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골의 무기 ‘의지와 신념’
  • 진 철 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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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즘 파리에서는 드골장군이 큰 화제거리가 되고 있다. 신문과 잡지는 드골시대를 회고하는 특집기사를 앞다투어 싣고 있으며, 거리와 지하철 광고판에는 드골장군의 커다란 사진이 6만장이나 나붙었다.

 6월18일은 드골장군이 영국의 BBC방송을 통해서, 독일군에게 파리를 점령당해 의기소침해 있는 프랑스국민에게 항전의 용기를 복돋우는 연설을 한 지 50년이 되는 날이다.

 프랑스에 있어 1940년 6월은 마지노선을 우회하여 침공한 히틀러의 기계화부대의 위력에 굴복한 파국의 시기였다. 6월9일, 프랑스정부의 대변인은 프랑스군이 파리를 사수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바로 그날밤, 프랑스정부는 戰火에서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파리를 ‘무방비도시’로 선언하고 정부를 투르로 옮겼다. 독일군이 프랑스군의 항복을 수락하고 에펠탑에 나치 깃발을 꽂은 것은 6월14일이었다.

 드골장군이 ‘6월18일의 호소’를 런던에서 방송한 것은 그로부터 나흘 후였다. 그는 “프랑스는 독일에 대항해서 전투를 계속할 것이며, 영국과 함께 미국의 공업자원을 이용해서 싸울 것”이라고 외쳤다. 그는 “프랑스는 외롭지 않다. 이 전쟁은 세계전쟁이다. 현재 우리는 기계화된 병력에 압도당하고 있지만 장차 승리할 것이다. 저항의 불길이 꺼져서는 안되며 꺼지지도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때 드골은 무슨 자격으로 프랑스 국민에게 호소한 것인가? 그는 준장으로 진급된 지 얼마 안되는 직업군인이었을 뿐이다. 그는 레이노내각의 국방담당차관으로 약 2주일간 일했지만, 4월17일에 집권한 필립 페탱원수가 독일군에게 굴복하기로 결정했을 때는 일자리를 잃은 몸이었다. 드골은 단순히 드골을 대표할 뿐이었다.

 “저항의 불길은 꺼져서도 안되며 꺼지지도 않을 것”

 드골장군이 어떻게 혼자 힘으로 프랑스의 명예를 회복시키고, 궁극적으로 프랑스를 패전국의 수렁에서 4대 승전국의 위치로까지 오려 놓을 수 있었을까? 놀라운 일이다. 드골이 가진 최대의 무기는 신념과 의지력뿐이었다.

 당시 페탱원수에게 정권을 맡긴 것은 의회였고 페탱은 독일에 항복했다. 따라서 드골은 정부의 방침에 완전히 위배되는 연설을 한 셈이다. 드골의 의회의 다수의견을 무시한 것은 위법이었다. 그러나 그는 과감하게 행동하여 나라를 구한 것이다.

 1940년의 상황에서, 위기에 처한 프랑스를 살리기 위해 나선 드골의 행동을 나무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것은 위대한 인물과 민주주의와의 관계에 얽힌 하나의 패러독스로 치부되 수밖에 없는 일이다.

 공교롭게도 드골시대를 회고하는 요즘의 프랑스 정치상황은 밝지 못하다. 최근 보수계 신문 〈르 피가로〉에 실린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프랑스 국민의 46%가 정치인이 부패했다고 믿고 있으며, 65%가 정치인이 일반 시민의 생활에 무관심하다고 보고 있다. 또한 47%는 정치인이 자기네끼리의 권력싸움에만 열중하고 있다고 비판하고 있다. 정치에 대한 이러한 불만과 불신에 대한 책임은 분열상태를 면치 못하고 있는 보수세력은 물론이고 여당인 사회당에도 있다는 것이 중론이다.

미테랑 “드골의 제5공화국은 쿠데타"한때 비난

 만약 드골이 살아 있다면 최근의 국제동향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지에 대한 추측도 여러 가지로 나오고 있다. 한 영국의 평론가는, 드골이 얄타체제에 의한 ‘유럽의 분열상태??가 끝난 데 대해서 만족할 것이며, 체코슬로바키아 ? 루마니아 ? 폴란드 등 전통적으로 프랑스와 가까웠던 나라들이 독립을 ??회복??하게 된 것을 환영했을 것이라고 보고 있다.

 또한 유럽에 대한 미국의 영향력 행사를 항상 경계해온 드골은 영국의 대처수상이 미국과 유럽간의 자유무역지역 설정을 주장하는 등 미국의 역할에 중점을 두려는 데 대해 몹시 못마땅하게 여겼을 것이며, 자기의 후임인 퐁피두대통령이 영국의 EC가입을 허용한 것도 역시 잘못한 일이라고 투덜거렸을 것이라고 이 평론가는 추측하고 있다.

 ‘6월18일의 호소??50주년을 맞아 드골시대를 돌아볼 때, 프랑스 국민은 그의 긍정적인 면에만 초점을 맞추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드골정치가 모든 점에서 밝기만 했던 것은 아니다. 특히 야당의 눈에는 어둡게 보이는 면도 많았다. 당시 사회당은 드골의 정치 스타일이 지나치게 권위주의적이라고 비판했으며, 당시의 사회당 당수 미테랑은 ??드골의 제5공화국은 ??항구적인 쿠데타??나 다름없다??고 비난한 적도 있다. 금년은 드골이 죽은 지 20년이 되는 해이자 탄생 1백주년이 되는 해이기도 하다. 프랑스가 존망의 위기에 처하지 않았더라면 직업군인으로 끝났을 사람이 국제관계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20세기 유럽의 거인으로 컸던 것이다.

 개선문광장과 파리의 국제공항이 샤를 드골로 명명되어 있는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그뿐 아니라 지식인 · 예술가가 애용하는 카페가 많기로 이름만 몽파르나스의 광장 이름도 ‘1940년6월18일 광장??이다. 프랑스는 ??드골의 호소??를 오래 기억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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