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진국이 되는 최소조건
  • 김형국 (서울대 환경대학원 교수·본지 칼럼니스트) ()
  • 승인 199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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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들 우리가 지금 선진국병을 심하게 앓고 있다 한다. 아직 선진국이 아니면서 선진국 행세를 하는 게 병이라는 뜻이다. 병을 고치자면 무엇이 건강상태인가를 알아야 한다. 마찬가지로 선진국병을 고치자면 선진국의 정체와 그 조건을 알아야 할 것이다.

 경제학자들에게 물으면 선진국의 정의는 비교적 명백하다. 경제규모 국민소득 등이 얼마며, 산업구조가 어떤 상태라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나는 이 경제학적 정의가 결코 충분치 않다고 생각한다. 그보다 삶의 기본적 욕구가 안정 가격으로 공급될 수 있어야 그게 선진국이 되는 최소한의 조건이라 믿는다.

 살림사는 주부가 아니라도 요즈음 우리는 생필품 값이 참으로 터무니없음을 실감한다. 나라 땅이 비록 좁다해도 배추의 안정공급에는 전혀 무리가 없었음에도 배추 한 포기 3천5백원은 도대체 어찌 된 일인가. 이 비싼 값이 농민의 이득으로 돌아가면 말도 않겠다. 백화점의 특별광고가 나가자 소비자들이 장사진을 쳤는데 그건 5백원에 배추를 팔았기 때문이다. 백화점 가격과 시장가격이 이렇게 엄청난 간격을 보이는 것을 보면 농간부리기 일쑤인 유통업자가 폭리를 취하고 있음이 분명하다.

소비자는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포로
 한 나라의 풍물은 시장에 가서 체감할 수 있기 때문에 나는 외국에 가면 꼭 시장을 둘러본다. 달포 전 일본 동경의 도심부 최고급 백화점에 가보니 서민의 식탁에서도 즐길 만한 가자미 한 마리가 우리 돈으로 2천7백원이었다. 서울 땅에서는 그게 얼마인가. 3천5백원이다. 일본의 국민소득이 우리의 약 4배에 달한다는 사실을 감안한다면 가자미 한 마리의 동경시세는 구매력 대비, 7백원 꼴이다. 그렇다면 가자미 한 마리에 나타난 우리 물가는 일본의 5배라는 말이다. 나는 단언한다. 생필품 값이 절대비교를 해도 서울의 물가는 동경의 물가보다 훨씬 높다. 이런 높은 생필품 가격에도 불구하고 우리 소비자는 지금 꼼짝없이 당하고 있다. 왕이란 말은 헛말이고, 모두 포로가 되고 말았다. 관광지나 행락지에 가면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는 소비자가 ‘포로가 된 소비자’이다. 이런 현상이 관광지 같은 한정된 장소나 추석 같은 특수경기철에만 해당되는 비정상인 줄 알았는데, 그게 전국적으로 또 항시적으로 확산되어 있는 것이 오늘의 실상이다.

 누가 소비자들을 포로로 만드는가. 영세업자에게까지 왜곡된 기업가정신이 확산되었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개발경제의 심리는 묘한 것이어서 함께 못 살다가 어느 누군가가 잘 살게 되면 잘 살고 못 사는 사람 사이에 격차가 생긴다. 초기격차는 오히려 자극이 된다. 못 사는 사람도 언젠가 잘 살 수 있을 것이라는 기대를 갖고 또 그렇게 되도록 노력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익부 빈익빈이 심화돼서 빈부격차의 골이 깊어지면 아무리 해도 안되겠구나 하고 좌절에 빠진다. 좌절은 좌절에 그치지 않는다. 비정상적인 탈출구를 찾게 마련이다. 한탕주의 같은 사기성이나 투기성 행각으로, 또는 자신보다 힘이 없는 사람을 볼모로 잡는 공격성 행동으로 나타난다. 이번 여름, 어느 관광도시에서 평균 1천원 정도인 시내 택시요금을 거리에 관계없이 한번 타는 데 4천원으로 통일해버린 작태가 그 단적인 보기이다.

 포로로 잡힌 우리 소비자를 누가 구할 것인가. 그건 선진국이 멀잖다고 나발을 부는 정부의 책임이다. 배추 고추 같은 생필품 중의 생필품 값이 폭등하면 정부가 싼값으로 공급하는 창구를 대폭 개방해야 한다.

서민의 생존을 철저히 보호하는 멕시코
 올림픽을 개최했던 중진국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친근하게 생각하는 나라가 멕시코이다. 1인당 국민소득이 우리의 4분의 1정도로, 선진국으로 가는 길에 우리보다 뒤져 있다고 여기는 그 나라의 경우를 한번 기억할 필요가 있다. 주식인 옥수수가루는 거의 공짜에 가까울 정도로 모든 국민에게 안정 공급되고 있다. 그곳을 가봤던 1년전의 사정이 지금도 같은지 모르겠으나 멕시코시의 지하철 요금은 우리 돈으로 25원. 시외전화 요금은 비싼 대신, 시내 공중전화 요금은 공짜이다. 서민을 기준을 생존을 철저히 보호하고 있다.

 마침 우리 정치책임자 일행이 멕시코를 공식방문했다. 군사문화적인 시각에서 보면 형편없는 나라로 비칠지 모른다. 그곳 국군의 날 행사에 사열대 앞을 막 지나던 행사용 트럭이 고장이 나서 타고 있던 군인들이 황급하게 밀어낼 정도로 기율이 해이한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니까.

 그러나 다른 측면을 한번 생각해 보자. 최근 보도를 보면 미국시장에서의 상품경쟁력은 우리가 멕시코보다도 뒤진다 한다. 왜 이렇게 됐는가. 서민들의 최소생활이 보장되는 것도 그들의 생산 열의를 높이는 데 일조를 할 것이다. 정치지도자들의 이번 멕시코방문에서 그런 교훈을 얻어왔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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