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혈액형 소동’빚은 인권불감증
  • 김선엽 기자 ()
  • 승인 1990.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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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의 세 모녀 자살사건 ‘오보경쟁’물의? 처자식 잃은 家長 두 번 넋 빼

 지난 6월2일 오전 서울 송파구 성원아파트에서 가장을 제외한 일가족 세명이 흉기에 찔려 사망한 참혹한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즉시 당일 중앙지 석간과 3일자 조간신문 사회면에 4단~6단 크기로 대충 다음과 같이 보도됐다. “김모씨(40)의 부인 이소경씨(37), 딸 하윤양(12), 아들민수군(10)이 각각 거실 바닥과 자기 방 침대에서 숨진 채 발견됐고 범행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30cm 가량의 주방용 칼이 안방에 떨어져 있었다. 현장을 제일 처음 목격하고 경찰에 신고한 사람은 가장 김씨이며 경찰은 외부로부터의 침입 흔적이 없어 가정불화로 인한 동반자살, 만취해 귀가한 김씨가 부부싸움 끝에 우발적으로 죽였을 가능성에 대해 조사하고 있다.”

 이후 이 사건에 대한 후속기사를 처음 실은 것은 6월20일자 ㅈ일보였다. 사회면 7단 박스로 크게 처리한 후속기사는 세모자 살인사건이 서울대의대 법의학과팀의 부검결과 동반자살로 판명됐다고 전하면서 자살동기를 혈액형 오판에 의한 의처증이라고 추정했다. 즉 사건전까지 자신의 혈액형을 O형으로 믿고 있던 김씨가 지난 88년 민수군의 혈액형이 아내(O형)와 자기 사이에서 유전학상 나올 수 없는 A형인 것을 알고 그 뒤부터 은연중 아내를 의심했으며, 사건 당일도 술에 취해 귀가한 김씨가 무의식중에 혈액형문제를 들먹여 비극을 초래했을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기사 말미에는 대한적십자혈액원 관계자의 말을 통해 국민학교에서 실시되고 있는 피검사의 경우 충분히 오판 소지가 있다는 점까지 덧붙였다. 어머니가 자기 자식 둘을 죽이고 자살까지 하게 된 이유가 남편이 국민학교시절 조사한 혈액형을 잘못 알고 의처증을 일으켰기 때문이었다는 사실은 그야말로 뉴스감이 아닐 수 없었다. 바로 그날 주요 석간들이 같은 내용을 보도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동일한 내용을 다음날 조간에 내보낼 수 없었던 ㅅ일보는 21일자 사회면에 김씨가 “혈액형문제로 부부싸움을 한 적이 없었다며 경찰에 재수사를 요구하고 있다”는 반박성 기사를 6단에 걸쳐 보도했으나 한번 불붙은 혈액형 관련 보도경쟁 열기는 쉽게 식지 않았다. 석간인 ㅈ일보가 21일 ‘국민 10% 혈액형 잘못알아’라는 제목으로 4단기사를 내보낸 것을 비롯, 그 뒤에도 다른 일간지에서 혈액형 오판의 원인을 해설하고 혈액형에 의한 친자확인법을 과학상식으로 다루는 등 신문지상에서 ‘혈액형 소동’이 느닷없이 벌어졌다. 제일 먼저 후속기사를 내보냈던 조간 ㅈ일보도 22일 다시 사회면 톱으로 “세모자 참변 충격으로 혈액형을 재확인하려는 인파가 병원에 몰리고 있다”는 요지의 기사를 실었다.

 그러나 놀랍게도 ㅈ일보의 20일자 ‘혈액형 오판이?’보도 내용은 거의가 확인 단계를 거치지 않은 채 성급하게 작성된 내용이었다. 이같은 사실은 피해자격인 김씨가 언론중재위원회에 중재안을 제출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중재신청사유에서 김씨는 ㅈ일보의 보도에 대해 조목조목 반박자료를 제시했는데 주요부분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아들의 혈액형 얘기를 먼저 꺼낸 것은 자신이 아닌 아내였으며, 의사에게 물어본 결과 확률은 적지만 O형 사이에서도 A형이 나올 수 있다고 해 그 이후 단 한번도 혈액형문제를 거론한 적이 없다. 때문에 혈액형 관계로 아내를 의심한 적이 없으며 그 일로 합의이혼하자고 한 적도 없다. 둘째 아들의 1학년 1학기 통지표에서 혈액형을 봤다고 했는데, 당시 통지표에는 혈액형이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셋째 혈액형문제로 고민하면서 술을 찾는 일이 잦았다고 했는데 이것도 사실무근이다.

 

“언론은 마음대로 써도 되는가”

 결국 ‘혈액형 오판’을 맨처음 보도했던 ㅈ일보는 김씨의 구체적인 반박을 인정, 7월7일자 사회면 고정란에 ‘혈액형 오판자살 아니다’라는 제목으로 이제까지와는 다른 내용을 게재했다. 처자식을 졸지에 잃고 넋이 빠져 있는 가장 김씨의 의문과 주장이 주로 담긴 일종의 해명성 정정보도문이었다. 김씨는 이같은 정정보도기사가 나간 후에도 “언론중재위원회에서 해결이 안될 경우 형사소송도 불사할 생각이었다”며 “짓밟힐 대로 밝힌 한 가정에 대해 언론이 그렇게 마음대로 써도 되는 것이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이번 사건을 담당했던 강남경찰서 형사도 “우리 또한 명백한 자살 이유를 가려내지 못해 ‘동기불상’으로 결론지었으며 검사가 수사종결을 지시한 것도 27일이었는데 마치 경찰에서 자살 동기를 혈액형 오판에 의한 의처증으로 단정짓고 수사를 미리 끝낸 것처럼 보도한 것은 언론의 윤리와 기본의무를 무시한 행위”라고 불만을 표시했다.

 ㅈ일보로부터 시작된 ‘오보 경쟁’은 당사자들에게 더 깊은 상처만 안겨준 채 언론의 또 다른 치부를 드러낸 해프닝으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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