證市 주무르는 ‘보이지 않는 큰손’
  • 방문신 (서울경제신문 기자) ()
  • 승인 1990.07.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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政 · 官界 은퇴 거물, 사채업자가 주류 … 시세조작으로 엄청난 이익 챙겨

큰손. 주가가 크게 오르면 오르는 대로, 크게 내리면 내리는 대로 큰손은 항상 증시의 심장부에 위치해왔다.

 큰손은 3 · 2증권주신용거래허용, 4 · 4경기부양책, 5 · 8증시안정대책 등 굵직굵직한 호재가 발표될 때면 미리 ‘작전’을 끝내고, 그 발표를 보며 빙그레 웃는 집단이다. 큰손이 지나간 뒤의 증시는 예외 없이 썰렁했고 정부발표를 보고 투자한 일반인은 그들이 훑고 지나간 뒤에 남은 웅덩이에 빠져 허우적거리기 일쑤였다.

 큰손은 그만큼 빠른 정보와 막강한 자금동원능력, 자기들만의 얽히고섥힌 인맥구조의 3박자를 갖추고 증시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막연히 ‘큰손’이라 불리는 그들의 실체가 분명하게 드러난 적은 없다. 그들은 베일 속의 세계에 존재한다. 철저히 익명성을 요구하고 자금을 분산시키는 행위는 변하지 않는 큰손의 행동규율이다. 그러므로 ‘큰손’을 ‘얼굴 없는 큰손’의 줄임말 정도로 받아들이면 된다.

 오랫동안 증권회사에 근무한 고참지점장도 큰손의 정체가 무엇인지 오리무중을 헤맨다. 워낙 여러 군데 적절히 자금을 분산시켜놓고 있고 한번 소문이 퍼지면 그 지점과는 거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전 연합철강회장인 K씨를 비롯, 광화문곰이나 白할머니 등과 같이 모습이 드러나 있는 사람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지만 대부분 큰손의 신상명세를 파악하기란 불가능하다.

 그들은 거짓 이름 또는 남의 이름을 빈 것으로 최소한 20여 지점에 구좌를 터놓고 있고, 그래도 자금이 넘치면 서울의 위성도시인 수원 · 성남 · 안양 · 의정부 등의 지점에까지 구좌를 개설하는 경우도 있다. 또 자금추적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이면 현금을 사용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겉으로 드러난 큰손 중에서 손꼽히는 큰손인 광화문곰의 경우 개설구좌가 한때 1천여개에 달했다는 소문까지 나돌았다.

 

하루에 4백억원 동원하는 막강한 자금력

 큰손이라고 다 같은 게 아니다. 은퇴한 정계 · 관계의 거물 및 이들과 ‘검은 돈거래’를 하고 있는 사채업자나 기타 錢主가 큰손 중의 큰손을 이루고, 그 중간에 기업주 출신의 알부자 그룹이 포진하고 있다. 증권회사 문을 들락날락거리는 낯익은 큰손은 하위계급에 속한다.

 알짜배기 큰손이 되기 위해서는 정보력과 자금력을 동시에 확보하고 수하에 자체 인맥을 형성해놓는 것이 필요하다.

 큰손이라 불리는 사채시장의 錢主가 되려면 하루 평균 3백억~4백억원 정도를 동원할 수 있는 능력을 갖추어야 한다. 사채시장에 밝은 한 관계자는 단자회사 발행어음의 30%, 다시 말해 약 4천억원 정도는 증권시장과 직접 연계되어 있는 자금일 것으로 보고 있다. 급전이 필요한 기업에 돈놀이를 하면서 주식 시장에도 한다리를 걸쳐놓는 것이 사채전주의 오래된 관행이다.

 정치권 또는 권력기관에서 일했던 큰손으로는 5공비리와 관련, 미국에 체류하다 최근 귀국한 K씨가 대표적 인물이라고 증권가에는 소문나 있다. 지금도 주가가 특별한 이유 없이 크게 오르면 ‘정치자금유입’이라는 루머가 꼭 따라다니는 이유는 이같은 큰손의 출신성분에 연유한다.

 큰손의 사령관격인 이들 사채전주 또는 권력기관의 실력자 아래 신흥큰손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이들이 큰손으로 부상한 지는 얼마 안되지만 대담한 시세조작 작전을 구사하여 관심을 모은 바 있다. 최근 증시에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큰손, 소위 ‘오떼’란 이들을 지칭하는 것이다. 강남을 근거지로 하는 이들 신흥큰손은 투자클럽 형태로 짜여져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 부근 증권사에서 일하는 관계자는 3백억원 이상의 동원능력을 갖춘 투자클럽이 예닐곱 개 정도인 것으로 추산하고 있다.

 큰손의 주가조작(증권가에서는 ‘작전’이라 부른다) 메커니즘을 이해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우선 얼굴이 드러나지 않는 큰손을 정점으로 하여 행동대원까지 이어지는 편제가 형성 되면 작전 대상 종목을 선정한다. 대상업체는 비교적 주식거래량이 많지 않은 중소규모의 회사가 선정된다. 유통주식수가 적으면 적을수록 작전의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그러나 큰손의 독자적 힘만으로 작전에 성공하기는 어렵다. 주가를 인위적으로 부추기기 위해서는 큰손의 대량 주식매입 과정이 필요한데, 이는 일반투자가와의 정상적 거래를 통해서는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해당종목의 주식을 많이 소유한 관계자 , 즉 대주주와의 담합이 필요하다.

 대주주와의 담합 과정에서 큰손은 “당신이 보유하고 있는 주식을 현재 시가보다 높은 가격으로, 며칠간의 시차를 두고 사들인 후 값이 오르게 되면 되팔터이니 그때 사가시오”하고 권유한다. 물론 이 과정에서 시세차익의 일부와 본래의 지분을 대주주에게 환원한다는 약속이 따른다.

 이렇게 해서 사자는 세력과 팔자는 세력이 결정되고 해당종목의 주식은 인위적으로 높게 형성된 가격으로 거래되기 시작한다. 평상시에는 별로 많지 않던 거래량이 급증하기 시작한다. 거래량이 늘어나고 주가는 오르므로 일반투자자의 관심은 크게 고조된다.

 이럴 즈음에 큰손은 “이 회사가 큰 폭의 무상증자를 실시할 것”이라는 루머를 의도적으로 유포시킨다. 이를 사실로 받아들인 일반인이 주식 매입에 서서히 가세하기 시작한다. 주가는 더 높이 오른다. 일반투자자와 관심이 최고조에 달했다고 판단될 때 큰손은 주식을 처분한다. 주식이 일반투자자의 손에 넘어온 이후 주가는 급격히 하락, 원래의 수준으로까지 떨어진다. 손해를 본 많은 소액투자자로부터 나온 돈이 큰손 몇몇의 주머니로 고스란히 옮겨지게 되는 것이다.

 


증시의 투기장화 부채질하는 ‘검은 돈’

 그러나 대주주가 큰손의 협조요청을 거절하는 수가 있다. 이럴 경우 큰손은 증권사를 직접 활용한다. 증권사는 매매이익의 실현을 위해 직접 운영하는 상품주식을 갖고 있기 때문에 대주주의 역할을 충분히 수행할 수 있다. 담합의 상대방이 다를 뿐 작전방식은 동일하다. 수백명의 소액투자자보다 단 한명의 큰손유치에 혈안이 되어 있는 증권사의 심리를 역이용하는 것이다.

 실제 증권사 지점장은 큰손 확보 여부에 따라 그의 능력과 장래가 결정된다. 80년대초까지만 해도 큰손이 증권사 임원인사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칠 정도였다. D증권의 L상무와 H증권의 K이사 등이 소위 큰손의 ‘가방모찌’역할을 했던 대표적 인물이다.

 대형사인 여의도 D증권사 본점영업부는 기업인 · 정치인 · 관료의 구좌를 많이 확보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일부 권력기관 관계자의 구좌까지 개설되어 있으며 회장이 직접 이를 관리하여 수익률을 보장해준다는 소문까지 나돌고 있다. 이 증권사가 정부의 주요정책 또는 증권정책에 밝은 이유도 이것 때문이라는 이야기까지 나왔었다.

 큰손의 영향력은 갈수록 줄어들고 있다. 그러나 자본시장의 발전을 위해서는 더 줄어들어야 한다. 왜냐하면 시가총액이 82조원으로 GNP규모의 70%에 달하고 총위탁 구좌수가 1천만개로 늘어난 증시규모를 감안할 때, 이들의 시장지배력이 늘어나는 것은 증시의 질적 퇴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증시가 가진 자의 투기장으로 인식되고 있고, 또 실제 부분적으로 투기행위가 계속되고 있는 현실은 큰손의 해악이라기보다는 검은 돈의 해악에서 온 것이라고 하는 쪽이 정확하다. 이는 도려내야 할 환부이다.

 큰손에 의한, 큰손을 위한 증시를 공정한 원칙에 따르는 투자자 모두를 위한 증시로 바꾸는 수술이 절실한 시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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