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쿄영화제 대상 수상 鄭智泳 감독
  • 김훈 편집위원 ()
  • 승인 2006.04.2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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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위질보다는 투옥을”


 정지영 감독의 <하얀전쟁>이 도쿄영화제에서 그랑프리(작품상)와 감독상을 수상한 일은 한국 영화 1세기 속에서 가장 높은 금자탑으로 꼽힌다. 이번 도쿄영화제에는 세계 42개국에서 자부심을 갖는 영화 2백36편이 출품됐고 그중 15편이 본선에 진출했다. <하얀전쟁>의 수상소식은 외국영화 직배로 시장을 빼앗기고, 음란 저질 시비로 관객으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는 한국영화계의 회생을 알리는 복음처럼 들려왔다. 정지영 감독의 고난과 그가 이루어낸, 그리고 이루어야 할 세계를 들여다본다.

 그동안 한국의 현실 속에서 영화를 만들어오면서, 또 외국영화 직배를 반대하다가 투옥되면서, 가슴에 맺힌 한이 많을 줄 압니다. 큰 상도 받았으니 포한진 사연을 털어놓으시지요.

 내가 일관되게 절규해온 것은 검열을 철폐하라는 것입니다. 작품이 실정법에 저촉되어 법률적으로 문제가 된다면 차라리 감독을 투옥시켜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전에 필름에 가위질을 하는 폭력을 이제는 제발 그만두어야 합니다. 또 “검열이 아니고 심의”라고 주장하면서 사실상 ‘검열’을 하는, 이런 짓거리를 당장 그만두라는 것입니다. 심의는 미성년자 관람여부를 결정하는 행위로 그쳐야 합니다. 심의를 한다고 가위질을 하는 것은 검열입니다.  예술품이 최종적으로 가위를 쥔 자들에 의해 재단된다는 제도는 견딜 수 없는 것입니다. 가위를 쥐고 있는 검열기관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작가의 상상력을 위축시키고 예술활동을 주녹들게 합니다. 그 악폐는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합니다.

 정부가 ‘검열’인지 ‘심의’인지를 계속하는데는 저질 영화를 양산해온 영화인들 자신의 책임도 있지 않겠습니까.

 영화시장은 어느 나라고 삼류 영화와 일류 영화가 공존하기 마련이고, 그것이 영화가 산업으로서 존재하는 올바른 모습입니다. 또 그것은 영화산업의 경제적 구조를 지탱해주는 힘인 것입니다. 이것을 인정해야 합니다. 삼류 영화는 삼류로서의 사회문화적 기능이 있는 것입니다. 지금, 수입되는 외국영화는 막대한 돈을 들여서 고르고 골라서 사오는 영화들입니다. 그 영화와 국산영화를 비교하니까 국산영화는 ‘저질’만을 양산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요. 그러나 영화의 선진국들에도 저질영화는 넘치고 넘쳐납니다. 지금 외국영화 직배 이후 한국영화인들은 비상한 각오로 제작에 임하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이 땅에서 영화를 만들어서 외국의 저 막대한 자본과 기술과 체험을 바탕으로 한 영화들과 싸워서 살아남을 수 있느냐를 결판내야 하는 국면으로 접어든 것이지요. 정부의 검열인지 심의인지를 철폐해서 한국 영화의 이 마지막 한판 싸움을 도와주어야 합니다.

 작품이야기를 해봅시다. <하얀전쟁>은 안성기(극중 한기주)가 이경영(극중 변진수)를 쏘아 죽이고 나서 땅에 몸을 눕히는 장면으로 끝나고 있지요. 이 장면에서 안성기가 그토록 몸에 힘을 빼고, 무중력 상태의 평화를 연기하게 되는 것은 어떤 연출의도에서 나온 장면입니까?

 안성기가 이경영을 쏘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쏘는 행위입니다. 인간의 죄악과 그 죄악 앞에서의 무기력, 이런 것들과 결별하는 행위이지요. 그러나 이런 구도는 너무나 황당하고 자칫 과장되기 쉬운 것이어서, 참으로 연출해내기가 어려웠습니다. 나는 방황, 고뇌, 죄악, 무기력, 생의 불가능, 이런 것들과 결별하는 인간의 모습을 격정이 아니라 냉엄함으로 표현함으로써 이 마지막 난관을 돌파해나가기로 했지요. 그래서 안성기의 몸에서 힘을 빼게 된 것이지요.

 라스트 신에서 안성기의 표정연기는 너무나도 비논리적이던데, 그렇게 설정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비논리적이라기보다는 복합적이라고 말해주십시오. 나는 그릇된 삶을 청산하고, 자신을 혹은 자신의 분신을 쏘아 죽이고 갱생하는 인간의 행위가 논리적인 행위일 수는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거기에는 무력감과 힘, 슬픔과 희망, 불안과 확신이 모두 섞여서 들끓게 마련이고, 그것이 실존의 정직한 모습일 것입니다. 안성기가 그 모든 것이 뒤섞인 표정연기를 하면서 몸을 그토록 평화롭게 눕혀 줄 때 감독인 나는 참으로 행복했습니다. 나는 안성기 얼굴의 그 복합성, 그 비논리성을 향하여 OK, OK를 연발했습니다. 안성기는 이런 어려운 부분을 아주 능숙하게 돌파해나갑니다. 최고지요. 하늘을 보고 눕겠다는 것도 안성기의 제안이었습니다. 그래서 안성기와 나는 삶의 귀결이 논리성에 빠지거나, 격정으로 과장될 수 있는 함정을 벗어날 수 있었지요. 이런 고요함은 아우성보다 더 설득력이 있을 것입니다.

 안성기는 몽상적인 분위기와 현실적인 분위기가 뒤섞여 있는데, 이런 연기자를 지휘해서 계통있는 메시지를 끌어내려면 매우 어려울 것이라는 생각이 드는데요.

 안성기는 상황에 따라서 자신의 수많은 분위기들 중에서 어느 부분을 돌출시켜야 하는지, 여러 분위기들을 어느 정도의 비율로 섞어내야 하는지를 스스로 알고 또 행위하는 연기자입니다. 안성기하고 일하는 건 어렵지 않아요.

 극중에서 안성기와 이경영이 시위학생들 속에서 딩굴면서 절규하는 장면은 현실의 폭압에 맞서는 인간의 의지와 지향성을 부인하고, 단지 개인화된 사적 고통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느낌을 주었습니다.

 그 학생시위는 하나의 군사독재정권이 또다른 독재정권으로 교체되는 시점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이 장면을 통해서 나는 권력의 야만성에 짓밟히는 인간의 고통을 고통 그 자체로서 순수하게 보여주려 했습니다. 고통의 내면과 외양을 정확히 보여주는 것이 감독의 일이고, 인간에게 그런 고통을 강요하는 현실에 항거해야 한다는 의식의 자연스런 집결은 관객의 몫일 것입니다.

지금까지 월남전을 다룬 외국 영화들이 국내에서 큰 인기를 모았는데 정감독은 이 영화들을 어떻게 평가하고 계십니까?

 <지옥의 묵시록>은 전쟁의 광폭성과 인간의 광기를 성공적으로 그려냈지만 거기에서 그치는 영화입니다. <플래툰>은 미국 국민의 국가주의 의식을 과감히 떨쳐버리고 전쟁의 본질에 접근한 점이 뛰어나지만, 선천적인 전쟁 미치광이들이 등장함으로써 작품의 객관성과 설득력을 잃고 있다고 봅니다. <디어헌터>는 뛰어난 영상을 인정해야 하지만, 미국 국민의 국가주의 의식이 강하게 작용함으로써 국책영화 수준에 머물고 말았습니다.

<하얀전쟁>이 그런 외국영화들과 달리하고 있는 시각은 어떤 것입니까?

 <하얀전쟁>은 한국인의 시각이 살아 있는 영화라고 자부합니다. 즉 강대국과 약소국이 싸우는 전쟁판에 강대국 쪽의 용병이 되어 참전하는 또다른 약소국 국민의 시각으로 전쟁의 본질을 영상화했습니다. 결국 <하얀전쟁> 안에서는 한국전쟁과 월남전쟁이 오버랩되고 있는 셈이지요. 한국군 병사들이 베트남 원주민들에게 심정적 동일성을 느낀다거나, 한국군 병사들이 유년시절에 겪은 전쟁 기억이 도출되는 것은 그런 시각을 영상화하기 위한 의도였습니다.

<하얀전쟁> 속에 헬리콥터가 두 대 밖에 안떠서 안스러운 생각이 들었습니다.

 말도 마세요. 처음에 30대 정도를 띄울 생각이었지요. 현지에 가보니까 미군이 남기고 간 헬리콥터 중 쓸만한 것을 모두 징발해서 캄보디아로 보내버린 후였습니다. 썩은 고철들만 남아 있더군요. 그걸 뒤져서 괜찮다 싶을 걸 두대 고른 다음 수리를 해서 겨우 띄운거예요. 이 헬기가 찰영장소까지 날아오질 못해서 트럭에 싣고 왔어요. 그 고철에 연기자들을 태우려니, 참 속 터지더군요. 연기자들이 무서워서 안타려고 했어요. 결국 안성기가 먼저 타니까 다들 따라 타더군요. 카메라는 민간 헬기에 싣고 뒤따라 갔지요.

<남부군>은 오랫동안 금기로 되어왔던 지리산 공산유격대를 주제로 삼아 충격을 몰고온 영화였습니다. 그런데 <남부군>은 많은 청년들이 총을 들고 입산할 수밖에 없는 사회·역사적, 개인사적 필연성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그 점이 허전하게 느껴지더군요.

 그렇습니다. 그 점은 저도 지금까지 허전합니다. 저는 그 부분을 영상으로 드러내기보다는, 영화의 전제로 삼고 시작한 것입니다. 그 부분을 보완하자면 또 한편의 영화를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어쨌든 허전한 일이지요

<남부군>에서는 왜 남부군 사령관 이현상을 영상의 표면에서 제외시켜버렸습니까? 그 점도 허전합니다.

 내가 영화감독으로서 파악해낸 이현상이란 인물은 진정한 사회주의자지만 너무나도 인간적인, 즉 인간다운 연민과 약점이 많은 리더이기 때문에 혁명가가 될 수 없는 인물입니다. 나는 이런 인간을 사랑합니다. 그러나 이현상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는 상황에서 그를 영상의 중앙부로 끌어올린다는 것은 위험한 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대체로 사회·역사적인 주제를 다루는 정감독의 영화는 작품이 내세우고 있는 휴머니티가 때때로 허무주의로 침몰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을 갖게 하더군요.

 <하얀전쟁>이나 <남부군>의 라스트신에 그런 비판을 받을 소지가 담겨져 있다고 볼 수도  있을 겁니다. 시대의 고통과 폭압을 개인 속으로 내면화시키고 그것을 극명하게 표출하는 것은 결국 인간역사에 대한 허무감밖에 더 되겠느냐. 이런 비판일테지요. 그러나 그 영상 속에는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모습까지도 분명히 들어있다고 저는 자부하고 있습니다. 또 그것이 만일 허무주의에의 침몰이라 할지라도, 그 허무를 통해 폭압을 고발하고 반성과 개혁의 진정성을 불러일으킬 수 있다면, 그 결과는 허무주의가 아니라 비전이라고 나는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회에 비전을 제시하기 위하여 감독이 할 수 있는 일은 비전이 실현된 모습을 영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쪽을 지향해야 한다는 간절한 필연성을 제시하는  곳에서 끝나야 합니다.

영화감독으로서의 자신의 위상을 어떻게 설정하고 있습니까?

 나는 보통감독입니다. 대중성을 지향합니다. 내 작품에 많은 사람이 몰려들게 하고 또 깊은 감동을 심어주는 것이 나의 목표입니다. 물론 올바른 대중성을 지향해야겠지요. 그런 점에서 나는 ‘작가’라기보다는 그야말로 ‘영화감독’인 것입니다. 나는 나 스스로 작가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작가라는 타이틀을 스스로 붙이기에는 이 땅의 영화현실이 너무나도 곤혹스럽지요. 가령 이탈리아의 미켈란젤로 안토니오니와 스웨덴의 잉그마르 베리만 또는 프랑스의 알랭 르네 같은 감독들은 그야말로 작가라고 할 수 있겠지요. 그들은 자기 자신만의 세계가 완벽하게 구축되어 있고, 그 세계를 이해하고 공감하는 소수의 관객들만을 향하여 발언합니다. 나는 그런 감독들을 긍정하고 존경하지만, 나 자신이 그쪽을 지향할 수도 없고 지향해서도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이 곤혹스런 현실 속에서 한국의 대중을 향해 영화를 만들 수밖에 없습니다.

<남부군> 이전의 정감독과 <남부군> 이후의 정감독은 역사의식에 어떤 전환이 있었습니까?

 그렇지 않아요. 내가 <남부군>을 계기로 해서 사회와 역사를 이해하는 의식에 무슨 큰 전환이라도 있는 것처럼 말하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감독은 이런 영화 저런 영화를 다 만들 수 있는 겁니다. 오락물, 멜로물도 ‘정당하다’ 싶은 것들은 만들 생각이에요. 감독은 오락물, 멜로물을 통해서도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또 이 척박한 현실 속에서 어떻게 해서든지 먹고 살아야 하는 인간이 어떻게 체제나 역사 전체를 비판하는 포즈로 용트림을 할 수 있겠습니까. 난 그렇게는 못해요. 다만 시대가 조금씩 좋아지고 있는 국면도 있으니까 거기에 힘입어서 용기의 폭을 조금씩 넓혀가는 것뿐이에요.

불문학을 전공하셨는데 ,영화공부는 언제했습니까?

 전 영화 미치광이였어요.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영화공부를 했어요. 그때 이범선 선생이 쓴 <오발탄>이란 소설을 읽고 어린 나이의 충격으로 쩔쩔 매고 있었는데, 유현목 감독이 이 소설을 영화로 만들었지요. 그걸 가서 보고 나서 난 영화감독이 될 수밖에 없었지요. 그래서 <오발탄>의 시나리오를 구해다 읽었지요. 아, 그때의 그 개안! 그때부터 학생입장불가고 뭐고 영화란 영화는 모두 보고 다녔지요. 불문과를 선택한 것도 프랑스 영화에 접근하기 위한 의도였지요. 팔자라고 할 수밖에 없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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