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속] 총독부가 불러모은 ‘조선의 귀신’
  •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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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가 집대성한 20~30년대 민간신앙…60년만에 우리말로 옮겨져

황해도 해주군 내면 동하5리 동개보에서 하차업을 하는 김억진의 처 이삼재가 정신병에 걸렸다. 그리하여 그의 어머니 조여인은 홍영표 김암석 두사람에게 부탁하여 기도를 했다. 그리고 11월8일에서 20일까지 환자를 한숨도 잠재우지 않고 복숭아 나뭇가지로 계속 때려 전신에 상처를 주었기 때문에 드디어 20일 오전 7시경 그녀는 죽고 말았다(1912년 12월19일 <경성일보>). 약 두세대 전 우리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고 있던 민간신앙의 한 전형을 보여주는 신문기사이다.

 위와같이 1900년대 초반 우리나라 민간신앙의 전반을 파악할 수 있는 ‘귀중한 조사보고서’가 책으로 나온다. 조선총독부 관방문서과 촉탁으로 현지조사 사업에 참여했던 일본인 종교학자 무라야마 지준(村山智順)이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간행한 《조선의 귀신》이 60여년만에 노성환교수(울산대 일본어과)에 의해 우리말로 옮겨져 민음사에서 출간되는 것이다.

 이 책은 민속 · 인류 · 종교학 등 관련학계의 자료로 이미 활용되어왔거니와, 오늘의 한글세대에게는 잊혀진 민족정서를 발견할 수 있는 한 통로가 된다는 점에서 주목된다 하겠다. 식민지가 됨으로써 단절된 민족정체성을 다름아닌 식민지 지배자들의 손에 의해 수집된 자료를 통해 확인해야 한다는 아이러니가 없을 수 없지만.

일제의 민간신앙 연구는 식민정책의 일환

 이 연구를 일본학자의 순수한 학문적 노력의 결과라고 볼 수는 없다. “조선인의 문화와 사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민간신앙으로부터 출발하는 것이 순서일 뿐만 아니라 자연스럽다”고 저자가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이같은 연구를 바탕으로 일제는 문화정책을 펼쳐나갔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겠다.

 《조선의 귀신》은 귀신에 대한 ‘조선인’의 관념과 귀신을 쫓는 전국각지의 갖가지 양귀법(禳鬼法)을 소개하고 있다. 귀신의 관념을 다룬 이 책의 전반부는 유교의 조상숭배가 유입되기 이전의 조상 · 잡귀 등의 신관념을 보여주는 고대 자료는 물론 조선시대 유학자들이 문헌으로 남긴 귀신론을 싣고 있다. 이 책의 해설을 쓴 崔吉城교수(계명대 일본문화연구소장·민속학자)에 따르면, 무라야마 지준은 첫째 주로 사람이 죽어서 된 人鬼를 중심으로 조선의 귀신론을 기술하고 있으며, 둘째 이익·김시습·장계이·정도전·서거정·문종 등의귀신학설과 민중의 귀신관을 다루고 있으며, 셋째 귀신의 종류를 삼국시대·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조선시대 순으로 자료를 분류하고, 특히 조선시대의 귀신에 대해 비중을 두고 있다. 최교수는 이 책이 “원한과 복수심리에 바탕을 둔 탈과 주술 신앙으로 일관되고 있어서 전반적으로 한국인의 신관을 잘 설명하고 있다”고 평가하다.

 귀신을 물리쳐 재앙을 쫓는 양귀법의 여러 실례들은 오늘의 노인층들이 실제로 겪었을 터이다. 귀신과 질병의 관계는 오늘 우리가 쓰고있는 일상어 속에 살아남아 있다. 예컨대 ‘감기가 들다’ ‘병이 들다’라는 말에서 보이듯 병은 외부에서 ‘들어오는’것이며 ‘병이낫다’는 ‘병이 나갔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것이다. 귀신의 출입 여부가 질병인데, 이처럼 과거의 질병관념은 귀신신앙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60여년 전 귀신을 퇴치하는 풍습은 어떠했을까. “귀신을 방어하는 방법은 모든 지혜를 압축시킨 결과”라고 해석하는 저자는 당시신문기사와 전국 경찰조직의 현지보고 그리고 자신의 현장조사를 종합해 그 실례들을 보여주는데, 오늘의 시점에서 보면 꽤 충격적이다. 몇 군데를 옮겨본다.

 “임산부가 난산할 때 그곳 군수의 이름을 써서 이를 물에 타서 마시면 안산(安産)한다. 그리고 군수의 이름을 쓴 종이를 등잔불에 태워서 뜨거운 물과 함께 복용하면 안산을 한다”(전라남도 형행). 이같은 방법을 경악법이라 하는데 “병의 귀신을 경악시켜 내쫓는 것”이다. 처음에 소개한 신문기사처럼 병에 걸린 사람을 때리는 귀신퇴치법(구타법)에는 복숭아나뭇가지가 공통적으로 쓰이는데 복숭아가 “나쁜 기운을 제압하고 백귀를 찌르는 힘”을 가지고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 인사동에 호해여관이 있는데 그 집 장녀 김진수는 당시 17세로 경성여고보 3학년에 재학중이었는데 그녀의 어머니가 중병에 걸려 빈사상태에 빠지자 부엌칼로 자기 오른손의 무명지를 절단하여 흐르는 피를 어머니에게 먹였다. 그러자 그 후 그녀의 어머니는 병의 차도가 있어 건강이 회복되었다. 그녀는 효녀로서 평판이 자자했다”(1927년 <경성일보>). 음식이나 약물로 귀신을 내쫓는 방법의 한 실례인데 이 방법 중에는 인육(人肉) 및 장기(臟器)를 사용한 실례도 있어 충격적이다.

 무덤을 이용, 귀신을 물리치거나 막는 풍속도 많았다. “말라리아에 걸렸을 때 오래된 묘지에 못을 박고 나서 ‘병을 완전히 고쳐주지 않으면 이 못을 빼어주지 않겠다’고 외치면 완전히 낫는다”(경북)고 믿었다.

 이처럼 묘지를 통해 귀신을 쫓는 방법이 성행한 이유를 저자는 “이미 귀신이 인격이있는 것으로 믿고 일반적으로 조상은 자손을 보호하기 때문”이라고 분석한다. 최길성교수는 “주로 때리고 놀라게 하고 찌르고 음식을 대접하여 달래 보내는 등 한국인의 인간관계를 상징적으로 반영하는 치료법이 기술되어 매우 흥미롭다”고 평가한다.

“재앙의 대부분은 귀신들의 소행”

 이같은 귀신관과 풍습이 일반 민중들로부터 지지받고 있으며 그들에게 안정감을 주기 때문에 그 존재가 확고하다고 저자는 쓰고 있다. “조선의 귀신은 사람들에게 행복을 주기 보다는 오히려 재앙을 주는 것이 많고, 인생에 있어서 재앙의 대부분은 이 귀신들의 소행에 의한 것으로 믿어지고 있기 때문에 다시 양귀신앙과 결부되어 신앙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고 저자는 밝히고 있다. 그는 조선에서 귀신신앙이 발달한 까닭을 조선인의 삶의 자세, 즉 행복관에서 찾는다. 그 행복은 곧 귀신을 물리치는 것인데, 그럴수록 귀신의활동은 번창한다고 저자는 결론짓고 있다.

 그의 또다른 저서인 《조선의 풍수》(민음사)등 식민지 자료들은 그가 관련 학계에서 ‘중요한 자료’로 알려져 왔지만 “인류학은 식민지의 시녀”라는 비판과 함께 여러 반응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옮긴이 노성환교수는 “식민지 정책의 일환으로 실시한 연구조사의 결과라고 해서 무조건 그 업적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에 앞서 그 자료를 충분히 분석하고 비판하여 보다 나은 학문의 세계로 발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朴賢洙교수(영남대 문화인류학)는 “우리사회문화에 대한 연구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시대였던 만큼 그들 자료에 대한 의존은 불가피할지 모른다. 그러나 그런 만큼 그 자료들에 대한 평가작업도 시급할 것”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반면 印權煥교수(고려대)는 “현장성이 결여돼 학술적인 면과는 거리가 있다”고 부정적 견해를 보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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