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박한 자가 장님을 이끈다”
  • 박순철 (편집국장대우) ()
  • 승인 1991.10.1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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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독일의 시인 괴테에 관해 이런 얘기가 전해진다. 그는 신문을 나온 날짜에 읽는 법이 없었다. 나온 지 한달 뒤에야 읽었다. 일부러 ‘舊聞’이 되기를 기다렸던 셈이다. 이렇게 하면 흘러가는 ‘단발성 기사’에 관심을 쏟지 않아도 되기 대문이었다. 괴테처럼 유명한 인사는 아니지만 미국 텍사스주 휴스턴에 살았던 미미 버드 킹 여사에게는 좀더 기이한 버릇이 있었다. 유산을 많이 물려받은 그는 집사에게 매일 아침 배달되는 신문을 지하실에 차곡차곡 쌓아놓도록 했다. 그는 새로나온 신문을  읽는 대신 20년전 같은 날짜의 신문을 읽었다고 한다.

 하루하루를 허겁지겁 살아가야 하는 우리로서는 괴테나 킹 여사의 이런 습관은 흉내낼 수 없는 奇行에 불과하다. 그러나 여기에는 나름대로의 지혜도 깃들어 잇는 것 같다. 오늘날과 같이 수많은 일들이 정신없이 일어나는 세상에서는 본질적인 일과 비본질적인 일, 영속적인 현상과 일시적인 현상을 가려낼 필요가 더욱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뉴스의 열기가 식을 시간을 기다려 냉정하고 객관적으로 판단할 필요성이 어느 때보다 큰 것이다.

위기신호가 숨가쁘게 나올 때일수록 뒤로 물러서서 살펴야
 사회가 정글 속의 어두운 비명을 지르고 경제가 위기의 붉은 신호를 숨가쁘게 내보낼수록 한발짝 물러서서 살펴보는 습관이 필요해지고 있다. 특히 경제문제의 경우 사람들의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얽혀 있어서 그런지 성급한 진단이 되풀이된다. 정부도 기업도 가계도 쉽게 흥분된 목소리로 외친다. 예컨대 지난 89년에는 ‘경제위기’를 호소하는 목소리가 높았고 90년에는 ‘경제난국’이 경고음을 발했다. 올해에는 다시 ‘경제위기’이다

 시간의 긴 지평 위에 놓고 보면 하루하루의 사건에서는 가지하기 어려운 중요한 신호들이 잡힌다. 溫故而知新의 지혜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소중하다. 그러면 20년 전에 우리는 무슨 위기의식을 가졌는가. 경제의 큰 문제는 본질적으로 지금과 얼마나 달랐는가. 지난 한 세대 동안 한국경제는 외국에서 돈(기계와 기술)을 빌려 국내의 싸고 근면한 유휴노동력을 이용해 노동집약적 상품을 대량 생산방식으로 만들어 선진국시장에 수출하는 것이었다고 요약된다. 여기에서 시장을 제공한 미국과 기계·부품을 공급한 일본에 대한 의존도는 절대적이었다. 이러한 대기업 주도의 가공무역적 구조가 아직도 온존한 가운데 노동력이 희소해지고 그  값이 오르면서 표준상품 위주의 국제경쟁력이 벽에 부딪히고 만 것이다.

 이렇게 볼 때 우리 경제는 경상수지의 적자규모나 물가상승률로 표현되는 이상의 심각한 어려움에 처해 있는 것이 사실이다. 어떤 근본적 변화의 길목에 접어든 느낌마저 든다. 또 이런 변화가 요구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현재의 상황을 ‘변화의 위기’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어느 미국학자는 1인당 국민소득을 1만달러까지 끌어올리는 데 성공했던 전략이 다시한번 선진국 수준인 2만달러 이상으로 높이는 데 유용한 것은 아니라고 지적했다. 기존의 전략 제도 사고방식으로는 거세어지는 맞바람을 헤치고 나가듯 발전의 발걸음이 갈수록 무거워진다. 그러나 경제위기의 문제를 1인당 국민총생산(GNP), 그러니까 생산의 문제로 시야를 한정해서는 안된다. 어쩌면 우리는 보다 근본적인 결단의 시점에 와 있는지도 모른다.

 《시사저널》제 100·101 합병호에는 충격적인 기사가 실려 있었다. 피부병에 걸린 사람의 사진과 함께 날 때부터 한쪽 귀 없는 강아지와 다리가 셋뿐인 개, 눈 위에 불이 또 하나 난 기형소의 사진들이 끔찍했다. 연쇄적인 추행 살인사건으로 공포에 떨어온 경기도 화성군의 주민들이 이번에는 산업폐기물 공해로 시달리고 있다는 기사였다. 우리는 숨가쁜 양적 성장을 거듭해 오는 가운데 어느덧 경제문제를 경제성장 물가 국제수지의 거시지표로만 이해하는 데 익숙해졌다. 경제위기도 결구 ‘지표의 위기’였다. GNP의 성장을 높이기 위해 치르는 대가 자체도 GNP를 높일 수 있다는 숫자의 마술에는 눈을 감았다.

소득 2만달러를 위해 얼마나 더 파괴해야 하는가
 독일 태생을 나치의 등장과 함께 영국으로 이민했던 경제학자 에른스트 휴마허는 지난 1973년 《작은 것이 아름답다-인간 중심의 경제학》이라는 이색적인 저서를 펴낸 바 있다. 여기에서 그는 현대의 공업문명이 재생할 수 없는 화석연료 등의 ‘자본’을 소득으로 착각, 공업문명이 그 토대 자체를 파먹어 들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이러한 자본의 또다른 에로 그는 자연의 허용한도와 인간성을 들었다. 그는 공업화와 공해 발생을 연결시키는 시각을 고집했고 공업화에 따른 범죄와 마약 폭력행위 정신장애 반항 등의 인간성 파괴를 같은 시각에서 보았다.

 한국경제의 위기, 한국사회의 여러문제도 이러한 각도에서 볼 때가 되지 않았는가. 20년 전의 신문에서는 썩은 물의 구역질나는 냄새를 맡기 어려웠고 성폭행의 끔찍한 인간성 파괴는 천인공노할 예외적 사건이었다. 소득 2만달러를 위해 얼마나 더 자연과 인간성의 파괴를 계속해야 하는가.

 미국의 어느 경제학자는 현대사회를 “경박한 자가 경박한 자의 손을 끌고 가는 사회”라고 규정했다. 슈마허는 이를 이렇게 고쳐놓았다. “경박한 자가 장님의 손을 끌고 가고 있는 위험한 사회”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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