老석학의 눈물로 막내린
  • 오사카·김승웅 편집국장대리 ()
  • 승인 1990.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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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학 국제학술토론회

‘고대사’발표로 격찬받은 金錫亨옹 가족상봉…북한측 논문은 대부분 급조된 느낌
 일본 오사카에서 열린 조선학 국제학술 토론회는 사흘간의 일정을 끝내고 5일 폐막했다.

 폐막에 앞서 가진 그룹회견에서 북한학자들은 ‘기자 선생’들을 호되게 나무랐다. 외국 기자나 조총련계 기자들보다, ‘남조선’기자들이 주요 질책 대상이 됐다.

 “기자란 민족통일을 이루는 선동자가 돼야 해요!”

 “남조선 당국자들은 콘크리트 장벽과 보안법을 당장 철폐해야 돼요. 임수경·문익환 동지는 즉각 석방돼야 합니다. 여러 선생들은 이런 기사를 자꾸 써야 돼요!”

 북한학자들은 기자들을 격려하기 위해 박수까지 쳤다.

 조선학세미나는 이렇게 끝났다. 한반도의 언어 문학 역사 등 11개 분과위별로, 전세계 14개국에서 모인 1천1백23명의 한국학 석학들한테 이번 학술 심포지엄이 끼친 영향은 대단했다.

 안타까운 점은 정작 동반·동학의 주역이 돼야 할 남북한 학자들간에 학문의 체계나 방법론상으로 너무나 깊은 골이 패어 있고, 설령 통일이 당장 이뤄진다 해도 그 간격과 位差를 메우거나 좁히는데 수십년이 걸릴지도 모른다는 실망을 남겼다는 것이다.

 북한학자들은 조선학을 “민족의 통일을 이루는 학문”(朴勇德 사회과학원 주체사상 연구소 실장)으로 정의했다. 조선학의 패러다임이란 “조선은 하나이며, 통일이 돼야 한다”는 것. 그들은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라고 강조했다.

 당초 북한학자들은 1백50여명이 참석할 것이라고 통보했으나 회의개막을 사흘 앞두고 11명으로 줄었다. 또 金澈明 조선사회과학자협회 제1부위원장을 단장으로 한 11명의 북한학자 가운데 논문을 제출한 학자는 8명에 불과했다. 이들이 발표한 8편의 논문은 서로 공통된 특성을 나타냈다. 모든 논문은 ‘민족’으로 시작해서 ‘통일’로 끝났다. 총론과 각론 모두가 ‘주체사상’으로 일관돼 있고, 논문마다 두서너차례 ‘어버이 수령’이 어김없이 반복됐다는 것도 공통점의 하나다.

 <공화국에서의 사회주의 경제건설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발표한 金哲式 사회과학부원장의 경우 발표하는 예의나 화술 면에서 세련미를 지닌 학자로 평가받았으나 그 역시 ‘어버이 수령’을 강조, 예외는 아니었다. 북한학자들 가운데 ‘어버이…’를 밝힐 때 순간적으로 못족은 표정을 짓거나 얼핏 자조의 눈빛을 감추지 못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청중 가운데 숨어 있는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한 듯 다음번 ‘어버이…’를 유달리 큰 소리로 강조, 自戒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美 하와이대 교수 ‘사랑과 용서’호소

 북한측 논문은 대개가 급조된 것임이 역력했다. 발표에 앞서 미리 논문을 배부하지도 않았고, ‘-였다’와 ‘-였습니다’가 혼재했다. 나쁜 지질에 흐릿한 활자로 인쇄된 논문을 들고나온 북한학자들은 정해진 시간 동안 원고를 읽고 자기 자리로 돌아왔다. 어쩌다 발표시간을 넘길 경우, 이를 통보하는 사회자의 쪽지를 아예 무시해버리기 일쑤였다. 오히여 사회자가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마지막 날 토론한 남북한 통일방안과 군측 세미나는 이번 학회에서 가장 많은 청중을 동원한 ‘빅 이벤트’였다. 한국측에서는 李世基(한국북방정책연구소장·전통일원장관), 북한측에서는 金澈明단장이 각각 연사로 등장, 또 하나의 남북대결의 장처럼 비쳤다.

이전장관은 최근의 남북 접촉상황을 강조, 현실적인 접근방법의 불가피성을 역설한 반면, 북한의 김단장은 남북한간의 자유왕래와 전면개방을 실현하기 위해서 “코크리트 장벽부터 제거해야 할 것”이라고 맞섰다.

 美 미주리대학 교수 출신인 趙淳昇씨(평민당의원)와 이즈미(尹豆見)시즈오카대학 교수가 질의 토론자로 합세했으나 남북한 양측의 엇갈린 통일시각을 보완하는 데에는 기여하지 못했다. 이 자리에서 하와이대학의 글렌 페이지 교수는 남북한간의 ‘사랑과 용서’를 호소, 남북한 학자들 모두를 순간적으로 숙연케 했다. 남북대치가 오죽 치열했으면 비학술적 용어인 사랑과 용서까지, 그것도 세계적인 한국학 석학의 입을 통해 제의됐을까 자괴하는 마음이 들게 했기 때문이다.

 그는 특히 한국전쟁을 모르는 40대 미만의 남북한 연령층을 안타까워했다. “서로 죽이기를 포기만 한다면” 한국통일은 가능하다고 그는 낙관했다. 그는 지금 당장이라도 盧泰愚대통령과 金日成주석이 백두산 정상에서 만나 대화할 것을 주장했다.

 감동을 불러일으킨 토론으로는, 개막 첫날인 3일 하오 역사분과위원회에서 소개된 북한사회과학연구소 金錫亨고문(75)의 <삼국사기의 倭침범기사에 대하여>라는 논문을 들 수 있다.

 ‘古代 朝日관계사’에 관한 한 동양 최고의 권위자로 알려진 김고문의 이번 학술발표에 대해 일본학계는 비상한 관심을 표명했다. 그는 기원전 50년부터 기원후 5백년에 걸친 왜의 신라침범이 원정군이나 해적의 성격을 띤 것이 아니라 北큐슈에 흩어져 병립했던 여러개의 소국이 습격한 것으로 부대워이 수천명에 불과했다고 밝혔다. 이 주장은 6세기까지도 일본이 야마도 중심의 통일국가 형태를 지니지 못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 왜의 소국들이 백제·가야의 편에 서서 신라를 침공한 것이라면 그곳 왜소국들에 살고 있던 한반도 이주민들이 한반도 본토의 각축전에서 결코 국외자로 남지 않았으며, 따라서 일본측이 주장해온 기존의 任那분국설을 뒤엎는 새로운 ‘한반도의 北큐슈 지배설’을 뒷받침한다.

 

‘울고 싶어! 울고 싶을 뿐이야’

 그의 주장은 제일 조총련계 학자는 물론 서울에서 참석한 많은 역사학자들을 감격케 했다. 논문을 발표하는 동안 그는 여섯 차례나 박수를 받았다.

 “그런 학설에 착안하게 된 경위를 설명해 달라”는 한 젊은 후학의 질문에 대해 그는 ‘주체사상’을 인용하면서 “위대한 수령동지의 뜻에 부합하는 연구를 하기위해서였다”라고 대답했다.

 경성제대 사학과를 졸업한 후 46년 자진 월북, 김일성대학 교수로 봉직한 그는 62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뽑힌 바 잇다.

 이번 학술회의는 그에게 또 한차례 해운을 안겨줬다. 월북 후 44년간을 이산가족으로 살아온 남동생 錫昌(69·과천교회 장로), 여동생 錫順(64·뉴욕 거주), 錫秀(61·숭실대 ?明官대학원장 부인), 成恩씨(59·부산 거주)와 만난 것이다. 이 재회에는 매부 최씨와 조카딸 善惠씨(40·서울대강사)가 합세했다.

 이들은 김석형씨의 학회 참가 소식을 듣고 통일원에 북한거주인 면담허가서를 제출, 당국의 허가를 얻어 오사카에 왔다.

 여동생 錫順씨가 통일원에 면담신청서를 내는 장면이 마침 그 자리에 가있던 <시사저널>조천용사진부장에게 목격됐다.

 조기자는 그녀를 따라 오사카 현지까지 동행했다. 여동생들과 해후할 노학자의 눈물을 카메라에 담기 위해서다. 회의개막 직전 리셉션에서 미리 만나 동생들의 ?日을 알린 조기자의 귀띔에 대해 그는 시종 시무룩한 표정으로 일관했다. “왔다면 만나보지…”정도의 담담한 반응이 고작이었다.

 회의개막 첫날 대회장에서 이뤄진 오빠·동생간의 해후장면 때도 김석형씨는 그저 무덤덤한 표정이었다. 그날 오후 동생들과의 단독회동 때가 돼서야 변화가 왔다.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울고 싶어! 울고 싶을 뿐이야!”라면서 기어코 눈물을 터뜨렸다. 한 유물론자의 눈물을 보기 위해 주최측인 오사카 經法대학은 10억여원의 경비를 들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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