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검 쥔 민정계 “큰 칼 차고싶다”
  • 문정우 기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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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ㆍ도지부장, 권한 강화 요구

김윤환 의원이 8월28일 돌아왔다. 8ㆍ2 보선 직후 출국했으니까 근 한달 만이다. 그는 귀국 기자회견에서 경북도지부장에 내정된 것에 반발했다는 소문을 일축하고 “내년 선거에서 당이 좋은 성과를 얻게 하기 위해 총력을 다하겠다”라고 밝혔다. 그리고 “이제 32년 집권 세력(구 여권)에 대한 검증 기간이 끝나고 문민정부에 참여할 시기가 됐다”라고 선언했다.

 그의 말은, 정호용ㆍ이한동 의원 등을 포함해 이른바 민정계 중진을 기용한 이번 민자당의 시ㆍ도 지부장 인사에 대한 민정계의 정리된 의견이라고 할 수 있다. 간단하게 말해 이번 인사를 구 여권 인사들에 대한 정치적 사면 조처로 받아들이겠다는 것이다.

‘사면’받은 민정계 중진들 “그래도 찜찜”
 시ㆍ도 지부장과 당무위원을 개편한 이번 민자당의 인사는 당 중진들에게 마음껏 경쟁할 기회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인사로 그동안 권력에서 소외됐던 민주계 민정계와 실세들이 모두 당으로 돌아왔다. 민주계에서는 김덕룡 의원이 정무장관 퇴임 후 8개월 만에 서울시지부장 자리를 맡았으며, 서석재 전 의원이 5년 간의 정치 방학을 마치고 당무위원에 선임됐다. 민정계에서는 김윤환 의원이 경북도지부장, 정호용 의원이 대구 시지부장을 맡게 됐다. 이로써 김영삼 정부가 출범한 이후 처음으로 민자당 실세들이 청와대ㆍ정부ㆍ민자당에서 각각 한자리씩 차지하고 앉아 경쟁할 수 있게 됐다.

 김덕룡 의원이나 서석재 전 의원의 복귀는 예견된 것이었지만, 김윤환 의원 등 민정계의 복귀는 사실 8ㆍ2 보선 전만 해도 불투명하기 짝이 없었다. 재산 공개와 대대적인 사정을 거치면서 민정계의 입지는 형편없이 위축됐다. 하루아침에 구정물을 뒤집어쓰고 축출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악몽에 시달려야 했다. 최근까지도 대대적인 물갈이설이 나돌아 긴장을 풀 수 없었다. 새로운 조직책 선정이나 보궐선거 공천 후보를 결정할 때마다 신문을 보고서야 내용을 알 수 있으리만큼 당무에서 철저하게 소외됐다.

 김윤환 의원은 이번 인선을 대구ㆍ경북 출신에 대한 사면 조처로 해석하고 일단 반기는 모습을 보였지만, 민정계로서는 찜찜한 구석이 없지 않다. 우선 자기들을 기용한 것이 이번 인사의 본질인 것처럼 보이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어떻게 보면 이번 인사는 민주계를 위한 잔치였다고도 할 수 있다. 이번 인사로 상도동계 가신들이 전원 당정 요직에 전진 배치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번 인사는 그동안 서로 물밑에서 견제하며 사분오열 양상을 보이던 민주계가 단합한 결과라고 볼 수도 있다. 그렇다면 김윤환 의원 등 민정계는 김덕룡 의원이나 서석재 전 의원의 화려한 복귀를 위해 들러리를 선 셈이다.

 그리고 마음에 걸리지 않을 수 없는 것이 시ㆍ도 지부장이라는 자리의 무게이다. 현재 시ㆍ도 지부장은 중앙당과 전국 2백37개 지구당의 연락책 노릇을 할 뿐이다. 당헌ㆍ당규에는 시ㆍ도 지부장의 권한이 명시돼 있지 않다. 그렇기 때문에 이 자리는 그동안 초ㆍ재선 의원들의 차지였다. 지난 대통령 선거때 민자당 대선 후보 경선에 나설 것을 검토했던 이한동 초우나 현재 민자당 대표를 꿈꾸고 있는 김윤환 의원에게는 일견 걸맞지 않는 자리로 비친다.

 엄밀하게 얘기하면 시ㆍ도 지부장은 3선인 민주계 문정수 총장의 직접 지휘를 받는 자리이기도 하다. 이번 인사는 보기에 따라서는, 3선인 민주계 총장 밑에 4ㆍ5선 민정계 중진들을 모두 앉혀놓은 이상한 모양새이다. 지난번 민주계 3선 총장(문정수), 민정계 4선 총무(이한동) 인사에 이어 민정계로서는 두번째 ‘수모’인 셈이다.

 민자당이 중진들을 시ㆍ도 지부장에 임명한 가장 중요한 이유는, 이들의 역량을 활용해 내년 지자제 선거에서 승리를 거두기 위한 것이다. 김영삼 대통령에 대한 중간 평가 성격을 띠고 있는 내년 지자제 선거에서 중진들은 역량을 검증받게 될 것이다. 선거 결과에 따라 정치적 미래가 밝아질 수도, 암울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김윤환 의원 등 민정계 중진들은 경쟁할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해서는 반기면서도, 과연 공정한 경쟁이 이루어질 수 있을 것인가에 대해서는 회의하는 것 같다. 애초부터 뻔한 경쟁을 시켜놓고 민정계를 아예 말살하려는 게 아닌가 하는 의심도 드는 모양이다. 그동안 대구ㆍ경북 지역에서 치른 세 차례 보궐선거에서 민자당이 모두 패했기 때문이다.

 김윤환 의원은, 귀국하는 날 공항에서 기자들이 그런 점을 염두에 두고 부담스럽지 않느냐고 묻자 “최선을 다해도 안되면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그래도 책임지라면 지면 되는 것이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발언권은 커져도 위상은 불면
 대구시지부장에 임명된 정호용 의원이 최근 ‘권한’을 달라고 목청을 높이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8월24일 당직 인사 뒤 처음 열린 당무회의에서 정의원은 “시ㆍ도 지부장의 권한과 책임 설정이 모호하다. 어떤 형식으로든 이를 명확히 해둘 필요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기왕 책임을 맡겼으면 특히 지방자치 단체장 선거 때 후보를 결정하는 일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도록 해달라는 주문이다. 여기에는 그동안 조직책 선정과 보궐선거 후보 결정에서 철저하게 소외돼온 민정계의 불만이 짙게 깔려 있기도 하다. 그동안 민정계는 ‘보궐선거에서 패한 것은 부분적으로는 대구ㆍ경북 정서 때문이지만, 근본적으로는 공천을 잘못했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해 왔다.

 권한을 달라는 요구에 대해 청와대와 중앙당은 매우 모호한 태도를 보이고 있다. 청와대의 한 고위 관계자는 “당헌ㆍ당규를 고쳐 권한과 책임을 명백히 할 수는 없지만, 책임이 무거워지면 자연스럽게 권한도 커질 것 아니냐”라고 말한다. 쉽게 말하면 발언권은 강화되겠지만 위상에 근본적인 변화는 없다는 얘기이다. 최종적인 판단은 김대통령이 하겠지만, 특히 시장ㆍ도지사 후보를 공천하는 일에서 시ㆍ도 지부장의 역할은 매우 제한적일 공산이 크다.

 여러 가지 불리한 여건에서도 정치적 재기를 위해 당으로 돌아온 민정계 중진들, 그리고 시행 착오를 되풀이하며 그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한계에 봉착한 민주계. 민자당은 이들의 부조화 속에서 내년 지자제 선거를 향해 무거운 걸음을 떼어놓고 있다.
文正宇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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