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은 부족국가로 가는가
  • 베를린·윤도현 통신원 부다페스트·김성진 통신원 ()
  • 승인 200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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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극우민족주의’ 전유럽 확산 … ‘경제 불안’ ‘선동 정치’서 비롯

                           
 올해초부터 9월 말까지 독일에서 극우주의자들의 폭력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을 모두 10명이나 된다. 이들이 저지른 각종 폭력사건은 1천2백96건으로 전년도 1천4백83건의 기록에 육박하고 있다. 정부 관계자들을 정작 곤혹스럽게 만드는 것은 단순한 수치상의 증가가 아니다. 문제의 심각성은 극우주의자들의 폭력이 갈수록 잔인해지고 규모가 커진다는 데 있다. 최근 북부 로스토크에서 일어난 신나치주의자들의 난동에는 주변 시민까지 박수를 치며 가세해 텔레비전을 지켜보던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이는 외국인에 대한 적대감이 일부 신나치주의자에 국한되지 않고 일반인에게까지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이었다.

 통일 이후 독일에서 끊임없이 일어나는 극우주의적 난동을 보고 주변 국가 국민은 과거 히틀러 시절을 떠올린다. 막강한 경제력을 가진 통일독일이 우경화로 치달을 경우 그것이 주변국에 미치는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다고 여기는 것이다.

청소년 3분의 1 ‘이유없는 폭력’

 덴마크에서 마스트리히트 조약이 국민투표 결과 거부된 이유 가운데 하나는 바로 독일 패권주의에 대한 우려에 있었다. 최근 프랑스 국민투표 때도 ‘떠오르는 독일’은 유럽 공동체 가입을 반대하는 극우파들의 주요한 논거가 되었다. 또 얼마전 영국과 함께 통화 위기로 큰 충격을 받은 이탈리아는 ‘슈퍼게르마니아’에 대한 두려움에다가 이제는 ‘슈퍼마르코’(‘슈퍼마르크화‘)에 대한 불안감까지 더해진 상태이다.

 극우주의의 득세는 독일만의 현상은 아니다. 올들어 프랑스 지방선거에도 극우파가 급격히 세력을 키운 것으로 나타났다. 영국에서는 뿌리깊은 인종차별과 더불어 외국인에 대한 테러가 늘어나고 있다(《시사 저널》151·152 합병호 62쪽 참조). 비록 독일만큼 심하지는 않다 해도 대부분의 서유럽국가에서 극우주의의 목소리는 점점 커지고 있다.

 극우주의가 확산되는 원인을 한마디로 잘라 말하기는 힘들다. 개별 국가마다의 정치·경제·사회적 특수성과 전통 배경이 아주 다르기 때문이다. 일반적으로 전문가들은 1980년대 이후 계속된 신보수주의 정책과 이로 인한 빈부격차 확대, 사회복지비용 감소와 높은 실업률(특히 청소년 실업) 같은 사회·경제적 불안상황, 그리고 이를 해결하지 못하는 기존 정치권의 무능력 등에 1차적 원인이 있고, 이것이 동유럽 붕괴와 냉전체제 와해로 인해 더욱 확대되고 있다고 진단한다. 그동안 동서냉전 분위기에 가려졌던 부국과 빈국 간의 ‘남북대립’이 동유럽 아프리카 아시아로부터 망명자 유입이 늘어나면서 더욱 부각되는 것이다.

 최근 독일 쾰른의 경험심리학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16세부터 24세 사이의 청소년 가운데 3분의 1정도가 외국인에 적대적이거나 또는 적대적일 가능성이 높은 반면 4분의 1은 외국인 적대를 단호히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외국인 문제를 둘러싸고 젊은 층에서의 분열이 뚜렷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회복지관계 종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극좌주의와 극우주의 폭력을 분리해 생각해서는 안된다고 말한다. 그들의 말에 따르면 극좌 극우를 막론하고 문제청소년은 대부분 열악한 가정 출신이며 그들이 특정한 정치적 입장을 받아들이는 것은 심사숙고의 결과라기보다는 친구나 주변 사람을 통해 우발적으로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들이 극단 행동을 하고 강한 확신을 가진 것처럼 보여도 의외로 정치관이 확고하지 않고 사회적응 실패 또는 생활에서의 좌절을 무조건적이고 극단적인 행동으로 극복하려 한다는 주장이다.

 극우주의자들은 전반적 불안감과 적대감 속에서 실업, 주택난, 범죄율 증가 등 사회 구조적 문제에 대한 책임을 엉뚱하게도 모두 자국내 외국인들에게 돌려버린다. 그들은 현재 서유럽에 살고 있는 많은 외국인이 경제 건설과 사회적 부를 창출하는 데 기여해왔다는 사실을 외면한다. 독일의 경우 한때 국내 노동력이 모자라 터키 노동자를 많이 끌어들였다. 그때는 밴드까지 동원해 환영하는 등 법석을 떨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이들은 극우주의자들로부터 독일인의 일자리를 위협하는 ‘거지떼’로 취급받고 있다.

정치가들, 권력 위해 민족감정 자극

 동유럽의 경우도 현상은 비슷하다. 2년 전 공산주의가 뿌리박고 있던 토양에 자유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이식하는 실험이 시작되었을 때의 환호는 이제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다. 발칸반도에서는 연방분리를 둘러싸고 무자비한 살육전이 계속되면서 2차대전 이래 최대의 난민이 생겨 온유럽을 들끓케 한다. 체코와 슬로바키아는 연방분리를 놓고 아직까지도 저울질이 한창이다. 폴란드에서는 또다시 반유태인 정서가 고개를 들고 있고, 화려하게 복귀한 가톨릭교회는 폴란드 정치와 사회 전반에 걸쳐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다. 동유럽 개혁의 선두주자인 헝가리에서는 집권당의 극우노선을 둘러싸고 공방전이 한창이며 각 지역에서 신나치를 표방하는 극우주의자들의 외국인 공격이 그치지 않는다. 차라리 부족주의라고 표현하는 게 더 어울릴 편협한 민족주의 만연, 신나치주의 창궐, 종교적 근본주의 부활 등의 부정적 용어가 오늘날 동구권 현실을 잘 설명해준다.

 이 우울한 현실의 밑바닥에는 빛바랜 공산주의의 그림자가 자리잡고 있다. 40여년간 무소불위의 권력을 행사해 온 공산주의의 숙명적 유산이 이제 갓 걸음마를 시작한 동유럽 민주주의를 위협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표방한 공산주의가 이 땅에 남겨준 유산은 국가지상주의라는 이름의 거대한 관료지배 정치 문화이다. 전통적으로 동유럽권에서는 국가의 주도적 역할이 강조되어왔는데 공산주의는 당을 정점으로 한 국가조직을 확고하게 발전시켰다. 모든 결정은 당 조직을 근간으로 이루어졌고 시민의 자율적 의사에 기초한 시민사회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동유럽 개혁주도세력이 처음으로 부딪힌 문제는 바로 국가의 역할을 얼마만큼 줄일 수 있겠느냐 하는 점이었다. 그러나 시민사회가 전혀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체제개혁을 시작하고 보니 또다시 국가가 주도적으로 끌고 나갈 수밖에 없게 됐다. 이 때문에 개혁세력은 다시 관료주의를 끌어들이게 되고 권력 집중체제에 대한 미련을 떨쳐내지 못한다. 새 정부는 사유화 작업의 초기단계부터 시시콜콜 개입했다. ‘조합주의’라고 불리는 정경유착은 관행이 됐다. 정부의 정책을 견제할 수 있는 시민사회가 채 형성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나마 야당세력마저 사분오열이다.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의 패배는 바로 국가의 역할을 줄이는 대신 시민사회를 키워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지키려 한 개혁세력의 패배였다.

 정치가들은 권력연장의 수단으로 민족감정을 자극하는 선동정치를 마구 펼친다. 피폐한 경제와 서방세계의 물질적 풍요 때문에 심한 상대적 박탈감과 굴욕감을 느끼는 동유럽권 국민에게 정치가들은 ‘민족주의’라는 보상심리에 호소하여 큰 효과를 얻고 있다. 클라우스 체코 총리와 매치아르 슬로바키아 총리는 각각 민족주의를 업고 권력의 정상에 선 정치가라는 점에서 그 전형을 보여준다. 두 사람은 대다수 국민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협상을 통해 연방 분리를 시도하고 있다. 시민사회와 자유민주주의의 함수관계를 말해준다.

보수세력 반대로 극우주의 돌풍엔 한계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이른바 ‘범 세르비아 민족주의’로 포장한 전쟁을 통해 떨어질 대로 떨어진 국민의 지지를 겨우 회복할 수 있었다. 크로아티아의 루디만 대통령도 이 점에서 밀로세비치와 별로 다를 바 없다. 폴란드 자유노조의 영웅 바웬사는 대통령이 되면서 같은 경향을 답습하고 있다. 헝가리의 요제프 총리는 대통령책임제에서의 대통령 못지않은 권력집중을 꾀하고 있다. 루마니아의 일리에스쿠 대통령 역시 공산당 시절의 조직전문가답게 권력의 끈을 늦추지 않는다.

 동·서유럽은 이처럼 한편으론 극우주의에, 다른 한편으로는 민족주의를 앞세운 선동정치에 시달리고 있다. 부다페스트 출신 동유럽권 전문가인 조지 셰플린 런던대 교수는 “서로 등을 돌린 채 민족 간의 증오심만 키워가고 있는 동유럽의 현실을 넘어서기 위해서는 교육을 통한 시민사회의 성장이 절실히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정치지도자들의 의식개혁이 선행되지 않으면 지금의 혼란은 더 계속될 것이다.

 독일을 비롯한 서유럽 몇몇 나라에서 확산되고 있는 극우주의 물결은 외국인 망명자 처리문제 등에서 기존 정치권이 새로운 논의를 하도록 만드는 계기가 되었다. 극우주의가 결코 단순한 외국인 적대 현상이 아니라 각 국의 사회구조적 문제와 국제적 문제가 서로 깊이 얽혀서 나타나는 것이라면 제반 문제의 해결 없이 이같은 추세는 더욱 강화될 수 있다. 그에 따라 서유럽 사회의 전반적인 우경화도 가속화할 것이다.

 세계 다른 지역과 달리 서유럽에는 아직도 강력한 사회민주주의 세력과 노동조합이 버티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존 보수정당이 한결같이 극우주의를 반대하고 있어 서유럽의 기존 정치판도에 돌풍을 일으키기에는 일정한 한계가 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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