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랑총회 ‘유람’으로 둔갑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1.10.24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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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해상 측 언론 업고 “동거·혼숙·임신” 등 노조원 매도

 지난 6일 오후 서울 여의도백화점 1층 로비에서 갑자기 큰 소동이 벌어졌다. 한 50대 남자가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의 머리채를 잡고 마구 때리며 밖으로 끌고나가려 하는 것이었다. 여자는 울며 바닥에 큰 대자로 드러누워 끌려나가지 않으려고 버티었으나 끝내 밖으로 끌려나와 백화점 앞에 대기하고 있던 차에 실려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다.

 인신매매의 현장이 아니라 회사측과의 임금 협상 결렬로 한달이 넘게 회사 밖 총회를 계속하고 있는 현대해상화재보험노조의 조합원을 부모가 찾아와 집으로 데려가는 장면이다.

 현대해상노조는 지난단 7일부터 설악산 부산 경주 대전 등지를 떠돌아다니며 총회를 계속하다가 지난 5일 다시 서울로 돌아와 여의도백화점 6층에 자리잡은 민주당사에서 농성을 벌였다. 하지만 밖으로는 과소비 유람 총회라는 언론의 집중포화를 맞고 안으로는 속속 이탈자가 생겨나 노조의 존립 자체가 위태로운 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서울을 떠날 때만 해도 6백여명을 헤아리던 총회 참석인원이 한달여가 지나자 1백여명으로 줄어들었다. 사업장 이외의 장소에서 쟁의를 벌인 혐의로 사전 구속영장이 발부돼 홍순계 위원장과 서정록 사무국장은 언제 검찰에 구속될지 모르는 처지이며 노조 핵심간부 등 32명은 회사 인사위원회에 회부돼 무더기로 해고될 위기를 맞고 있다.

 그동안의 언론보도대로라면 노조가 본분을 망각하고 ‘돈을 물 쓰듯’하면서 관광지만 골라다니며 ‘투쟁을 즐겨왔기 때문에’ 당연한 귀결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민주당사에 남아 고립된 총회를 계속해야 했던 노조의 1백여 조합원들은 할 말이 많다.

“당신 딸이 유부남과 동거, 임신했다”
 위원장 홍순계씨는 “회사측은 처음부터 노조와 정상적으로 단체교섭을 할 마음이 없었다. 노조의 사복착용 출근 등 준법투쟁을 폭력을 써 저지하면서 노조를 회사 밖으로 내몰았다. 총회를 열려고 하면 총회장마다 압력을 넣어 조합원들이 설 땅이 없도록 만들었다. 총회장을 구하지 못해 대규모 숙박시설이 있는 곳으로 떠돌아다니자 이번에는 언론을 매수해 유람 총회라고 매도하도록 했다”고 분통을 터뜨렸다. 홍위원장은 또 “언론의 횡포가 얼마나 심한지 이번에 절실히 깨달았다. 자기들도 눈이 있으면 보고 귀가 있으면 들을 수 있었을 텐데 어렵사리 밥을 해먹고 새우잠 자면서 떠도는 우리들을 보고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과소비한다고 질타 할 수 있는지 어처구니가 없다. 언론의 말장난에 우리 6백여명의 조합원들은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고도 주장했다.

 지방의 한 지점에 근무한다는 ㄱ씨는 “우리 노조는 현대왕국에 최초로 노동조합의 깃발을 올렸다. 그래서인지 우리 회사는 부당 노동행위의 박물관이라고 불릴 정도로 조합원에 대한 탄압이 심했던 곳이다. 회사가 언론을 등에 업고 이번 기회에 눈엣가시 같은 조합을 와해시키려 하고 있음이 틀림없다”고 얘기했다.

 여성 조합원들은 특히 “회사측이 온갖 비열한 방법을 동원해 부모와 자식, 직장 동료들간의 인간관계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조합원들에 따르면 회사측이 주로 여성 조합원의 집에 전화를 걸어 부모들에게 “당신 딸이 남자들과 혼숙하며 문란한 생활을 하고 있으니 머리채라도 잡아 집으로 끌고가라”고 얘기했다는 것이다. 그런 얘기를 들은 부모들은 대기 즉시 총회장으로 달려와 앞 뒤 가리지 않고 조합원들에게 욕을 퍼붓고 달을 강제로 집으로 끌고가게 마련인데 많은 여성 노동자들이 그같은 꼴을 당했다고 한다. 심지어는 웬 여자로부터 “당신 딸이 유부남인 내동생과 동거해 임신까지 했다”는 말을 듣고 새파래져서 총회장에 ‘난입’한 부모도 있었다고 한다.

 조합원들은 회사측이 이밖에도 “당신 자식이 지금 빨갱이 교육을 받고 있다. 조금 있으면 부모도 몰라보게 될 것이다” 등의 악선전을 했다고 주장한다.

 서울 모지점의 신입 여사원인 조합원 ㅊ씨는 “자기들도 딸자식을 기를텐데 어떻게 딸가진  부모의 약점을 이용해 그같은 일을 저지를 수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다. 회사가 싫고 사회가 싫다”고 얘기하기도 했다.

이중삼중의 고통받는 조합원 부모들
 농성중인 딸을 ‘면회’온 한 50대 어머니는 “딸이 총회에 참석해 있는 동안 비슷한 전화를 하루 두세차례씩 받았다. 그같은 노력을 노사관계 개선에 기울인다면 해결되지 못할 일이 없을텐데 안타깝기만 하다”고 말했다.

 회사측은 조합원들이 입사할 때 보증을 서준 친지들에게까지 공문을 보내 ‘위협’했다고 조합원들은 말한다. 실제로 회사측은 지난달 총회에 참석중인 조합원의 신원보증인들에게 일제히 공문을 보내 “피용자가 업무상 불성실해 신원보증인에게 책임을 야기할 염려가 있어 통지하니 신원보증 계속 여부를 알려달라”고 통보한 바 있다. 이같은 통보를 받은 보증인들이 다그치는 바람에 부모들은 이중삼중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한다.

 그러면 회사측의 입장은 어떠한가. 회사측은 매우 느긋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이번 기회에 노조의 예봉을 완전히 꺾어놓겠다는 생각인 것 같다. 노사관계를 담당하고 있는 黃永俊 이사는 “노조는 하루빨리 불법파업을 풀고 회사업무에 복귀해야 한다. 만약 잘못을 인정하고 복귀한다면 징계에 있어서 최대한의 관용을 베풀도록 하겠다. 노조와 이 문제에 대해 협상하건 타협할 생각은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회사측 뜻대로 노조가 백기를 든다해도 회사측이 완승의 쾌재를 부를 게제만은 아닌 것 같다. 왜냐하면 회사측도 대가를 치러야 할지 모르기 때문이다. 민주당사에서 농성총회에 참여한 한 조합원은 “우리는 불행하게도 수많은 동료가 직장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게 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회사측은 일에 대한 사원들의 열정이 식어 큰 타격을 입는 것을 목격하게 될 것이다”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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