波市풍물 사라진 흑산도 여름
  • 흑산도 이문재 기자 ()
  • 승인 1990.08.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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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지 문화·어장 ‘황금시대’ 희미해져‥·관광지·어업 전진기지로 변신

 ‘玆山 은 黑山이다. 나는 흑산에 유배되어 있어서 흑산이란 이름이 무서웠다. 1801년 신유박해 때 이곳 흑산도로 유배된 자산 丁若銓(1759~1816)은 적고 있다. 흑산섬 유배생활의 참담함을 한 실학파 지식인은 매우 직접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자산 이후에 면암 崔益鉉(1833~1906)이  이 섬으로 유배되었다. 1875년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지적하고 일본과의 통상을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가 내몰린 것이다. 그리고 1974년, 민청학련사건으로 단속망을 피해 영화촬영팀과 함께 섬에 들어왔던 시인 金芝河가 경찰에 연행된 곳도 이 흑산섬이었다. 국토의 최서남단 전남 신안군 흑산면 흑산도는, 우리 근·현대사 격동기의 한지층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제주도로 대표되는 거개의 유배지들이 그러하듯 옛적 謫地들은 오늘날 빼어난 관광지로 탈바꿈해 있다. 홍도 들목인 흑산도 역시 쾌속선이 하루 두차례씩 닿고 있다. 조정의 ‘정치바람’에 몰려 이 섬에 갇힌 유배자들에게는 말 그대로 이 뱃길이 수륙만리였거니와 10여년 전쯤에는 목포에서 7시간이 걸리는 지루한 여객선 항로였다. 뱃머리를 잔뜩 치켜올리고 물살을 가르며 흑산-목포간을 두시간만에 내달리는 쾌속선은 그래서 역사의 어떤 아이러니를 느끼게 한다. 흑산면장 朴尙秀씨가 “올가을쯤에 흑산~목포간 헬기항로가 개설된다”고 전하는 걸 보면 이제 흑산도는 명실상부한 해상국립공원으로 변모하고 있다. 그 사이에  흑산섬은 또한차례 큰 변화를 겪었는데, 그 유명했던 波市가 사라지고 만 것이다.

  ‘세상 사람들아 乾坤이 좁다 말아라. 조그마한 땅일망정 쫒아서 둘러보니 이렇게 넓거늘’,유배자 최익현이 남긴 한시의 한 구절이다. 절해고도 갇힌 유배자는 흑산도 일대의 절경에 넋을 놓지만 그는 이어 이렇게 읇는다. ’서양의 문물은 동양에 물밀듯이 들어오는데 동양의 문물들은 물속에 잠겨 있도다‘ .중앙, 즉 뭍을 향한 근심이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흑산면 천촌리에는 그의 유허비가 세워져 있다.

  흑산도로 유배와 이곳에서 숨을 거둔 자산 정약전은 흑산 사람들이 최익현과 함께 각별하게 기억하는 인물이다. 다산 丁若鏞의 큰형이었던 그는 일찍이 천주교에 입교, 모든 관직을 버리고 전교에 힘쓰다가 신유사옥 때 강진으로 내몰리는 동생 다산과  함께 유배길에 오른다. 모든 것과 격절된 유배생활 속에서 자산은 흑산도 연안의 풍부한 수산생물에 눈을 돌렸다. 우리나라 최초의 어류학서로 꼽히는 <자산어보>는 3권1책으로 돼 있는데 어류 패류 해조류 1백55종에 대한 명칭분포 형태 습성 및 이용 등을 상술하고 있다.  이 책은 70년대말 지식산업사에서 한글로 번역 출간되었다.

 

파시는 옛말, 태풍 불어야 먹고 산다.

  교과서와 백과사전, 지리지 등에는 아직도 흑산도가 조기 고등어 멸치의 波市라고 적혀 있지만 흑산도의 오늘은 전혀 그렇지 않다. 80년대 중반 이후 이곳에서는 파시라는 말을 쓰지 않는다. 흑산도 수산업협동조합 朴龍善조합장은 “어선이 대형, 현대화되었고 회유성 어종이 많이 줄었다”며 “바람과 물때에 의존하던 시대의 파시는 사라졌다“고 말한다.

  돛단배들 수백, 수천척이 몰려들던 60년대의 전갱이파시와 60년대 중반에서 70년대 초반까지의 조기파시 그리고 그 중간의 삼치파시가 성황을 이루던 때가 흑산도의 황금기였다. 어선 수백척이 모이면 뱃사람 수천명 이상이 일시에 흑산도에 상륙하는 것이다.

  예리항에서 관광안내를 하고 있는 젊은이의 기억력에 따르면 그때는 술집여자들, 이른바 ‘흑산도갈매기가’2천명은 넘었다고 하니 흑산도 파시의 크기를 짐작할 만하다. 그 시절 흑산도갈매기는 소문이 안좋았다. 배가 한척 들어오면 한복을 빼입은 갈매기들이 우루루 달려가 호객행위를 했던 것이다. 그러나 80년대에 접어들면서 예리항에 ‘정화회’가 만들어져 스스로 단속을 했고 갈매기들의 숫자도 많이 줄었다. 현재는 50~60명 남짓하다.

  “ 다른 데 사람들이 들으면 기분 나빠하겠지만 예리항 사람들은 태풍이 오기를 기다린다. 태풍을 기다리는 데는 아마 전국에서 이곳뿐 일 것”이라고 예리항 유정여관 주인 具今喆씨는 말한다. 파시가 사라지면서 흑산도 경제의 노른자위인 예리항은 태풍을 피해오는 어선들이 ‘주요 수입원’이  된 것이다. 7월부터 시작해 8월에 태풍이 기승을 부릴 때는 예리항에 배들이 ‘모심어 놓은 듯’가득 찬다. 이 곳 사람들은 태풍 때는 “예리에서 진리까지 배 위로 걸어서 갈 지경”이라는 말을 하기도 한다. 진리는 예리항과 해안선으로 연결된 흑산면의 행정중심지이다.

  피항오는 배들 중에는 대만·중국배들도 제법 끼어 있다. 예리항 사람들에 의하면 대만사람들은 배에서 내려 금 같은 것을 팔아 인삼이나 인삼주를 많이 찾으며 중국 사람들은 요즘에는 배에서 내리지 못하지만, 고기를 내놓고 담요 과일 술 따위를 바꾸어간다.

  특히 겨울철 가거도에는 중국배들이 폭풍을 피해 자주 찾는다. 옛부터 가거도는 ‘중국상해에서 닭우는 소리가 들린다’는 말이 있을만큼 중국과 가깝다. 소흑산도로 더 잘 알려진 가거도에서 중국어통역을 해오고 있는 고의숙(68)씨는 “그들이 자연환경 때문에 부득이 피항하지만 그들이 왜 왔는지, 불순한 의도는 없는지, 혹여 무기를 소지하지 않았는지 정도는 우리가 당연히 알아야 한다”고 말한다. 평민당 김대중총재와 한마을에서 자라나 보통학교까지 같이 나온 그는 가거도에 중학교 분교가 생기기 전까지 고등공민학교를 설립, 후학들을 가르쳤고 이곳 문화에 큰 관심을 기울여왔다.

  “국토 최서남단의 낙도지만 옛부터 문화의 섬이었다”고 말하는 고씨는 가거도가 소흑산도로 불리는 것을 안타까워한다. 소흑산도는 일제강점기에 붙여진 것이고 원래는 佳佳島, 매우 아름다운 섬이란 이름이었고 지금은 살만한곳, 可居島가 정식 명칭이다. 이 섬에는 천연기념물로 흑비둘기가 있고 신석기시대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음을 증명하는 패총과 당시 유물들도 있다. 고씨는 이곳에 오래전부터 전해내려오는 노동요인<멸치잡이노래>를 발굴, 전남 무형문화재로 지정받아놓기도 했다.

  흑산도 바로 앞 다물도에서 15톤짜리 홍어잡이배를 부리고 있는 金完植(41)씨는 흑산도에서 3대째 홍어를 잡아오고 있다. 여름철이라 우럭을 낚고 있는 그는 고기잡이의 가장 큰 어려움이 인력난이라고 잘라말한다. 그는 “이렇게 배 타는 사람이 없으면 중국교포라도 데려와야 한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3년 전쯤부터 어촌의 새로운 현상으로 자리잡고 있는 부부어부도 인력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자구책의 하나이다.

 

인력난과 2세교육이 큰 문제

  섬사람들이 인력난과 더불어 견뎌내야 하는 어려움이 2세들의 교육문제이다. 부부어부 지정길(62) 황재님(53)씨의 삶을 들여다 보면 이즈음 어민들이 겪고 있는 ‘파고’를 짐작할 수 있다. 두달 전 빚을 내 2톤짜리 발동선을 구입한 지씨네는 날씨만 웬만하면 매일 장어와 우럭을 낚으러 앞바다로 나간다. 매일 통바리(어항의 일종) 3백여개를 바다에 던지고 그만큼을 건져올리는데, 장마철인 데다가 12년된 낡은 배여서 빈통바리를 자주 들어올려 맥이 빠지곤 한다.

  통바리가 가득 차거나 고깃값이 좋을 때 하루벌이가 5만원 정도. 그러나 평일에는 2만원 안팎이고 한달에 20일 바다에 나가면 많이 일한 것이다. 한달 수입은 70여만원이지만, 이 가운데 30여만원은 빛으로 나가고 40만원으로 자녀 교육비와 생활비를 충당해야 한다. “멍청해서 애들을 많이 낳았다”는 부인 황씨, 아들 넷과 딸이 셋 있다. “공부를 못하면 그만인데 다들 공부를 잘해서”뒷바라지를 안해줄 수가 없다. 지난해 큰맘먹고 빚을 내 50톤짜리 꽃게잡이 배를 산것도 대처로 나가있는 자녀를 원없이 공부나 시켜보자는 마음에서였지만 이내 실패하고 말았다.

 홍도 고향인 황씨는 처녀적에는 해녀였고 노도 많이 저어봤다. 남편과 바다에 나가면 “자유스러워” 좋지만 빚더미를 생각하면 속에 불이 난다. 그렇다고 “하늘 같은”남편에게 뭐랄 수는 없고 해서 남편이 못보게끔 뱃머리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노래 서너자락을 뽑는다. 미어지는 가슴을 바다에 퍼붓고나면 속이 가라앉는다. 비오는 바다를 바라보는 부부어부의  낯빛은 ‘그러나 기어이 희망을 놓아버리지 않는’ 이땅 민중들의 얼굴이었다.

  <국토>의 시인 趙泰一은 이들 지씨부부 같은 삶들을 시집<가거도>에서 노래하고 있다. ‘너무 멀고 험해서/오히려 바다같지 않는/거기/있는지조차/없는지조차 모르던 섬’에서 바람과 바다와 싸우는 모진 삶들이지만 이들은 ‘자식 길러 가르치고/배운 자식 뭍으로 보내/나라걱정, 나라 위해/목숨도 걸 줄 아는/멋있는 사람들’이다.

  장마의 끝무렵이 되자 흑산도 예리항은 관광객으로 붐비기 시작했다. 장마가 끝나면 각지에서 몰려드는 오징어배와 살오른 멸치를 잡는 배들의 집어등이 흑산 밤바다에 장관을 이룰 것이다. 그리고 또 어김없이 태풍이 올라올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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