부대원이 되었다는 사실에 긍지를 느꼈습니다.

●한국현대사에서 그가 차지하는 위상은 무엇이라고 봅니까?

 이현상 자신은 이루지 못한 꿈을 꾸고 있었다고 봅니다. 남한정부에도 반대하고 김일성정권에도 반대하면서 토착적 사회주의 세력을 중심으로 한 공화국 건설을 꿈꿔왔다고 볼 수 있습니다. 불운한 시대에 태어나 남과 북 틈새에서 처절한 삶을 살다가 죽은‘고독한 영웅??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에는 이현상이 지향하는 바를 몰랐습니다.

●그렇다면‘굶어죽고 얼어죽고 맞아죽는'참혹한 상황 속에서도 끝내 그를'선생님'이라고 부르며 죽음을 받아들였던 젊은이들을 어떻게 해석할 수 있습니까?

 산중에서 여러 사령관을 모셔봤지만 그는 다른 공산주의자들의 이미지와는 다른, 지극히 인간적인 인물이었어요. 부대 통솔도 경직된 것이 아니었고 전체 대원으로부터 인격적으로 존경을 받았지요. 혁명가로서는 그것이 결격사유 중 하나일 수도 있습니다. 나는 먼발치에서만 이현상을 보았지만 김 영은 가까이서 그를 본 적이 있다고 합니다. 몸이 약한 김 영이 능선을 넘어가다가 짐이 무거워서 낑낑대니까 옆사람이 나눠들자고 하면서 그의 짐을 져 주더래요. 몇사람이 쫓아와서‘선생님??하고 부르는 바람에 그가 이현상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합니다.

●휴전협정 후 남부군을 위시한 남한 빨치산들이 북한정권으로부터도 버림받음으로써 처참하게 쓰러져갔다는데 전쟁 당시 남한 빨치산과 인민군과의 관계는 어떻게 이루어져 있었습니까?

 빨치산이 노동당 중앙위원회 명령을 받아 인민군에 협력하는 관계였어요. 인민군도 당의 지배를 받고, 빨치산도 당의 지배를 받으며 상호보완의 역할을 했지 인민군이 직접 빨치산에 명령을 내리는 수직관계가 아니었습니다.

●체포당한 순간의 심경은 어땠습니까?

토벌대에 쫓기며 짐승처럼 산중을 헤매다보니 오직 살고 싶다는 원시적 욕망만 남았습니다. 열흘 동안 밥 두끼를 먹은 상태에서 아침밥 짓는 연기를 보고 밥한덩이 얻어먹으러 갔다가 토벌대에 잡혔습니다. 자포자기 상태였지만 일말의 자괴감은 있었습니다. 그뒤 남원수용소에 갇혀 있을 때도 산에 남아 있는 사단장 및 동지들에 대한 그리움이 컸습니다. 경무관으로 있던 중학교 동창을 우연히 만나 6개월만에 석방될 수 있었지요.

●이현상은 1953년 9월18일 사살됐습니다. 그의 죽음은 어떻게 알았습니까?

 그해 가을, 창경원에 놀러갔다가 그곳에서 이현상 유류품을 전시하고 있어서 알았습니다. 그에 대한‘흠모의 정??이 깊었기 때문에 한동안 멍하니 있었습니다. 그때 성북경찰서 앞에 그의 시체를 전시했는데 아무리 흉악무도한 범인이라고  해도 문명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일을 할 수가 있습니까? 제주 4ㆍ3사건 당시 군사부장 이덕구의 시체를 제주시 관덕정 앞에 세워놓고 지나가는 행인에게 대창으로 찌르게 했던 일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이현상의 죽음에는 의문이 따릅니다. 군에서는 그의 권총을, 경찰은 그의 시신을 갖고 서로 공로타툼을 하는데 어느 한쪽이 사살했다면 전리품이 나뉘어져 있을 수가 없어요. 제3의 인물이 사살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이현상의 부인이었던 하모여인이 생존해 있고 그 아들이 모고등학교 교사로 재직중이라고 들었습니다. 그들을 만나보았습니까?

 부인이 재혼해서 부산에 살고 있습니다만 아직까지 만나지는 못했습니다.

●‘남부군'생존자는 몇 명이나 되고 어떻게 살고 잇습니까?

 전체 대원이 6백50명이었고 휴전협정 당시인 53년8월에는 여자 13명, 남자 11명으로 전체 24명이엇습니다. 책이 출판된 후 연락이 닿아 김 영과 두 여자대원을 만났습니다. 김 영은 《깃발없이 가자》라는 시집을 출판했으며 여자대원 이옥자는《빨치산의 딸》을 쓴 정지아의 어머니이며 또 한 여자대원은 중풍에 걸려 있습니다.

●김 영씨와의 해후가 궁금합니다.

 출판사를 통해 어느날 연락이 왔더군요. 그는 폐색증이 심해 차를 한 정거장도 타지 못한다면서 나더러 오라고 햇습니다. 서울 영등포 시장에서 사과장사를 하는 그를 만났습니다. 37년만에 만났습니다….(눈시울을 붉히며 안경을 벗어든 그는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

●1965년에는 李愚?라는 이름으로 전국구 의원이 되어 3년 동안 정당활동을 하셨으며 또 현재도 민주산악회 부회장으로 김영삼씨와의 산행이 잦은 걸로 압니다. 한 인간으로서, 정치인으로서 김영삼씨를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의지가 대단히 강하고 시국에 대한 통찰력이 천재적이라고 봅니다. 일 추진력도 대단하고….

●3당합당을 ‘보수대야합'이라고 보는 비판적 견해도 있습니다.

 김총재의 결단은 집권을 목표로 하는 정치인으로서는 당연하다고 봅니다.

●20대에 빨치산 활동을 한 사람으로서 요즈음 대학생들의 시위를 어떻게 보십니까?

 지금 서른살인 막내아들이 대학교에 다닐 때 화염병을 만들고 있는 모습을 보고 참 착잡했습니다. 말릴 수는 없었지만 속으로 내 자식은 안그랬으면 좋겠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습니다. 5공화국 때까지만 해도 학생운동에 상당한 이유가 있다고 생각했고, 저 역시 최루탄을 마셔가면서 6월항쟁에 동참했습니다. 그러나 6공은 일단 국민들의 선거를 통해서 출범했기 때문에 합법성인 인정된다고 봅니다. 운동권 학생 중에 북한선전을 여과없이 받아들이는 주시파는 문제가 많다고 봅니다.

●통일되는 날에야 지리산에서 숨진 영혼이 승천할 수 있다는 말로써‘통일염원'의 의지를 피력하신 적이 있는데 문익환ㆍ황석영ㆍ임수경씨의 방북은 어떻게 보십니까?

 개인적으로 돌출행위를 한다고 해서 통일이 가까워진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정부에서 진행하고 있는 통일 프로그램에 지장을 줄 수도 있다고 봐요.

●자신을 역사의 물결에 밀려온 것 같다고 표현한 적이 있는데 시대의 물결을 타지 않았다면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까?

훌륭한 저널리스트입니다.

●만일 통일이 된 후에 《남부군》을 다시 쓴다면 내용이 바뀔 수도 있습니까?

 달라지지 않을 것입니다.

 

 그는 카메라 앞에 설 때마다 정면에서 찍어달라고 당부했다. 하동군 악양면 삼신산 전투에서‘박격포탄??파편을 맞아 머리 왼쪽에 생긴 상처를 보이고 싶지 않기 때문이다. 자신의 흉측한 상처로 인해 빨치산의 이미지가 험악하게 부각되는 것을 원치 않는다는 설명을 덧붙이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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