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이 숨통을 죈다"
  • 아바나.김창용 (자유기고가) ()
  • 승인 1991.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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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트로 정책자문관 엔리게 발타르 로드리게즈 교수

한국 기자에게는 관광비자만 주어지는 쿠바에선 어떤 공식적인 회견도 할 수 없도록 되어 있다.  기자도 관광비자를 받았으나 쿠바 국영텔레비전(NTV)미구엘 토머스 기자와 ‘카라비안 어드벤처' 노르웨이 여행사 사장 로어 한센의 도움으로 학자라기보다는 오히려 정부요인 냄새가 더 진한 아바나국립대학 역사학 교수 엔리게 발타르 로드리게즈씨(31. 아시아역사 전공)와 공식회견을 할 수 있었다.

  엔리게 교수는 피델 카스트로의 최연소 정책자?관이자 사회과학대학 최연소 학장으로 재임중이다.  카스트로가 이 대학 정치학과 출신인 탓도 있지만 아바나국립대학은 쿠바 엘리트의 산실로서 정부의 적극적인 지원을 받고 있다.  10월중 북한정부의 초청으로 평양을 방문할 예정이라는 엔리게 교수는 “남한에서 왔다" 는 기자의 말에 처음에는 의아해 하고 당혹스런 표정을 지었으나 끝까지 충실하게 인터부에 응해주었다.

  인터뷰는 지난 9월28일 시내 중심가에 있는 아바나국립대학 정문 앞에 별채 형식으로 지어진 교수휴게실에서 이루어졌다.  다음은 엔리게 교수와의 일문일답 내용이다.

  최근 쿠바주둔 소련군 철수절차에 대한 구체적인 논의가 양국간에 이루어질 것이라는 보도가 있었는데 쿠바정부는 어떤 대안을 가지고 있습니까?
  그것은 소련의 일방적인 철군 구상안이었습니다.  우리와는 사전협의가 전혀 없었던 것으로 이 점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유감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소련군의 쿠바주둔은 병력의 화력보다 상징적인 의미가 더 큽니다.  사실 1만1천여명의 소련 군사고문단이 떠난다고 해서 당장 쿠바 자체방위에 구멍이 뚫리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보다는 오히려 미국의 끊임없는 위협을 받고 있는 쿠바에 소련군이 주둔한다는 사실은 소련과의 우호와 동맹을 뜻하는 상징이 되어왔습니다.  지난 60년대초 ‘쿠바 미사일 위기' 때도 소련은 우리와 사전협의없이 일방적으로 미사일을 철수해버렸습니다.  강대국이 약소국의 의사를 무시하는 일은 국제사회에서 흔히 이쓴 일이지만 이번 만큼은 문제가 조금 다릅니다.  왜냐하면 쿠바 남쪽 구안타나모에 여전히 미 해군기지가 존속하고 있으며 수천명의 미군이 우리의 안전을 위협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소련대통령, 조지 부시 미국 대통령, 제임스 베이커 미 국무장관 어느 누구도 쿠바 내 미군 철수는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구안타나모의 미군기지는 소군철수와 연계시켜야할 것입니다.  그렇지 않을 경우 소련군이 철수해도 미군은 남아 있을 것이니까요.  소련군 철수결정은 사실상 미국의 쿠바침공을 묵인 하겠다는 정치적인 뜻으로 해석해도 무방합니다.  미국의 향후 공작이 어떤 식으로 꾸며질지에 대해 쿠바 국민들은 긴장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소련은 불발 쿠데타 이후 대외노선에 많은 변화를 추구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쿠바와 소련의 관계는 어떤 형태로 정립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까?
  소련은 현재 산적한 국내문제로 정신이 없습니다.  특히 경제난에 허덕이고 있어 서방에 계속 손을 내밀고 있는 형편이지요.  소련이 우리와 이처럼 관계가 악화디고 있는 것도 실상은 미국의 집요한 쿠바 고립정책의 결과에 다름 아닙니다.  말하자면 미국 달러의 위력 앞에 소련이 무릎을 끓은 셈이 됐습니다.  당분간 소련과의 관계는 현실적이지 못하겠지만 단교까지 가는 상황은 없을 것입니다.

  부시 미국대통령이 얼마전 백악관회견에서 “카스트로시대는 끝났다.  쿠바에 민주주의를 정착시켜야 할 때가 카스트로가 예상하는 것보다 훨씬 빨리 왔다??는 발언을 했습니다.  앞으로 미국과의 관계는 어떤 방향으로 나갈 것으로 보는지요?
  부시는 쿠바에 동유럽식의 체제변화가 일어나길 기대하고 있습니다.  코앞에 위치한 쿠바에 대해 미국은 지난 30년간 피그만 침공을 비롯, 직·간접적인 침략을 일삼으며 우리를 식민지화하려고 안간힘을 써왔습니다.  이 시간에도 쿠바 경제파멸의 공작은 계속되고 있습니다.  구체적인 사례를 얘기하겠습니다.  최근 쿠바의 관광 확장사업도 미국의 훼방으로 제대로 진척되지 못하고 있는 형편입니다.  얼마전 스페인의 타바 칼레라그룹이 쿠바 여행사와 사업을 최종 성사시킬 단계에서 미국이 개입, 불발로 끝나고 말았습니다.  또 브라질의 바스프항공사도 쿠바나에어(쿠바국영항공사)와 합작을 논의하던 중 미국의 압력으로 도중하차해야만 했습니다.  미국의 이런 ‘장외 장난??이 계속되는 한 관계개선은 기대하기 힘듭니다.  미국과의 관계는 전과 같은 갈등과 마찰이 오히려 심화되어 쿠바로서는 시련기를 맞이할 것 같습니다  그러나 쿠바는 쿠바식의 사회주의체제를 지켜나갈 것입니다. 

상점의 텅빈 진열대나 가게 앞에 늘어선 시민들의 모습에서도 이미 쿠바가 경제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처지에 있음을 쉽게 읽을 수 있습니다.  국민들에게 내핍생활을 호소하는데도 한계가 있지 않겠습니까?
 의료 생필품 등이 부족한 것은 사실입니다.  국민이 어려운 생활을 하고 있는 것도 보신 그대로입니다.  그러나 현 정부는 이 문제를 점차 풀어나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외부 세계에서 기대하는 그런 동유럽식 체제격변이 아닌 쿠바식으로 말입니다. 

쿠바식이란 구체적으로 뭘 의미하는지요?
 한 예를 들겠습니다.  한국의 노태우 대통령은 정부가 개혁적인 조처가 필요하다고 판단했을 때 어떻게 합니까.  아마 국내사회의 변화와 상황을 먼저 분석한 다음 개혁의 방법과 정도를 결정할 것이 아닙니까.  쿠바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강조하지만 동유럽에서 사회주의가 끝장날 것처럼 기대하면 큰 오산입니다.  개혁이 있다 하더라도 쿠바는 사회주의 내에서 이루어질 것입니다.

거리 곳곳에는 정복 혹은 사복차림의 경찰들이 일반시민들의 동태를 감시하고 있어 국민들이 제대로 불만조차 토로할 수 없다는 얘기가 들리고 있더군요.
 아주 재미있는 지적이군요.  나는 소련 인도니카라과 앙골라 등의 나라를 가보았는데 어느 거리에도 경찰들이 쉽게 눈에 띄었습니다.  문제는 경찰의 숫자보다 그들의 업무성격과 태도일 것입니다. 한국에서는 경찰이 학생을 죽이고 학생들은 경찰에게 돌과 화염병을 던지는 불상사가 비일비재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게 사실인지 반문하고 싶습니다  이곳의 경찰은 시민 감시가 아니라 보호를 위해서 존재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싶습니다. 

쿠바는 북한과 오래전부터 대사급 외교관게가 수립되어 있는 맹방입니다.  그러나 이제 세계가 변함에 따라 한국과도 정상외교관계가 필요하다고 생각하지 않는지요?
 남북한이 최근 정식 유엔회원국이 되었으니 최선의 방법은 아니지만 유엔 내에서 쿠바는 자연스럽게 한국과 접촉을 갖게 될 것입니다.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가까운 미래에 한국과도 정상외교가 성립되기를 바랍니다.  그러나 문제는 쿠바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미국의 강한 입김 아래 놓여 있는 한국정부쪽에 있다고 생각해요.  쿠바가 외교관계뿐만 아니라 무역교류를 원한다 하더라도 미국이 한국의 외교노선에 제동을 걸 것이란 짐작은 어렵지 않습니다.  특히 미국의 눈엣가시로 비치는 쿠바와의 관계에서는 더욱 그럴 것입니다.

티델 카스트로의 건강상태는 어떻습니까?  앞으로 얼마나 더 집권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보는지요?
 피델 사령관(대통령이자 군최고사령관이다)은 지난 8월 64세 생일파티를 가졌습니다.  어릴 때부터 목이 좀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으나 여전히 수영 테니스 다이빙 등으로 건강관리를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쿠바국민들이 원하는 한 그는 계속 우리들의 지도자로 일할 것입니다.

북한은 어떤 자격으로 무엇 때문에 가는지요? 김일성 주석도 만날 예정입니까?
 교수 자격으로 역사 연구차 가는 것입니다.  약 한달 정도 체류할 예정인데평양 청진 등을 둘러볼 계획입니다.  김일성 주석은 만나게 될지 아직 모르겠습니다.

아바나국립대학에서 공부하는 북한학생들이 상당한 수에 이르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몇 명 정도며 주로 무슨 공부를 하고 있는지요?
 정확한 수는 모르겠지만 최소한 수십명은 됩니다. 주로 영어 스페인어 등 어학을 공부하고 있는데 상당히 공부를 잘한다고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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