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일축제 열려야 할 냉전시대 ‘불신의 門’
  • 김종환 사회부차장 ()
  • 승인 1990.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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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전협정 조인 37주년 맞는 판문점

 휴전 37년. 협정 조인의 현장 판문점에 국내외의 관심이 쏠리고 있다.  팽팽한 긴장감 속에 대치해온 남과 북이 각각 이곳을 민족통일의 기틀을 닦는 시험장으로 삼겠다고 선언했기 때문이다.

  분단 45년을 맞는 오는 8월15일 공동경비구역의 북쪽을 개방해 ‘범민족대회’를 개최한다는 북한에 맞서 남한측이 8월13일부터 17일까지 닷새간을 ‘민족대교류의 기간’으로 선포함으로써 판문점은 민족의 광장으로 떠오르게 되었다.  선언대로만 된다면 이곳은 온 겨레가 자유롭게 왕래하는 분단 극복의 장이 될 것이다.

  2백50㎞ 휴전선에서 남과 북이 가장 가까이서 대치하고 있는 판문점은 냉전시대 최후의 유물이다.

  “양쪽 대표가 악수도 하지 않고 노려보듯이 마주앉아 자기주장만 내세우다가 뒤도 돌아보지 않고 헤어지는 회담은 여기서 밖에 볼 수 없을 것입니다” 유엔군사령부의 한국인 안내 책임자는 이렇게 말했다.

  남북으로 길게 뻗은 회의장 가운데 놓인 테이블을 가로지르는 군사분계선, 오직 실용만을 생각한 철제의자와 네모 반듯한 방의 구조.  군사정전위원회 본회의장은 회담이 없어 비어 있는데도 긴장이 감돌고 있었다.

  사람과 사람이 적대관계로 연출하는 회담장 분위기와 자연이 연출하는 판문점 주위의 분위기는 판이하다.  잘 닦여진 포장도로를 달리는 트랙터, 장마가 잠시 쉬는 틈 사이로 내리쬐는 햇살 아래의 푸른 들, 들일하는 농부와 하얀 두루미 등의 풍경은 판문점 언덕을 감싸고 있는 냉랭한 기류와는 너무나 대조적이었다.

  자유의 집 서쪽 1백50m 지점의 유엔군 제5초소에 서면 북쪽으로 개성 송악산이 보인다.  둥그레한 삼각형의 윤곽이 뚜렷한 저기, 임진각 망배단에 향수를 묻고 발길을 돌려야 하는 실향민들에게 저 산만은 보여주어야겠는데….

 

방문자 선언서엔 “목숨 잃을 위험…”

  눈길을 가까이 서쪽으로 돌리면 북의 선전마을 기정동이 보인다.  높이 1백60m의 국기대에는 가로만 30m라는 세계최대 규모의 깃발이 달려 있다.  사천강 건너 남쪽 대성동의 우리 국기대보다 60m나 높은 것이라 한다.  잔잔한 들판에 불쑥 솟은 5층 정도의 건물들도 남쪽을 의식하고 지은 듯이 보인다.

  ‘자유의 마을’로 알려진 대성동은 40여 가구로 이루어진 농촌이다.  유엔군 1개 소대의 보호를 받으면서 생활하는 이 마을의 가구당 연간 평균소득은 3천만원이라고 한다.  비옥한 토지를 널찍하게 배당받아 기계로 농사를 짓기 때문이다.

  지름 8백m의 공동경비구역은 돌발적인 충돌사태가 일어날 소지를 늘 안고 있다.  지난 84년 11월23일 소련 관광안내원이 군사분계선을 넘어올 때는 총격전이 벌어져 한국군 1명과 북한군 병사 3명이 숨졌다.  76년 8월18일 발생한 도끼만행사건은 전쟁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몰아가기도 했었다.

  돌발적인 충돌로 인한 위험성은 ‘방문자 선언서’에 잘 나타나 있다.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의 방문은 적대지역에 들어가게 되는 것이며 적의 행동의 직접적인 결과로 부상을 입거나 목숨을 잃게 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그러나 동서화해의 분위기가 고조되면서 판문점의 기능 또한 변화를 예고하고 있다  변화의 조짐은 林秀卿양 귀환사건으로 신호탄이 올랐다고 볼 수 있다.  남북조절위원회나 적십자회담 대표 같은 고위 당국자들만 판문점을 통과할 것이 아니라 양측의 일반 백성들이 자유롭게 판문점을 드나드는 날이 하루 빨리 와야겠다는 것은 모두의 염원이다.

  브란덴부르크문이 열리고, 찰리검문소가 철거된 베를린 장벽의 붕괴에서 우리는 사람왕래의 물결이 장벽을 허물 수 있다는 사실을 배웠다.  허물 수 없고 넘을 수도 없다면 장벽 앞까지라도 가야 한다.

  판문점에서 가장 인상적인 장소는 ‘돌아오지 않는 다리’이다.  도끼만행 사건 이후 유엔군측이 폐쇄한 이 다리는 6·25직후 포로교환으로 유명해진 곳이다.  53년 8월5일부터 9월6일까지 유엔군과 공산군 포로 1만2천7백 73명이 건넜다.

  37년만에 살펴보는 휴전회담 주역들의 동향도 역사의 변화를 일깨워준다.  그 대표적 인물이 북한의 휴전회담 대표를 지낸 李相朝씨.  소련주재 북한대사를 지낸 그는 휴전회담 당시 콧등에 파리가 앉아도 몇시간을 꿈쩍않고 버틴 완고한 사회주의자였다.  그가 망명지 소련에서 마침내 고향땅 부산 동래를 찾은 것이 작년 일이다.  李씨에 맞선 남한의 휴전회담대표였던 崔德新은 서독주재 한국대사를 지냈으며 유신시대에 고향인 북한으로 망명한 뒤 사망했다.  두사람의 고향회귀 역정은 묘한 여운을 남기고 있다.

  시대의 변화 조짐에도 불구하고 휴전선은 여전히 멀게 느껴지는 곳이다.  아무리 먼 철책선이라도 서울에서 반나절을 꼬박 자동차로 달리면 닿을 수 있을 정도로 도로 사정이 좋다.  웬만한 곳은 다 포장이 되어 있다.

  한때 전방의 대명사처럼 불리던 인제·원통지역도 예외는 아니다.  자갈길이 포장되고 설악산 개발의 여파로 시가지의 건물도 말끔히 단장되어 있다.  원통에서 통일전망대로 가는 도로는 확장포장 공사가 한창이다.  완공만 되면 단숨에 철책선까지 치달아 보다 많은 국민들이 휴전선의 실상을 보고 통일의 의지를 키울 것이다.

  대포가 숨겨진 동굴도, 포병대대를 등에 업은 봉우리도, 한번 가서 보면 이곳이 아직도 적과 대치중인 일선이라는 사실을 실감할 수 있을 것이다.  지구상의 마지막 민족분단의 현장인 군사분계선.  이곳이 확 허물어져 남과 북의 민초들이 얼싸안고 감격의 눈물을 흘릴 날이 다가 오고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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