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반일감정 험악
  • 워싱턴·이석열 특파원 ()
  • 승인 1990.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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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역적자에 자존심 불끈… “소련 대신 일본을 적으로 삼는다”분석도

 “몇년 뒤의 일을 생각해보시오. 12월 어느날 당신은 식구들을 데리고 ‘히로히토 센터’에 가서 크리스마스 트리를 구경하게 될 것이오. 하고 싶으면 해보시오. 일본제 차를 사려거든 사시오!”

 제너럴모터스에서 나오는 폰티악 승용차를 파는 한 업자가 뉴욕 지방 텔레비젼에 내고 있는 이 광고문안은 사뭇 위협적이다. ‘히로히토센터’란 록펠러센터를 사들인 미쓰비시부동산회사를 빗대어 한말이다.

 “자손을 위해 미국을 구출하자”는 구호를 내건 노스캐롤라이나의 한 단체는 “일본주의가 고산주의보다 더 무섭다”는 내용의 간행물을 전국에 뿌리면서 미국인들의 ‘각성’을 촉구하고 있다.

 이처럼요즘 미국사람들 사이에 반일감정이 되살아나기 시작, 제2차대전 때와 비슷한 험한 분위기가 자리잡고 있다.

 왜 이런 꼴이 벌어졌을까. 그 증상은 얼마나 심한가. 우선 그 원인을 살펴보면, 어쩌면 책임의 절반쯤은 미국쪽에 있는 것같이 보인다. 급변하는 국제정셋의 격랑속에서 미국의 위상은 흔들리기 시작했고 갑자기 불안에 휘말리게 되었다. <강대국의 흥망>을 쓴 예일대학 폴 케네디 교수는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소련이 ‘무장해제’를 하는 바람에 졸지에 적이 눈앞에서 사라져 당황하는 미국. 새 시대 미국의 새 역할이 무엇인지 아직 뚜렷한 답이 없는 가운데 그 불안은 더욱 증폭된다. 이 불안은 새 ‘적’을 찾아 나서는 동기가 될 수 있다.

 

미국땅 사재기가 불길에 기름부은 격

 미·일 무역마찰은 갑자기 일어난 것이 아니라 80년대 들어 해마다 되풀이된 해묵은 문제이다. 최근에 이 문제가 악화된 것은 일본 사람들이 컬럼비아영화사라든가 록펠레센터 같은 미국의 간판격인 기업체나 부동산을 사들임으로써 미국사람들의 자존심을 몹시 상하게 했기 때문이다.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소련의 위협이 줄어들자 일본과의 경제적 경쟁에 관심이 쏠리면서 대일감정이 나빠지고 있다. 미·일관계는 위기에 가까운 상태에 접어들고 있다”고 걱정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와 CBS텔레비전의 공동 여론조사에서 응답자 58%는 소련의 군사력보다는 일본의 경제력이 미국 안보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윌스트리트 저널>과 NBC텔레비전이 공동으로 실시한 경제력 비교에 관한 여론조사 결과 응답자의 69%가 일본이 미국을 앞섰다고 답변했다. 또 작년까지만 해도 미국사람의 47%는 미국경제가 세계제일이라고 믿었지만 올해에는 50%가 일본을 제일로 생각하고 있고, 64%는 미국내의 일본인 투자가 미국경제에 해롭다고 판단, 외국인의 투자 제한에 찬성한다고 대답했다(<뉴욕 타임스>와 CBS 텔레비전 조사).

 5백억달러씩의 대일무역적자를 여러해 동안 기록하고 있는 미국경제력의 취약성 때문에 기가 꺾여 있던 미국사람들은 2~3년 전부터 갑자기 늘어난 일본인들의 미국 부동산 사재기와 기업체 인수에 큰 충격을 받고 있다.

 공교롭게도 작년에는 일본기업들의 미국내 직접투자(기업매입과 부동산투자 등)가 줄을 이어 지금까지 미국내 투자에서 선두를 달린 영국을 바짝 추격했다. 그래서 1990년에는 일본이 영국을 앞지를 것이라는 전망을 어렵지 않게 했다.

 소니·미쓰비시 등 재벌회사들을 선두로 히타치·다이이치긴교은행·다이와은행·후지사와제약·야마노우치제약 등 여러 회사들이 앞서거니 뒤서거니 앞을 다퉈 제조업소, 금융기관, 부동산을 사들였다.

 군소업자들이 투자한 돈까지 합치면 작년 한해 동안의 일본의 對美 투자액은 모두 2배60억달러가 되는데 일본인들은 금융기관, 컴퓨터·통신장비·전자제품 제조업, 제약회사 등을 골라 사들였고 부동산은 주로 캘리포니아주와 뉴욕주에 있는 것을 선호한 것으로 밝혀졌다. 일본인 투자가들은 네브래스카주의 구석진 시골까지 찾아가 헐값으로 목장과 농장을 사기도 한다. 또 이름난 골프장이나 스키장을 시가보다 높은 값을 주고 사서 화제 되기도 한다.

 미국내 외국인 투자는 88년말 현재 모두 1조8천억달러에 달하는 것으로 알려졌으며 투자순위는 영국이 단연 으뜸이고 그 다음이 일본과 네덜란드이다(금년에는 일본이 단연 1위일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영국이나 다른 나라가 투자를 하면 잠잠한 여론히 하필 일본돈이 미국에 들어오면 시끌시끌해질까. 이에 대해 <뉴욕 타임스>는 몇가지 이유를 들고 있다. 첫째는 너무 졸지에 일본돈이 쏟아져 들어오고 있고, 그 다음은 유명한 부동산이나 이름난 기업체를 일본인들이 사들여 유별나게 시선을 끌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거기에다가 미국의 대외무역적자 1천5백억달러의 3분의 1인 5백억달러는 일본이 팔기만 하고 사지를 않아 생긴 손실이고, 일본은 외국인에게 시장을 개방하지 않는 정책을 채택해온 불공평한 나라라는 인상을 준 탓이라고 이 신문은 분석했다.

 

“인종편견 아니냐” 일본측 반박

 그러나 눈에 보이는 것만 가지고는 설명이 불충분하다. <NO라고 말할 수 있는 일본>을 쓴 저자의 한 사람인 이시하라 신타로는 “백인들의 인종편견으로 미·일간에 마찰이 생기고 있다”고 잘라 말하고 있다.

 대일감정이 나빠지는 이유 중의 하나가 인종편견 탓이라고 시인하는 미국사람들은 아직 없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을 법하다. 미국인의 잠재의식에는 아직도 일본사람들이 ‘잽’(Jap)으로 보일 수 있을 것이다.

 미국사람들 눈에 들든 안들든 간에 일본은 미국을 제치고 이젠 대외원조를 가장 많이 하는 ‘주는 나라’가 되었다. 작년에 일본은 다른 나라를 도와주는 일에 1백억달러를 썼다. 그밖에 수십억달러를 세계은행과 유엔을 통해 원조자금으로 풀었다.

 세계 10대은행 중 8개가 일본 은행이다. 해외융자금액도 미국 은행들보다 많은데 그 절반을 달러가 아닌 엔화로 대출해주었다.

 88년에는 미국 지방정부인 로스엔젤레스가 일본 은행으로부터 8천1백10만달러를 융자받았다. 이 돈은 엔화로 대출되었는데 달러보다 금리가 훨씬 헐하기 때문에 희망자가 많다. 미국인들이 주택을 구입할 대 받는 융자금도 일본 은행에서 엔화로 받게 될 날이 멀지 않아 보인다.

 비록 ‘자위대’라는 명목이지만 일본의 군사비 지출은 서방세계에서는 미국 다음으로 많다. 일본 해상자위대가 보유한 구축함 수는 미7함대보다 많다. 최신형F-15 전투기도 아시아주둔 미공군의 보유대수를 상회한다.

 

미국의 그늘 벗은 일본. ‘큰나라’ 행세

 노무라연구소는 “10년 뒤 일본의 1인당 생산이 미국보다 무려 50% 더 높아져 경제력 격차는 더욱 심해질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다. 기초과학에서 미국이 앞서 있다지만 일본은 미국이 이루어놓은 성과를 가지고 제품을 개발하는 응용과학에서 앞서 있다.

 무엇보다 미국은 소비자에게 유리한 경제구조이기 때문에 시장개방이 잘 되어 있는데 반해 일본은 생산자에게 유리한 경제구조를 유지하고 있어 시장개방이 덜 되어 있다. 이러한 구조를 뜯어고치도록 미국은 압력을 끊임없이 가했고 불과 한달 전에 경제구조를 개조하겠다는 약속을 겨우 받아냈다.

 누가 뭐라고 해도 일본은 대국이다. 최근 휴스턴에서 열린 선진7개국 정상회담에서 일본은 ‘큰나라’ 행세를 했고 또 그런 대접을 받았다. 다른 여섯 나라 국가원수들이 한결같이 만류했지만, 가이후 총리가 “천안문 학살사건으로 보류했던 52억달러의 對중국 차관을 지급해야 한다”고 주장해 양해를 얻은 사실은 세계무대의 주역다운 태도로 평가되고 있다.

 특히 다수가 소련에 대한 경제원조나 기술원조를 강력히 주장했음에도 불구하고 가이후 총리는 “소련이 제2차대전 후 빼앗아간 일본의 북방영토를 돌려주지 않는 한 일본은 대소원조 계획에 불참한다”고 선언했을 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폐막 공동성명에 북방영토 반환문구를 삽입하도록 물고늘어져 성공했다. 지금까지 일본은 미국의 소맷자락을 붙들고 그 그늘에서 미국이 끌고가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 그러나 이제 일본은 “그들이 옳다고 판단하는 일에 주저함이 없이 선뜻 나서고 있다. 이젠 독립을 원하고 있다.”(하버드대 에즈라 보겔 교수)

 그렇지 않아도 미국의 일부 여론, 즉 수정주의자들은 미국이 좀더 단호하게 일본을 다루어야 한다며 대일 강경론을 부추기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일본은 섬나라 특유의 편협한 국민성에다가 제조업 중심, 수출주도형 경제로 장삿속만 챙기지 세계 지도자로서의 책임에는 관심이 없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무역규제를 해야 하고 군사비도 되도록 많이 분담하도록 다그쳐야 한다. 미국의 기업비밀이 새어나가지 않게 철저히 단속하면서 시장개방을 더 적극적으로 촉구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목소리이다. 이런 소리에 미국 의회 지도자들과 많은 국민들이 솔깃해 있다.

 국제 금융시장의 중심지는 나라의 힘에 따라 자리바꿈을 한다. 영국의 전성기에는 런던이, 제2차대전 후부터는 뻗어가는 미국에 힘입어 뉴욕이, 그리고 지금은 도쿄가 국제 금융시장의 중심지로 차츰 굳어지고 있다.

 미국 기술의 우위와 달러화의 절대우세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지켜나가야만 한다고 고집하는 수정주의자들의 대일 강경론이 갈수록 심화되고 있는 미국 사람들의 ‘대일 감정 악화’라는 타는 불에 기름을 끼얹는 일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는 사람들이 많아지고 있다.

 로렌스 이글버거 국무차관은 “대일관계는 크게 달라지고 있다. 우리 뜻대로 하던 때는 지났다. 경제문제는 물론이거니와 정치적 결정도 꼭 서로 협의한다는 자세로 마찰을 피해야 한다”고 경고했다.

 필연적으로 국제무대에서 일본의 발언권은 더욱 커질 수밖에 없다. 그러 수밖에 없는 것이 일본은 지난 반세기 가까운 세월을 이 날을 위해 준비해왔기 때문이다.

 2차대전 후 미군정하에서 처음 총리직을 맡은 요시다는 “영국 식민지였던 미국이 영국을 능가했듯이 일본은 미국에 예속돼 있지만 반드시 미국을 앞지를 날이 오고야 말 것”이라는 말로 실의에 찬 일본 국민들을 위로하지 않았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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