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를로스 체포에 ‘뒷거래’ 없었나
  • 파리.양영란 통신원 ()
  • 승인 1994.09.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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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언론 ‘수단과 막후 흥정 여부’ 집중추적…“1년 전부터 은밀 협상”



70~80년대를 풍미하던 ‘세기의 테러리스트’ 카를로스 신화의 베일은 과연 벗겨질 것인가. 신출귀몰하면서 83명을 희생시켰노라고 자부하는 국제 테러리즘의 산 증인 카를로스에 대한 수사가 마침내 시작됐다.

그러나 카를로스가 수단 경찰에 전격 체포되어 프랑스로 연행된 지 나흘째인 8월18일, 체포 당시의 흥분이 가시자 프랑스 언론은 차츰 △카를로스 체포 경위 △수단과의 막후 흥정 여부 △카를로스 체포로 인한 국제 테러 조직의 보복 가능성 등 몇 가지 의혹을 제기하고 나섰다.

테러 전문가들은 보복 가능성이 거의 없다는 데 의견을 모으고 있다. 최근 수년간 카를로스가 동지들과 접촉하지 않고 거의 외톨이로 지냈을 뿐 아니라, 탈냉전 체제로 접어든 국제 기류가 테러 행위를 점차 옛 시대의 유물로 도태시킨다는 것이 이들의 분석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정부가 체포 경위나 막후 협상 내용에 대해서는 ‘국가 기밀’이라는 이유로 함구하고 있어 추측은 쉬 가라앉지 않고 있다. 이미 카를로스의 변호사측에서는 그가 강제로 납치된 것이나 다름없다는 이유를 들어 그의 프랑스 입국 경위가 불법이라고 이의를 제기했다. 이 때문에 그의 기소 여부에 차질이 생길 가능성은 거의 없지만, 변호인측으로서는 어느 정도 시간을 지연시킬 수 있게 되었다.

“중부 아프리카 지역 세력경쟁과 연관”
한편 ‘수단측에 어떠한 대가도 치르지 않았다’는 프랑스 정부의 공식 발표가 있었음에도 프랑스 신문.방송들은 연일 새로운 자료를 찾기에 분주하다. 언론에 따르면, 프랑스측은 ‘카를로스 수단 거주설’이 확인되기 1년 전부터 수단측과 은밀히 교섭해 왔다. 프랑스는 수단 남부 기독교 게릴라측에 무기를 지원하는 미국과 대조적으로 북부의 이슬람 정권을 은근히 지원함으로써 중부아프리카에서 강대국 간의 세력 균형을 맞추려는 의도가 있었다. 이와 동시에 최근 2~3년간 알제리 회교도 사태로 부심해온 프랑스 정부는, 하르툼 회교 정권을 통해 알제리 과격 회교 지도자들과 대화 통로를 연다는 이중 효과를 노렸다. 그러므로 효용 가치가 떨어진 카를로스를 양도한 것은 겉으로 드러난 제스처일 뿐 실익은 다른 곳에 있었다고 추측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일리치 라미네스 산체스. 일명 카를로스는 40년 베네수엘라에서 태어났다. 변호사인 그의 부친은 상당한 부호였음에도 불구하고 세 아들에게 각각 일리치.블라디미르.레닌이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로 열렬한 공산주의자였다. 어릴 때부터 부친으로부터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듣고 자란 일리치는 15세기 되던 해인 64년 자연스럽게 공산당에 입당했다. 이는 쿠바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이룩한 카스트로나 남미 대륙을 누비고 다니며 혁명 게릴라를 지휘하던 체 게바라가 사회주의자들에게 영웅시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68년 일리치는 모스크바 유학길에 올랐다. 파트리스 루뭄바 대학에서 사회주의 혁명 지도자 수업을 받는 과정에서 그는 팔레스타인 해방 문제에 눈뜨게 되었다. 이 시기에 특히 과격 단체인 팔레스타인 해방 인민전선 지도자들과 교분을 맺었다. ‘반소 도발 행위’가 잦았다는 이유로 70년 모스크바에서 추방되자(그러나 이 추방 사건에 대해 카를로스가 소련 KGB의 첩자로 파견되었을 가능성이 있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일리치는 요르단으로 건너가 후세인 왕의 지배에 저항하는 팔레스타인들의 편에 서서 함께 투쟁했다.

일리치 라미네스 산체스가 세계에서 가장 위험한 인물이라는 ‘명성’을 얻게 된 것은 70년대 초 유럽으로 건너오면서부터이다. 그러나 실제로 그가 유럽을 공포의 도가니에 몰아넣을 정도로 악명을 떨치게 된 것은 74년부터 약 10년간 프랑스 내에서, 혹은 프랑스를 겨냥해 제3국에서 벌인 테러 행위 때문이다. 증거불충분으로 기소 대상에서 제외된 사건을 빼고, 이번 수사의 대상이 되고 있는 사건만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75년 경찰 2명과 레바논 출신 동료 사살(이 사건 이후 일리치는 카를로스라는 이름으로 전세계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92년 궐석 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82년 파리에서 발행되는 반시리아 경향의 아랍 신문사 습격(사망 1, 부상 63) △83년 마르세유-파리간 TGV 폭파(사망 5, 부상 50). 이밖에도 △네덜란드 주재 프랑스대사관 인질 사건 △파리시내 생제르맹 잡화점 수류탄 투척(사망 2, 부상 34) △비엔나 산유국 장관 인질 사건 △서베를린 및 트리폴리 주재 프랑스문화원 폭파 사건이 있다.

카를로스가 은둔.잠적 생활을 해온 85년부터 체포되기 직전까지의 궤적은 국제 정세의 변화와 민감하게 맞물려 있다. 85년부터 카를로스는 혁명 동지이자 부인인 막달레나와 시리아 다마스의 부촌에서 여유 있는 은둔 생활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90년대 말 프랑스 주간지 <렉스프레스>가 이 사실을 보도하면서부터 사정은 달라지기 시작했다. 국제 여론이 시리아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한 것이다.

중동에서도 ‘환영 받지 못했던 자’
마침 베를린 장벽 붕괴와 더불어 공산 진영은 풍비박산이 났으며, 걸프전을 계기로 미국만이 유일한 초강대국의 위용을 과시하던 시기였으므로, 시리아로서는 테러에 극히 예민한 미국의 신경을 자극할 이유가 없었다. 그 결과 91년 여름 카를로스는 시리아의 협박에 가까운 종용에 못이겨 예멘으로 향했다. 그러나 예멘에 정착할 의사가 없었던 카를로스는 같은 해 9월 리비아를 택했다. 하지만 이미 여러 차례에 걸쳐 국제테러 지원국으로 의심을 사고 있던 카다피 정권은 그를 다시금 예멘으로 돌려보냈다.

카를로스와 그의 부인, 딸, 모친의 그 다음 행선지는 요르단, 카를로스가 요르단에 거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서방 정보기관에 포착되면서 요르단 정부에 대한 서방의 압력은 날이 갈수록 강도를 더해갔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이 역사적인 평화 협상을 시작한 93년 여름, 과거의 팔레스타인 혁명 기수 카를로스는 중동지역에서 더 이상 불필요한 존재였을 뿐 아니라 오히려 걸림들로 전락했다.

이처럼 예측하지 못한 역사의 흐름으로 말미암아 80년대의 피신처였던 공산권, 90년대에 은신처를 제공해주던 중동 지역 모두가 자신의 행동반경으로부터 멀어져가자, 카를로스는 자기에게 남은 유일한 피난처로 수단을 택했다. 그리고 결국 그곳에서 체포돼 프랑스로 압송당하는 운명을 맞은 것이다.

하루아침에 파리 시내 한복판의 감옥에 수감된 카를로스는 담당 판사와의 첫 대면에서 시종일관 농담을 곁들일 정도로 여유있는 모습을 보였다. 그에 대한 전격 체포가 몰고 올 사법적 파장이 적지 않으니만큼 사람들의 관심은 이제 막 시작된 법정에서의 공방에 뜨겁게 모아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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