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국민과의 대화'
  • 정기수 기자 ()
  • 승인 1990.07.1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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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방송 돋보였으나 "내용은 두루뭉실"

시나리오 없는 기획 '새로운 스타일'
질문자. 중산층 이상 편중… 각층 의견수렴 미흡

 저녁 황금시간대. 두 개의 채널을 동시에 차지하면서 장시간에 걸쳐 모습을 나타내고 있는 대통령의 얼굴. 5공 시절에는 그런 날들이 많기도 했다. 사람들은 남은 한 개의 채널을 선택하거나 그마저 볼만한 프로그램이 아닐 때에는 차라리 텔레비전을 꺼버리고 말았다. 그것은 주인공에 대한 특별한 감정 탓도 있었지만, 담화 또는 기자 회견이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가 완벽한 시나리오에 의해 진행됐기 때문이다.

 지난 6월 29일 저녁 7시부터 중계 방송된 청와대에서의 '국민과의 대화' 행사는 5공 때의 그러한 '악몽'과는 크게 모양이 다른 대통령의 새로운 스타일을 보여준 것이었다. 양 방송을 동시에 썼다는 점에서는 예전과 같았으나 시나리오 없는 생방송이었다는 점에서는 가히 '획기적'이었다. 웬만한 질문은 다 나온 것이라든가. 뒤에 녹화방송은 했지만 9시뉴스 시간에 맞춰 두 방송이 하나같이 생중계를 도중에 끊은 '무엄함' 또한 기록될 만한 사건임에 틀림없다.

 이번 '대화는 이수정 공보수석비서관 등 참모진의 건의를 盧泰愚대통령이 '자신있게' 받아들여 이뤄진 것이다. 6·29 3주년을 맞아 마땅한 기획거리를 찾는 과정에서 당초 노대통령은 내외신합동기자회견을 생각했으나 세상을 놀라게 할 만한 선언도 없고 하니 "국민과 함께 고민하는 시간을 갖는 것이 좋다"는 참모들의 의견이 일치해 추진됐다는 얘기이다. 이 공보수석은 노대통령이 즉석대화를 하는 데 능하고 텔레비전 매체에 비교적 어울리는 점을 살려 지난해 6·29 2주년 때 이 안을 내놓았으나 당시 어수선한 시구 때문에 실현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과연 대표성이 있느냐 하는 의문과 함께 선정과정에서도 관심을 갖게 하는 것은 이날 질문에 나선 '국민 각계각층 대표' 12명의 인물.

우선 질문 순서대로 나이ㆍ직업ㆍ학력 등을 한사람씩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곽영훈 : 47. ㈜환경그룹 회장, 환경설계정책연구원 원장, MIT공대(건축), 하버드대(정책학ㆍ교육학)

 서경석 : 42, 목사(안동교회),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회(경실련) 사무총장, 서울공대, 프린스턴 신학교.

 이원영 : 22, 서울대 4년(동양철학), 대학원 진학 예정.

 최진식 : 48, ㈜풍곡공업 사장, 서울공대(기계), 개방대강사, 중소기업진흥공단 강사.

 조영황 : 49, 변호사, 소비자보호단체협의회 부회장, 소비자문제를 연구하는 시민의 모임 이사장, 권인숙씨 재판 특별 감사.

 이미영 : 23, ㈜서진전자 청주공장 생산진도 조장, 청주여고, 한국능률협회 선발 일본연수, QC대회은상 수상.

 송선열 : 34, 신한은행 인사부 대리, 홍익대(경영학), 재무부 파견근무

 임형재 : 42, 휘문고 교사(국어), 고려대(국문학), 전교조 가입 후 탈퇴

 이  현 : 32, 농민, 경기도 양평종고 축산과, 우수영농후계자 농수산부장관 표창.

 김천재 : 36, ㈜동일재봉사 노조위원장, 한국노총 경기지역본부 안산지부 사무국장, 조선대 공전.

 신낙균 : 49, 여성유권자연맹 부회장, 국제대강사, 이화여대, 예일대(기독교학), 조지워싱턴대(교육학)

 유화선 : 50, 한국스피드화스너(건자재 판매회사) 업무부장, 한양대(행정학).

 이른바 패널리스트로 불리는 이들 질문자의 면면은 아무래도 고루 망라돼 있지 않은 것 같다. 직업별로도 그렇고 너무 고학력에 중산층 이상이 대부분이며, 운동권 학생 등 이른바 '과격한' 사람은 빠져 있다. 청와대관계자도 이 점은 시인하고 있다. "객관성과 대표성을 유지하도록 모으자니 30명도 부족했고 또 사람 고르기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무엇보다 택시운전자 주부 중소상인 등을 포함시키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이관계자는 전했다.

 경실련의 서경석목사는 "불렀는 데도 응하지 않았는지는 모르겠으나 우리 사회의 좀더 급진적인 인사들이 참여했더라면 보다 모양이 좋았을 것" 이라면서 "야성발언을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온건파 중에서 찾다 보니 나를 택한 것 같다"고 선택배경을 나름대로 풀이했다. 청와대측은 12명 이외에 더 초청한 사람은 세미나 주최 관계로 이날 불참한 연세대 윤형섭교수(교총회장) 한 사람 뿐이라고 밝혔다.

 12명의 질문자는KBS와 MBC 양 방송사에서 추천한 사람 중 선정된 10명, 교수 추천 1명, 자천 1명으로 구성됐다. 이 자천의 주인공은 유화선씨인데 윤형섭교수가 불참을 통보해와 갑자기 빈자리가 생긴 때를 맞춰 "그 자리에 나가서 꼭 할 말이 있다"며 '끼어주기'를 간청, 참석하게 됐다는 뒷얘기다. 유씨는 이날 마지막 질문자로 나와 "통일을 위해서는 전국민이 하나로 뭉쳐야 하고 이북 동포들에게 투자할 수 있는 우리 경제력을 길러야 한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양 방송사에서의 질문후보자 추천은 과거 오락ㆍ교양 등의 방송프로그램에 출연한 적이 있는 사람 중 의사표현 능력 등 '소양'이 뛰어나 프로듀서들이 휴일 출연요청 대상으로 삼아 눈 여겨 보아두었던 '리스트'를 중심으로 이뤄졌다. "긴장하지 않고 조리있게 질문 할 수 있는 사람을 고르기 위해" 방송사에 추천을 의뢰하게 된 것이라고 청와대측은 밝혔다.

 전후 경과로 보아 질문자 선정기준은 '말을 못해도 안되고 과격해도 안 된다"는 수준이었다고 추측하여 무리가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이날 질문은 정중한 형식을 취했으나 내용은 모두 '과격한' 것이었다. "6ㆍ29선언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고 있다" "5공으로 돌아가려 하고 있다" "이문옥 감사관을 구속시켜 국민을 실망시켰다" "국민과의 약속은 어느 경우에도 지키겠다고 이 자리에서 선언을 하라""국민의 60%가 전교조를 지지한다는 점을 깊이 생각해야 한다" 등등.

 조영황변호사에 따르면 청와대측은 질문를 미리 요구하지도 않았을 뿐더러 내용에 대한 사전주문도 일체 하지 않았는데, 3일 전인 27일 단한번 가진 준비모임에서 "묻고 싶은 것이 있으면 뭐든지 얘기하라. 다만 다음 사람을 위해 너무 길게 하지 말고 지나치게 전문성을 요구하는 질문만큼은 사전에 힌트를 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조변호사는 그래서 "청화대측이 무슨 자신감으로 생방송을 계획하고 질문에 대한 요구도 없는 것인가 의아하게 생각했다"는 것이다.

 청와대의 한 공보비서관은 이러한 의문에 대해 "노대통령을 믿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는 "대통령의 인상과 차분한 어조가 텔레비전에 맞는 데다 그동안 국내외의 수많은 연설경험으로 관록이 붙었다. 특히 지난번 訪日중 행한 일본국회에서의 연설은 현지에서 격찬을 받은 것이었다"면서 여기에 탁월한 자료소화 능력으로 국정전반에 걸쳐 업무를 소상히 파악하고 있어 어떤 질문에도 대응할 수 있기 때문이라고 했다. "대통령선거 당시 수많은 유세를 다니며 쌓은 훈련"에 노대통령의 연설력 '성장배경'을 두는 이 비서관은 "프롬프터(대사 일러주기)의 도움을 받으면서 '읽기'에 바쁘던 어떤 대통령과는 비교가 안되는 인물"로 추켜세우기도 했다.

 문제는 이 공보비서관의 평가에 국민이 얼마나 공감하는 것 인가이다. 이번 '대화'에 대한 여론조사는 아직 발표된 것이 없다. 따라서 일반적인 국민의 평가는 정확히 파악할 수 없으나 질문에 직접 나선 사람들의 의견, 비공식적이나마 중계방송 당시 조사된 시청률등은 그러한 평가를 하는데 일부 참고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신한은행 대리 송선열열씨는 "대통령의 답변이 원론적으로 흐른 아쉬움은 있지만 국민의 얘기를 들으려 했고, 조작이나 편집과정을 거치지 않은 방송이 나가게 된 '새로운 시도'에 더 의미를 두고싶다"고 말했다. ㈜환경그룹 곽영훈회장도 '격세지감'을 전제하면서 "생방송에서 대통령이 그만큼 대답했다는 것은 기본적인 지적 수준은 갖추고 있다고 보아 안도의 감을 가졌다"고 소감을 밝혔다.

 

질문 '과격' 불구 시청자 큰 관심 못끌어

 경실련 서경석목사는 그러나 "대통령은 여러 매서운 질문에 대해 상당히 유연하게 대응함으로써 큰 홍보효과를 얻었다"고 간접적으로 비판하면서 "성실성과 정직성이 결여된 두루뭉수리 답변과 변명으로 일관됐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과정을 밝는 것이 민주적 질서를 이뤄나가는 데 도움이 될 것"이라고 평가했다. 그는 "참석하고 돌아와보니 내가 큰 도박을 했다는 생각이 뒤늦게 들었다"고 말했다.

 한 칼럼니스트의 촌평은 이보다 더 가혹하다. "다른 나라에도 그다지 예가 없는 그런 일을 했다는데 의의가 있지 그 이상은 없다." 그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원칙만 짚고 넘어가며 뭔가 확실하게 주는 것도 업슨 그의 스타일을 다시 한번 확인한 기회였을 뿐"이라고 잘라 말했다.

 어는 방송국에서 조사한 시청률에 따르면 '나머지 한 채널'을 선택한 시청자가 꽤 많았던 것으로 나타났다. "간이조사이기 때문에 오차가 크다"는 이 방송사 관계자의 설명을 감안, 구체적인 수치를 밝히지 않는 대신 대강의 비교만 해보면, 생중계 시간인 저녁 7~9시 사이에 '나머지 채널'인KBS 2텔레비전의 <젊음의 행진>과 <사랑방중계> 시청률이 양 중계채널보다 최고 2배가량 높았다. 9시에 중계를 끊고 양사가 뉴스를 내보내자 시청률은 곧 평균치를 회복했으나 MBC가뉴스를 마친 뒤 중단부분에 대한 녹화방송을 시작할 즈음에는 KBS 2텔레비전의 <드라마게임>으로 시청자가 다시 몰렸다.

 이 같은 결과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국민의 정체에 대한무관심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수도 있겠지만 그것보다는 "주거니 받거니 하는, 솔직하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질문과 답변이 주는 재미가 없었기 때문"이라는 견해가 많다. 질문 했다는 데만 의의가 있는 '대통령과의 대화'는 이번 한번으로 족하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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