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야하지 않은 사창가 애기
  • 김미도 (연극평론가·한양여전 강사) ()
  • 승인 1990.08.16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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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국서 작·연출 <미아리 텍사스>

 찌는 듯한 무더위와 함께 연극무대는 거의 휴업상태다. 신작이나 대형 공연은 찾아보기 어렵고 소품들의 앵콜공연이 대종을 이루고 있다. 이처럼 불황중의 불황속에서도 유난히 관객들이 몰리는 연극이 있는데, 바로 극단 ‘76단’의 <미아리 텍사스>(바탕골소극장, 7월13일~8월8일)가 그것이다.

 유달리 이 작품에 관객이 많은 것은 제목이 시사하는 선정성에서 비롯한 것으로 보인다. 몇해 전의 <매춘>이라는 연극이 그랬듯이 매음을 소재로 한 연극은 뭔가 야하고 자극적인 장면들을 직접적으로 보여주리라는 묵시적 기대가 작용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선입견을 가지고 온 관객들은 우선 이 작품이 전혀 외설스러지 않다는 것에 약간 실망(?)하게 된다. 그 다음에는 일관된 줄거리도 없고 뚜렷한 사건도 없이 1시간30분 동안 진행되는 공연을 다소의 답답함과 인내심을 가지고 지켜봐야 한다. 그리고 연극이 끝난 다음에는 ‘외설’이 아닐 뿐만 아리라 그렇다고 ‘예술’도 아니었다는 느낌을 맛보게 된다.

 기국서 작·연출의 <미아리 텍사스>는 철거설이 나돌고 있는 미아리의 사창가를 무대로 매춘부들과 포주, 기둥서방들의 생태를 스케치하고 있다. 이 작품은 일단 선정적인 쇼나 섹스등을 무대 위에서 거의 배제하고 매음의 문제를 한단계 여과시켜 표현했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평가할 만하다. 자칫 포르노가 되기 십상인 위험으로부터는 아예 멀찍이 물러나 있기 때문이다.

 대신, 이 작품은 사창가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의식과 무의식, 즉 그들의 내면세게예 초점이 주어져 있다. 따라서 그들의 의식이 뻗어나가는 대로 무대는 현재의 광란으로 치닫기도 하고 과거회상으로 회귀하기도 하고 꿈의 영역으로 진입하기도 한다. 그들의 하릴 없는 푸념과 넋두리가 이어지고 한때 과거의 찬란했던 꿈과 그 꿈을 무참히 짓밟고 지나간 폭력, 지워지지 않는 상흔들이 때때로 의식의 표면에 떠오른다. 그리고 현재의 죄의식과 병에 대한 공포가 자학적 유희로 폭발되거나 꿈속에서의 가위눌림으로 숨통을 죄어온다.

 그들의 말과 행동이 일관되게 보여주는 것과 그들 스스로 일상에서 목격하는 것들에 공통점이 있다면 ‘서서히 미쳐가는 것’ 그리고 ‘천천히 죽어가는 것’이다. 창녀들은 생존의 문제로 몸을 팔면서도 끊임없이 자의식과 갈등하는 가운데 종종 자기분열을 일으킨다. 그 대표적 인물이 ‘화정’으로, 그녀는 이미 심각한 병까지 얻어 죽을 날을 기다리는 입장이다. 그녀들의 피를 빨아먹고 살아가는 포주나 기둥서방도 회의나 죄책감에 시달리기는 마찬가지다. 그곳에서 꿀차를 팔며 호객행위를 하는 청년들도 초조한 나날을 보내는 인생들이다. 외부사람들이 직접 등장하지는 않지만, 미쳐가는 그들이 바라보는 바깥사람들도 이미 미쳐 있고 세상은 돌대로 돌아버렸다.

 이 작품은 사창가의 언어와 행위들을 가능한 상징화·추상화함으로써 고도의 은유를 발휘하고자 했으나 종국에는 뜬구름 잡는 이야기가 되고 말았다. 그 가장 큰 이유는 미아리 사람들의 내면의식조차 치밀하고 밀도 있게 추적하지 못한 채, 상식적인 죄의식들을 그럴싸하게 포장한 데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것은 빙산과 같은 거대한 잠재의식 중에서 누구나 인지할 수 있는 아주 작은 부분만을 확대시킨 것에 불과했다. 결국 절실한 체험과 공감의 재현이 되지 못하고 작가의 지식인적 태도가 빚어낸 사변적·관념적 유희에 지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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