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다만 윤리의 붕괴
  • 이세용 (영화평론가) ()
  • 승인 1991.10.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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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마는 오지 않는다

감독: 장길수
주연: 이혜숙. 김보연

 한국동란이 터졌어도 전쟁소식을 풍문으로만 짐작하는 산골. 밤나무골집 젊은 과부 언례는 아들 만시과 젖먹이 딸을 데리고 살아간다.  이 평온한 마을에 유엔군이 들어오고 끔찍한 사건이 발생한다.  미군병사 두명에게 언례가 겁탈을 당한 것이다.  이 사건이 있고난 뒤, 주민들 사이에는 미묘한 집단심리가 형성되어 언례에게 동정을 보내는 대신 등을 돌리게 된다.  아들인 만식도 제 또래들에게 따돌림을 받는 다.  이러한 마을사람들에 대한 분노와 생계의 위협 때문에 언례는 결국 양공주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언례의 급작스런 변모와 주민들의 손가락질 속에서 혼란을 겪던 만식은 어느날, 자신을 놀려대는 아이를 권총으로 쏘려다 오히려 제 손가락 두 개를 잃는다.  이어 닥쳐온 중공군의 개입과 유엔군의 후퇴로 마을사람들은 피난을 떠난다.

 《은마는 오지 않는다》. 안정효의 장편소설과 이를 각색, 연출한 장길수감독의 영화는 줄거리 면에서 거의 같다.

  원작은 동족간의 전쟁이 빚어내는 비극과 외세의 개입으로 어느 산골마을이 겪는 고난과 이를 통한 전통 윤리의 상실을 민족적인 비극으로 확대시키고 있다.  영화 역시 이러한 의도를 바탕에 깔고 있지만 소박한 언례가 미군에게 겁탈당하는 데서부터 양공주가 되기까지, 그리고 양공주로 나선 이후의 구체적인 몸짓을 비중있게 묘사하고 있다.

  데뷔작 〈밤의 열기 속에서〉이후 장감독은 양키문화의 부정적인 영향을 그려내는 대목에서 두드러진 솜씨를 보였다.  〈아메리카 아메리카〉〈추락하는 것은 날개가 있다〉의 몇장면은 그의 영화에서 뛰어난 부분에  속한다.  그러나〈은마…〉에서 자주 보여주는 남녀관계 묘사는 주제를 선명하게 부각시키기 보다 오히려 약화시키는 쪽으로 흘렀다.

  언례는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성을 팔게 되는데 ‘영화??는 무엇 때문에 성묘사에 매달리고 있는 것일까.  외세가 개입되고 미군이 등장하면 영화는 저절로 사회성을 보장받는 것인가.  양공주와 미군들과의 섹스장면에서 거듭되는 쑥스러운 동작과 소리는 전통적인 가치관과 윤리가 무너지는 아픔??을 그리려다가 도리어 성의 그물에 갇혀 버린 느낌을 갖게 된다.

  이 영화는 좋은 소재, 뚜렷한 주제를 선택했을지라도 예술적 상상력이 발휘되지 못한다면 어떤 결과가 나타나는지를 잘 보여준다.

  연출자가 관객을 설득하기 위해 대사를 확정하고 화면구성에 몰두할 때 필요한 것이 예술적 상상력이다.  이러한 상상력의 결핍 때문에 〈은마…〉는 의욕이 앞선 영화로 그치고 말았다.

  〈은마…〉가 충격적인 영화라는 점에서는 다른 의견이 없다.  다만 문제는 이 충격이 완성도가 부족한 상태, 표현의 거칠음에서 비롯된다는 점이다.  몬트리올 여화제 여우주연상 수상은 알몸으로 고생한 이혜숙의 노고에 값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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