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하며 싸우는 게 낫겠다”
  • 우정제 기자 ()
  • 승인 1990.07.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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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개 방송사노조 17일부터 제작 재개

 방송관계법의 국회 본회의 통과가 강행된 직후 “송출업무의 중단까지도 신중히 검토하고 있으며 재야와의 연대투쟁을 추진하겠다”고 밝혔던 ‘방송법개악저지 공동대책위원회’(KBS MBC CBS PBC 등 4개 방송사노조 수뇌부)는 17시 오전 5시를 기해 다시 제작에 들어갔다. 이미 투쟁목표가 무산된 상태에서 사태가 장기화할 경우 공권력투입의 명분을 줄 뿐더러 여론의 질책이 두렵고 4사 공조체제에 균열이 생길 가능성도 없지 않기 때문이다.

 이번 사태는 ‘방송법 개악저지’라는 동일목표를 내건, 한국방송사상 초유의 동시 연대제작거부라는 점 외에도 원천적으로 노사문제를 떠난 대정부투쟁이라는 점에서 그 특징을 찾을 수 있다. 방송사노조가 쟁의발생신고 등 법적절차를 밟지 않고 전격적으로 제작거부에 들어간 것도 방송관계법 개정을 둘러싼 마찰이 당초부터 노사협상의 대상이 될 수 없는 ‘정치문제’였기 때문이다. 이같은 대립은 민방신설을 골자로 하는 새 방송법이 과연 정부의 ‘방송장악 음모’냐 아니냐 하는 근본적인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방송사노조는 민방도입이 장기집권을 노린 현정권의 사전포석이라고 줄곧 주장해왔고 실제로 그간 정부의 방송구조개편안이 각계의 찬반토론에 부쳐지는 동안 민영론자들의 목소리가 슬그머니 수그러들며 학자들도 대체로 노조쪽 입장에 근접하는 견해를 보였던 것이 사실이다.

 반면 “민방허용은 곧 선진방송 구조로의 개편”이라는 논리를 펴온 정부는 당초 정부안에서 ‘독소조항’으로 지적돼온 △방송위원회의 방송중지권한 △종교방송의 편성비 규정 △KBS의 공보처에 대한 경영평가서 제출 등의 항목이 수정안에서 모두 삭제된 터에 제작거부는 ‘명분없는 정치투쟁’일 뿐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이에 대해 방송사노조는 “그같은 독소조항은 개정안이 범국민적 반대여론에 부딪칠 것을 예상해 ‘선심양보용’으로 덧붙여놓았던 것이 아니냐”하는 의혹을 품고 있다.

 그런데 이번 제작거부 기간중 방송사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제작거부 당위론’의 대세에 밀려 반대론자들의 목소리는 거의 들리지 않았다는 점도 한가지 특징으로 지적될 수 있다. 특히 CBS?PBC에서는 간부급 사원들마저도 “이 방법 외에는 달리 현실적 대안이 없지 않느냐”는 심정적 동조를 보이는 분위기에 밀려 소수의견의 개진을 꺼리는 모습들이었다. 자사의 위상과 관련해서도 각사의 직원들은 민감한 반응을 보였는데 MBC노조측은 이번 제작거부를 “민방출현시의 기득권 분할을 우려한 반발”로 보는 일부 시각에 대해 “자사관련 독소조항이 수정 ? 삭제된 KBS, CBS, PBS가 MBC보다 오히려 높은 찬성률을 보이지 않았느냐”며 ‘자사이기주의’에서 나온 반발이라는 비난을 일축했다.

 집행부 구속으로 인한 노조의 무력화와 20여개 직종간의 견해차, 80년 통폐합 당시 TBC?DBS 등 민방흡수인력을 다양한 인적구성 등으로 상대적으로 결집력이 약한 KBS가 이번 제작거부에 높은 호응도를 나타낸 것은 KBS사태 이후 억눌렸던 ‘방송인의 자존심’이 역으로 표출된 것이라고 풀이할 수 있다. 특히 徐基源사장의 퇴진과 두달째 상주하고 있는 경찰병력의 철수요구를 함께 내건점이 주효했고, 투표 당일인 13일 오전 金正吉의원 등의 의원직사퇴서 제출소식도 큰 자극이 되었다는 노조관계자들의 분석이다.

 결국 방송사노조와 정부, 방송사측과 노조측의 다양한 변수가 얽힌 이번 사태는 표면상으로는 ‘민방 대 비민방’이라는 쟁점에 초점이 맞춰져 있지만 실은 “그 이면에 감추어진 졸속입법의 음모”를 겨냥한 한판 싸움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제작복귀 후 방송사노조는 ‘개악방송법 철폐를 위한 프로그램투쟁’을 최선책으로 택할 소지가 커서 앞으로 방송사내의 노사 마찰로 옮겨간 가능성도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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