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승주 칼럼] 보수화 확산시킨 6ㆍ25
  • (본지 칼럼니스트ㆍ고려대교수) ()
  • 승인 1990.07.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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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금년에 나이가 63세인 앵거스 데밍씨는 미국의 주간지《뉴스위크》의 원로 집필가이다. 그는 1950년 당시 대학원 학생이었으나 한국전이 일어나자 정집되어 해병대소위로 참전, 여러번 죽을 고비를 넘겼다고 한다. 그가 한국전 40주년을 맞아《뉴스위크》지의 부탁으로 전쟁을 회고하는 글을 집필하기 위해 한국을 다시 찾았다.

 도착한 날 필자와 만난 데밍씨는 차분한 어조로 자기가 한국을 재방문하는 심정은 무척이나 착잡하다고 했다. 그는 40년간 한국을 찾지 않았으나 그동안 늘 한국전의 기억과 함께 살았으며 지금도 몇 피트 옆에서 수류탄에 맞아 죽어간 동료와 부하들의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고 했다. 무엇보다도 그는 지난 40년 동안 자기를 눌러오던 의문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 전쟁의 의미는 무엇이었고 나는 왜 죽음을 무릅쓰고 싸워야만 했던가? 물론 이것은 그만이 아니라 한국전에 참가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다 같이 갖는 의문이기도 하다.

 한국전이 일어난 원인이 무엇이고 또 그것이 어떻게 전개되었느냐의 문제는 온갖 세미나와 학술논문의 제목이 되어왔다. 전쟁에 대한 책임을 묻는 토론은 곧잘 이념논쟁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누구의 잘잘못을 가리는 것은 그만두고라도 한가지 확실한 것은, 한국전을 경험했던 사람은 그것이 외국인이건 우리나라 삶이건, 북쪽에 사는 사람이건 남쪽에 사는 사람이건, 그 기억과 악몽의 속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배타적 주체사상과 김일성 독재체제 수립에 공헌

 데밍씨는 한국전을 상기시킬 수 있는 기념물이 있느냐고 물었다. 또 부모가 자신이 싸운 옛날 격전지에 자녀를 데리고 가서 보여주기도 하느냐고 물었다. 아마도 미국에서 볼 수 있는 남북전쟁을 기념하는 동상과 기념관, 프랑스나 영국에서 볼 수 있는 세계대전의 기념물을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서울의 전쟁박물관, 부산의 유엔군묘지, 인천의 맥아더 동상….이렇게 세어나가다가 보면 기념물이라는 것이 별로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한국전은 승자가 없는 패자만이 있었던 전쟁이고 엄격한 의미에서는 아직도 끝나지 않은 전쟁이기 때문이다.


 기념하는 동상이나 건물이 안보인다고 해서 한국전의 깊은 상처와 영향이 가셔진 것은 결코 아니다. 남북한이 다 같이 전쟁의 유산을 안고 지금도 과거 40년 동안과 마찬가지로 6ㆍ25라는 힘겨운 짐에 눌려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먼저 6ㆍ25의 근본적인 목적이 무력통일에 있었을지 모르나 궁극적으로는 상호간의 적대감과 불신 그리고 경계심을 고양시킴으로 해서 남북한의 교류와 협력을 어렵게 하고 분단을 강화시키고 경직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쟁을 겪지 않은 동서독은 벌써 통일이 길로 들어섰지 않은가. 6ㆍ25는 북한에서 김일성의 정권경쟁자들을 제거해주고, 공산독재에 항거할 수 있는 중산세력의 대거월남으로 절대적 독재체제 수립을 도와주었다. 동시에 미국을 사상교육의 표적으로 만들어주고 배타적 주체사상을 탄생시켜 북한의 국제적 고립화를 초래하였다. 남한사회에도 6ㆍ25의 여파와 영향은 도처에서 발견된다. 사실 오늘날 사회의 문화적 구조적 형상이 6ㆍ25의 산물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6ㆍ25는 우선 남한사회를 보수화시키는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공산주의는 물론 모든 진보적 사상과 단체를 위험시하고 적으로 간주하게 만듦으로써 극우사상과 세력의 독주를 조장하였다.

 

사회ㆍ정치적 통합의 걸림돌‘한국전쟁'

 6ㆍ25는 남한에 있어서 군대의 거대화를, 정치적으로는 군사정권의 탄생과 독재자의 장기집권을가능케하고 사회적으로는 획일과 위계질서를 강조하는 군사문화의 만연을 가져왔다. 군사우위의 사조는 문민적 정치와 문화의 발달을 저해하여 오랫동안 민주주의가 수난을 당하지 않을 수 없었다.

 在美학자 이채진교수는《계간 사상》특집호에 실린‘전쟁과 혁명,6ㆍ25와 4ㆍ19??라는 글에서 한국전이 전통적인 사회구조를 파괴시킴으로써 정치질서를 어지럽히고 정치적 통합을 어렵게 만들었다고 지적하였다. 물론 억압적인 보수질서의 타파라는 현상에 긍정적이고 건설적인 면이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 과정의 과격성은 정권세력의 반민주적, 반동적 성격을 강화시켜주었고 탄압과 독재의 구실을 제공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6ㆍ25가 우리 사회에 가져다 준 또 하나의 커다란 피해는 지도자 결핍이라는 선물이었다. 전쟁은 남한과 북한에서 용기와 능력을 가지고 있고 애국애족하는 수많은 젊은이들을 앗아가 버렸다. 지금의 60세 전후의 지도자층에 어느 정도의 공백상태가 있는 이유가 바로 6ㆍ25전쟁중에 그 세대의 많은 사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남북한 각각의 내부에서, 또 남북관계에 있어서 6ㆍ25의 유산은 오래 또 깊숙이 그 영향을 미칠 것이다. 미국에서 처참했던 남북전쟁의 상처가 어느 정도나마 치유되기까지에는 100여년의 세월이 걸렸다. 우리는 그나마 지난 40년간 상처를 치유하기는커녕 악화시키면서 시간만 낭비하였다. 6ㆍ25를 기억하지 못하는 세대가 성숙할 때까지 기다려야만 할 것인가?

 이렇듯 전쟁은 개인에게도 사회에게도 말할 수 없이 큰 상처를 주었다. 40년만에 한국을 둘러보고 돌아가서 쓴 글에서 데밍씨는 간단하나마 절실한 말로 한국전을 묘사하였다.“내가 또 다시 전쟁터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것에 대하여 하느님에게 감사드린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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