統獨에 ‘속 쓰린’ 이웃나라들
  • 파리 · 진철수 유럽지국장 ()
  • 승인 1990.08.09 00:0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英 통상장관 “유럽 먹어삼킬 것” 발언 후 사임… 佛, 혁명기념일에 국방력 새삼 과시

 7월은 독일이 복더미에 올라앉은 달이었다. 서독 축구팀이 74년 이래 처음으로 월드컵을 차지했을 뿐만 아니라 곧이어 소련을 찾아간 헬무트 콜 총리가 통일독일이 나토(북대서양조약기구)에 머물러도 좋다는 고르바초프의 동의를 받아냈기 때문이다.

  그러나 통독작업이 의외로 순탄하게 진전을 보이자 영국 등 이웃나라들이 심상치 않은 반응을 나타내고 있다. 영국의 반발은 바로 대처 총리 측근에서 터져나왔다. 각료 중에서도 총리의 신임이 각별히 두텁다는 니콜라스 리들리 통상장관이 시사주간지《스펙테이터》와의 인터뷰를 통해 反獨입장을 노골적으로 표시하는 바람에 유럽이 발칵 뒤집혔다. 현재 논의되고 있는 유럽통화통합(EMU) 방식은 “독일이 유럽을 송두리째 먹어삼키기 위한 책략”에 불과하다고 그는 주장했다. 또 영국이 주권을 전적으로 EC에 넘겨주려 한다면 그것은 히틀러에게 주권을 넘기는 것과 다를 것이 없다고도 말했다. 그뿐 아니라 프랑스가 독일 앞에서 하는 짓은 푸들(애완용 개)과 같다고 개탄했다.

  원래 영국정부의 통독에 대한 입장은 무엇이었나. 물론 통일을 환영하지만 그것이 서방측의 안보를 해치지 않도록 나토의 테두리에 통일독일이 머물게 하자는 것이 공식적인 입장이다. 그렇다면 리들리의 발언은 엉뚱한 망언인가. 그렇지 않으면 대처 총리의 생각도 이와 비슷한데 리들리의 표현이 과격했을 뿐인가.

  사실은 대처 총리도 독일통일에 대한 우려를 일찍부터 표명해왔다. 예를 들면, 지난 2월 <더 타임스> 기자와의 회견에서 양독의 통합은 유럽에 ‘엄청난 변동’을 일으킬 것이라고 말했으며, “현재와 같은 유럽공동체에 그렇게 큰 독일이 자리잡게 되면 그것이 전체를 완전히 쥐고 흔들게 될 것(dominate totally)”이라고 불안을 표시했다.

  리들리 발언은 너무 과격하고 감정적이어서 국내외에 파문이 대단했다. 처음에는 본인이 발언을 취소하고 사과하는 것만으로 우물우물 넘겨보려는 생각도 했으나, 대처 총리와 가까운 인물이기 때문에 그대로 남아서는 영국의 대외관계가 힘들게 된다는 판단 아래 대처는 그의 사표를 받고 말았다.

  영국국민의 여론도 리들리 편은 아니었다. 여론조사에 따르면, 영국인의 과반수(66%)가 독일국민을 신뢰하며 역시 과반수(54%)가 독일지도자들을 신뢰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또한 과반수가 리들리의 사직이 옳은 길이라는 의견을 나타냈다. 좀더 구체적으로 리들리의 견해에 대한 의견을 물었을 때도 그이 견해에 반대하는 여론이 압도적이었다.

  여론조사는 연령층에 따라 견해차가 심하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같은 통화문제 설문에 있어서 56세 이상의 여론은 리들리 견해 지지가 34%나 되었으며 반대는 58%로 나타났다. 나치시대 독일을 기억하며 2차 세계대전을 경험한 고령층에서 독일에 대한 경계심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이에 반해 16세에서 34세 사이의 젊은층 의견은 리들리 견해에 대한지지 20%, 반대 71%로 갈라졌다.

 

“독일인은 공격적” 파월 메모 파문

  리들리 파문 와중에 소위 ‘파월 메모’라는 것이 <디 인디펜던트>지에 실려 대처 총리를 더욱 난처하게 만들었다. 대처 총리는 지난 3월 영국과 미국의 역사학자 5명과 저명한 영국 언론인 1명을 총리별장에 초치하여 독일의 장래에 관한 의견을 청취했다. 일종의 비공개 세미나가 열린 것이다. 그때 세미나 내용을 총리의 해외담당비서 찰스 파월이 정리한 것이 신문에 새나간 것이다. 전체적으로는 2차대전 후의 독일이 건전한 방향으로 나가고 있다는 긍정적인 평가에 무게가 가 있지만, 독일사람들의 국민성 묘사와 관련, 매우 부정적인 특징이 열거되어 있는 부분이 특히 화제가 되었다. 독일사람들은 지나치게 공격적이며, 불안감에 싸이기 쉬우며, 이기적이며,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기 쉽다는 것 등이다.

  이러한 묘사의 밑바닥에 깔려 있는 것은 나치의 만행이 재현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무엇이 잘못되었기에 그러한 만행이 저질러졌느냐 하는 의문이다. 다시 말해서 그런 일이 다시 안일어나기를 바라지만, 당장이 아니라 몇십년 후에라도 혹시 모를 일이 아니냐 하는 불안감을 씻기 힘들다는 것이다.

  이점에 대해 세미나 참석자 중의 한사람인 언론인 티머시가튼 애쉬씨는 서독의 노력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면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서독의 독특한 강점은 부단하게, 가차없이, 때로는 자학적이라고 할 만치 철저한 자기반성과 자기비판을 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능력은 단단한 자유언론과 비판적인 역사학을 바탕으로 하여 발휘되고 있다.” 그는 일본이나 이탈리아는 이점에 있어서는 도저히 못따라 가고 있다고 썼다.

  그러나 리들리 파문 때문에 대처정부의 인기에 당장 손상이 가지는 않았다. 최근 여론조사 결과에 따르면, 보수당에 대한 지지도는 6월의 37%선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4월에는 29%로 폭락했던 보수당 지지도는 5월에 34%, 6월에 37%로 상승기세를 보여왔으며, 리들리 파문이 없었더라면 더 뻗을 수 있었으리라고 추측된다.

  리들리 발언에 대한 서독과 프랑스의 반응은 상당히 점잖은 편이었다. 서독 정치가 중에는 리들리가 19세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냐고 쏘아붙인 사람도 있지만, 헬무트콜 총리는 “완전한 망발이었으며 내용이 유치하다는 것을 누구나 느낄 수 있었다”면서 독 · 영관계에 악영향을 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는 또한 통독의 영향에 신경을 쓰는 이웃나라에 대해 “이해가 안가는 것이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 그는 영국이 모든 것을 걸고 히틀러와 싸워야 하지 않았느냐고 반문했다.

 

콜 서독총리 “이해가 간다”

  프랑스의 유력지 <르몽드>의 논설은 “귀족으로 태어났어도 신사는 되지 못하는 경우가 있나보다”라고 리들리의 비신사적인 표현을 꼬집은 다음, “독일이 깊이 있는 변화를 이룩해왔다는 점을 계산에 넣어야 될 것”이라고 영국을 타이르는 조로 말했다. 또 최근 영국의 여론조사를 보면 EC에 대한 지지자가 과반수를 넘고 있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프랑스의 미테랑정부도 통일 후의 독일을 어떻게 하면 견제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 때문에 내심 고민하고 있다고 영국의 《이코노미스트》는 분석하고 있다. 7월14일 혁명기념일 행사에 전차를 앞세워 국방력을 과시한 것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짓이었으며, 최근에 ‘아데스’ 핵미사일의 제작을 지시한 것도 프랑스가 자신의 안보를 위해 독자적인 대책을 강구하겠다는 의사표시로밖에 볼 수 없다는 것이다.

  나토문제를 해결한 콜 · 고르바초프 합의는 독일통일을 신작로 위에 올려놓았다. 합의내용의 주축은 독일군의 감축이다. 통일 후 독일의 병력수준을 앞으로 3~4년간에 37만명으로 줄이자는 것이다. 현재는 서독 병력만도 48만명이다. 7월16일 이러한 합의가 발표된 데 이어 17일에는 파리에서 열린 2+4 외무장관 회담에서 독일 · 폴란드 국경에 관한 합의가 또한 이루어졌다. 양독과 2차대전 전승국인 미 · 영 · 불 · 소 4개국 외무장관이 특별히 폴란드 외무장관도 합석한 가운데 국경문제를 폴란드가 원하는 방향으로 낙착지었다.

  급템포로 성과를 보인 콜의 통일외교의 비결은 무엇인가. 너무 서두른다는 비판의 소리를 뿌리치고 이제 큰 성과를 맞이한 콜 총이가 12월 선거에서 승리하여 통일독일의 첫 총리가 되리라는 것은 명약관화하다는 것이 중론이다.

  통독노력의 첫 번째 바탕으로는 역시 서방측과의 결속을 꼽아야 할 것이다. 이것은 아데나워 총리 이래의 방침이다. 그렇게 하는 것만이 궁극적으로 공산세계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이었다. 그후 빌리 브란트의 동방정책이 주효하였으며, 결국은 고르바초프 개혁에 따른 동유럽의 변화가 통일의 길로 연결된 것이다.

  두 번째로는 서독지도자들과 국민에 의한 민주주의 실천과 경제부흥이다. 경제기적과 민주정치가 맞물려 들어가면서 서독의 국력은 커왔다. 고르바초프의 합의를 얻는 대가로 서독이 경제원조를 약속한 것이 아니냐 하는 질문이 최근 파리회담 후 기자회견에서 나왔을 때 한스 디트리히 겐셔 서독 외무장관은 “동의를 돈으로 사다니…. 그런 일은 원치도 않으며 가능하지도 않다”고 일축했다. 그러나 영국이 두려워하는 서독의 경제력이 아니었다면, 고르바초프가 서독의 경제협력에 기대를 걸 수 있는 실력이 없었다면 독 · 소 교섭이 그토록 쉽게 풀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독은 앞서 50억마르크(30억달러)의 정부 보증 은행융자를 제공했으나, 그 이상의 경제원조는 고르바초프 정부가 9월에 경제개혁 조치를 취한 후에 구체적으로 고려하기로 되어 있다.

  통독이 현실로 나타나면서 유럽의 판도가 달라짐에 따라 EC의 장래에도 독일에 대한 여러 나라의 반응이 다각도로 반영될 것이다. 영국의 리들리 파문은 새로운 현실에의 적응이 어렵다는 것을 나타낸 사건이라고도 볼 수 있다. 현재 대처내각 내에서도 유럽통합에 적극적으로 가담하는 것이 영국을 위해서 좋은 선택이라고 믿는 親 EC파가 있다. 더글러스 허드 외무장관, 존 메이저 재무장관 등을 중심으로 한 이들 친 EC파의 주장이 대처 총리의 소극론 때문에 활개를 치지 못할 뿐이다.

  새 유럽에서 영국은 어떤 역할을 맡게 될 것인지 아직은 분명치 않다.


 

이 기사에 댓글쓰기펼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