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윗사람되기’ 바늘 구멍
  • 장영희 기자 ()
  • 승인 1990.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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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기업 대리 이상 간부 2백여명에 불과… “남성보다 2배 일해야 승진 가능”

 효성드라이비트 기술영업부장 金仁淑씨(45)의 하루는 눈코 뜰 새가 없다. 건축공학을 전공한 엔지니어이지만 마진 계산, 계약체결 등 영업업무도 그의 일이다. 오전 시간은 8시의 영업회의를 시작으로 결재, 설계도면 보고로 후딱 지나간다. 오후에는 두세 군데 현장을 바쁘게 돌며 진행사항을 점검한다.

 드라이비트는 외벽단열 및 마감시스팀으로 첨단특수공법이라 건설 관계자들도 모르는 이들이 많다. 그래서 건물주에게 드라이비트공법이 갖는 높은 단열효과와 외장의 아름다움을 설명해야 함은 물론 시공업체, 설계사무소 디자인담당자에게도 설계(드로잉)자문을 해주어야 한다. 그는 상반기에 끝냈어야 할 공사가 하반기로 넘어와 걱정이다. 비가 많이 오고 인력난으로 공사가 지연된 탓이다. 원래 하반기로 잡혀 있는 코오롱스포렉스빌딩, 유니온오피스텔, 쁘띠오피스텔, 쌍요그룹의 용평스키장 타워콘도 등의 공사도 진행해야 하므로 몸이 두 개였으면 좋겠다고 웃는다.

 80년대 들어 여성의 사회진출은 놀랍도록 늘고 있다. 주위에서 30~40대의 맞벌이부부를 찾기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여성진추은 재계의 중심부격인 대기업에서도 점차 뚜렷해지고 있다. 아직은 초기 단계이지만 재계의 ‘여성중용’은 거스릴 수 없는 대세이다. 여성중역은 아직 나오지 않았지만 ‘남성우위’의 철옹성은 조금씩 허물어지고 있다.

 

“프로의식 가져야 살아남는다”

 럭키금성그룹에는 유일하게 여성부장이 한사람 있다. 금성기전의 李順眞자금부장(47)이 그이다. 그는 자금과장 10년, 영업관리과장을 4년간 지낸 후 자금업무의 독보적인 능력을 인정받아 올해 1월 부장자리에 올라섰다. 회사의 자금총괄책인 그의 소을 거치는 돈은 하루에 40~50억원선.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은 바쁜 사람에게 시킨다는 말이 있지요. 야근, 밤샘 등도 마다 않고 열심히 일한 결과라고 봅니다. 여성이기 때문에 어렵다기보다는 유리한 점이 더 많았다는 생각이에요. 활동영역이 금융기관이데 ‘여성 자금부장’이라고 잘 기억해주더군요. 열심히 하는데는 이길 장사가 없어요. 불평하기 전에 스스로 노력하여 살아남아야 합니다. 프로의식을 가져야죠.” 그는 이렇게 말하면서 의욕과 능력만 있으면 문호는 개방되는 추세라고 덧붙인다. 부장급으로는 선경그룹 비서실의 朴相榮씨(47)도 있다. 73년에 입사하여 崔鍾貿회장을 17년째 보좌하고 있는데 전문비서로서의 능력을 크게 발휘하고 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부장급까지 승진한 여성들은 아직 극소수이지만 차장, 과장급은 속속 등장, 대기업에서 여성관리자를 범상히 볼수 있는 시대도 멀지 않은 듯 싶다. 현대그룹 총무부 權愛子차장(48)은 66년 현대건설에 입사해 69년 결혼과 함께 그만두었으나, 84년 전문직기혼여사원 공채 때 재입사한 드문 경우. 들어온 지 석달만에 과장직급을 달고 4년후에는 차장으로 고속승진해 부러움을 살 정도였다. 재입사 당시 鄭周永회장이 “잘해낼거라고 생각해서 과장을 주니 열심히 일해달라. 못하면 도태된다. 알아서 하라”는 말에 큰 자극을 받고 성심껏 일해왔다고 겸연쩍어 한다. 이런 그도 직장내의 인간관계 때문에 무척 애를 먹었다. 결재서류를 올리지 않는 등 노골적으로 자신을 무시하는 남성 대리가 있었다. 마침내 그는 그 대리를 불러 “이러다 지쳐서 나가겠지 하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심사숙고해서 다시 사회에 나왔고 이곳에서 중역까지 할 작정이다. 나에게 잘 보이는 것이 당신 신상에 좋다”고 웃으며 경고했다. 그 다음부터 그 대리뿐만 아니라 직원들의 태도가 달라지더라며 이런 상황에 직면할 때 적극적인 해결의지만이 문제를 풀 수 있다고 조언한다.

 이밖에 79년에 입사하여 줄곧 安仁相회장을 보필하고 있는 동양나이론의 全宰亨차장, 원미섬유(효성그룹) 영업부에서 남성캐주얼 ‘존핸디’ 상품의 판촉관리를 맡고 있는 金聖愛차장, 광고대행사인 금강기획(현대그룹)의 崔潤姬차장(카피라이터), 롯데쇼핑 유니폼과의 孫秋子차장 정도를 꼽을 수 있을 만큼 차장급은 많지 않다. 그러나 여성과장과 대리는 크게 늘고 있다. 여성관리자 시대를 예고하는 희망적인 현상이다.

 삼성그룹의 여성과장 1호인 제일제당 홍보실의 金然珍과장(41)의 이력은 다채롭다. 아나운서(동아방송) 출신이라는 것도 그렇거니와 그룹 전문직여사원 공채로 입사한 경우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의 일은 기업홍보의 새로운 영역인 유선방송(CA-TV)으로 영상사보를 제작하는 것이다. 그룹내의 각종 정보와 소식, 교육자료 등을 비디오로 제작해 제일제당의 전사업장(40군데)에 내보낸다. 전력탓인지 방송에 대한 그의 열정은 대단하다는 평이다. 비디오 제작뿐만 아니라 방송기자재 구입에서부터 각 사업장 송출기에 단일 모티터를 연결하는 일 등 관련업무를 혼자 해냈다고 한다. “일단 회사에 오면 집 생각은 안합니다. 모든 에너지를 철저히 일에 쏟아 붓는 것이죠. 이렇게 열정적이지 않으면 조직에서 살아남을 수가 없습니다. 직장생활을 하다 보면 누구나 고비는 있게 마련인데 극복해야죠. 제자리를 찾아가려는 이런 노력이 결집될 대 여성에 대한 왜곡된 인식을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

 승진기회 부여도 그렇지만 여성들의 업무영역이 홍보나 전산, 비서직에서 생산·판매관리, 신규 개발사업, 건설현장 투입 등 그동안 남성전유물이었던 분야로 확대되고 있는 것도 의미있는 일이다. (주)대우 건설부문 토목공무부의 文康淑대리, 수영만사업팀의 李根香대리 등은 새로운 영역으로 진출을 시도하는 사람들이다. 세계를 상대로 영업하는 여성들도 늘고 있다. (주)대우 무역부문 섬유1부 장진희대리(국제영업담당), 대우증권 국제영업부의 李仁淑대리(해외관련결제업무)등이 그네들이다.

 여성들의 기업체연구소 진출이 많아짐도 눈에 띄는 변화, 실력대결로 ‘산업사회의 두뇌’에 당당히 도전하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11월 삼성종합연구소 전자기기硏에 선임연구원으로 발탁된 定正姬박사(카네기멜론대학 전기공학 전공), 럭키중앙연구소의 박정옥책임연구원은 전공분야에서 인정받고 있는 두뇌들이다. 대우통신 생산2부 趙敬和대리(31, 연세대 전자요업재료, 박사)는 반도체 공정에 관해 연구하는 신예, 최신 기술동향을 분석해 신공정을 개발하고 당장 일어나는 불량품의 문제점을 찾아내는 업무를 주로 한다.

 

대기업 ‘승진벽’ 높아 부장급 5명뿐

 현재 삼성 현대 대우 럭키금성 선경 등 10개 재벌그룹에서 근무하고 있는 대리급 이상 간부여성은 2백여명에 이를 것으로 추산되고 있다. 지난해말 현재 전문·기술·행정관리직에서 일하는 여성이 60만명에 달한다는 것을 감안할 때, 여전히 높은 ‘대기업승진벽’을 확인할 수 있다. 게다가 부장급은 단 5명(10개그룹)에 불과하다.

 기아, 한국화약 등의 그룹은 대리급의 하급간부조차 전무한 실정이다. 채용문호도 넓혀지지 않고 있다. 삼성, 현대 등이 기혼여성을 대상으로 공채를 했지만 2~3기를 끝으로 뽑지 않고 있다. 유일하게 대우그룹이 여성인력 채용 문호개방이나 규모면에서 양호한  편이다. 대우는 85년 국내 처음으로 여사원만을 공개채용하기 시작, 5기 동안 6백48명을 뽑았다. 대기업에 비해 금융기관(은행권)의 관리직 여성 비율은 압도적으로 높다. 최초의 여성부장인 조흥은행 張都松연수원장을 비롯 3백5명의 대리급 이상 관리자가 있다.

 대기업에서 여성이 윗자리를 차지하려면 남성보다 몇 배의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그 만큼 불리한 조건이다. 여성개발원 張誠子교육연수실장은 “차별에는 능력으로 대항해야 한다. 또 개인의 무력함을 조직적인 연대감으로 크게 해결하는 작업이 동반되어야 한다”고 지적한다. 일하는 여성들의 연대조직인 전문직여성클럽(BPW)의 白正蘭회장(인데코 대표)도 “기업주들이 남녀고용평등법을 실천하도록 계속 압력을 넣어야 하며 여성들도 자신의 역량과 자질을 발휘하려는 적극적인 사고와 전문인 의식이 아쉽다”고 역설한다.

 이런 점에서 한 여성관리자의 말은 교훈적이다. “남성의 2배 정도 일할 것, 남성과 대립하지 말고 융화할 것, 잘못된 점을 용기있게 지적할 것, 자신의 결점을 혹독하리만큼 인정하고 극복해나갈 것,” 철저한 자기관리와 노력만이 바늘구멍을 넓혀가는 첩경임을 알려주는 말이다. 그러나 육아 등은 개인적 노력만으로는 해결할 수 없는 문제다. 고급 여성인력이 일할 기회조차 박탈당하는 것은 사회적 낭비라고 볼 때 사회적 여건조성도 같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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