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오농민전쟁의 역사성 간과했다”
  • 이성남 차장대우 ()
  • 승인 199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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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개벽> 혁명 필연성 소화 못해 …각색자 김용옥씨 “동학은 개벽일 뿐”

 임권택 감독 김용옥 각본의 <개벽>이 개봉되었다. 동학 제2대 교주인 해월 최시형의 일생을 다룬 이 영화는 동학의 인내천 사상과 임권택 감독의 인본주의적 사상이 맞닿아 있으며, 학계에서도 그 성격 규정을 둘러싸고 논의중인 동학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철학자 김용옥의 시각으로 해석, 영화화했다는 점에서 일찍부터 기대를 모아왔다. 그런데 이 영화가 동학사상을 지나치게 관념적인 시각에서 조망하고 있으며, 전봉준과 갑오농민전쟁이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사회경제적인 시각이 결여된 채 부수적으로 처리되어 있다고 지적하는 이들이 많다.

 영화 <부활의 노래>를 연출한 이정국 감독은 “일생 동안 교조 신원운동을 전개하며 종교의 자유를 획득하기 위해 투정하는 최시형을 축으로 해서 줄거리를 끌어감으로써 종교영화 같은 인상을 받았을 뿐이다. 동학농민전쟁의 강렬한 힘이나 역사적 당위성이 드러나지 않았다”고 말한다. 한 출판인은 최시형의 온건한 입장과 전봉준의 진보적 입장이 대비된 이 영화를 본 수 “동학혁명의 본질이 호도될지도 모른다고 우려했다. 전봉준 김개남의 삶을 조명한 영화가 만들어져야 비로소 균형잡힌 동학의 모습이 보여질 것이다”라고 주장한다.

과격 운동권 이미지로 전형화된 전봉준
 일례로 공주 우금치전투 장면을 보자. 다연발 총과 포를 발사하는 일본군 적진을 향해 몽둥이와 총을 들고 진격하는 동학군이 종이 허수아비처럼 꼬꾸라지는 이 장면은 관객의 뇌리에 전봉준을 무고한 도인들을 미끼로 삼은 위험한 영웅주의자로 각인시키는 역할을 한다. “준비와 대책이 없는 싸움을 계속한들 무고한 도인들의 희생한 따를 뿐”이라며 기포를 명할 수 없다는 최시형의 주장에 묵시적으로 정당성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다. 천도교 중앙총부 상주선도사 표영삼씨는 국사편찬위원회의 《동학란 기록》에 나와 있는 우금치전투 상황을 예시하면서 “고지 점령을 위해 동학군과 일본군이 40번이나 밀고 밀렸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반해 영화에서는 일방적으로 패전으로 묘사되어 있다”고 지적한다. 이는 “동학은 혁명이 아니라 개벽일 뿐이다”라는 작가 김용옥씨의 작의에서 포태된 것으로, 결과적으로는 동학군에 가담한 농민이 지배질서에 대항해 무력항거까지 가게 된 필연적 시대상황을 간과해버리고 있는 것이다.

 그가 영화 속에서 설정한 동학의 주체세력은 누구인가. 1893년3월 보은 장내리 집회 장면에서 인용한 관변기록 《어윤중장계》에서 설명한 바 대로 “온 나라의 불만의 기운을 규합한 것”인가. 아니면 남북접 간의 갈등이 표출된 장면에서 오지영이 “관의 지목을 받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없는 사람이 수천명이라는 사실을 … 이 사람들보고 화적패가 되라는 거요, 떼강도가 되어 팔도를 떠돌아다니란 게요”라고 말한 그 사람들인가. 그것도 아니면 김개남이 “우리는 돌아가면 다 죽는단 말야. 그래서 가산을 팔아 치우고 온 사람이 태반이야, 알아?”라고 지칭한 사람들인가.

 임권택 감독은 “최시형과 전봉준, 어느 한쪽에 역사적인 의미를 더 부여하려고 한 의도는 없었으며, 치우침 없이 그대로 당시 정황을 담아내려고 했다”고 말한다. 그렇지만 이 영화에서 “고통받는 그 시대 민중의 구체적 삶의 모습이 가시적으로 드러나지 않음으로써 동학혁명이 필연적일 수밖에 없었던 시대상을 담아내지 못한 것이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시인한다.

 김용옥씨는 9월25일자 천도교 월보에 실린 ‘개벽 영화 시나리오 작의’에서 “역사적 사실이 일시적 이념의 편향 때문에 왜곡되는 그러한 불행한 사태는 있을 수 없다”고 단정하면서 이 작품에서는 모든 가능한 입장을 편견없이 있는 그대로 살려 드러내려 했다고 밝혔다. 그런데도 이 영화를 본 많은 이들이 ‘과격 운동권’의 이미지로 전형화시킨 전봉준의 모습에서 “자신의 의지를 관철시키기 위해 민중의 피를 흘리게 한 모험주의자로 몰아가려고 하는 지배자 또는 중간계급의 입장이 반영되었다는 인상을 받았다”고 밝히는 까닭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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