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 ‘통일 경제학’ 없다
  • 남유철 기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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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는 10월3일 독일은 통일 4주년을 맞는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던 감동도 이제 4년이 넘어 추억으로 바래가고 있다. 지난 4년 동안 세계는 크게 변했다. 공산주의는 그 종주국에서조차 깃발을 내렸고, 사회주의 경제권은 자본주의로 통합되고 있다. 4년 세월 속에 동독 지도자 호네커는 비참한 종말을 맞았고, 북한의 김일성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그러나 분단 반세기가 넘어가는 한반도에는 이직도 냉전의 기운이 서릿발처럼 차갑다. 탈냉전의 역사적 흐름을 비웃기라도 하듯, 서부 휴전선의 대성동과 기정동에는 오늘도 각각 태극기와 인공기가 검은 철탑 위에서 휘날리며 민족 분단의 비극을 상징하고 있다.

 동서독은 40년 적대 관계를 청산하고 하나의 독일 국기를 올리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통일의  ‘후유증’이 그토록 클 줄은 독일인들도 미처 내다보지 못했다. 독일 통일 이후 경제에 나타나고 있는 부작용은 후유증이라고 부르기에는 그 상처가 너무 크고 깊다. 통일 이후 내리막길을 날려온 독일 경제는 작년에 충격적인 마이너스 성장을 기록했다. 올해 초에는 독일 역사상 최악을 기록한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의 5백만명 실업 규모에 육박하는 위기에까지 다가갔다.

 최근 독일 경제는 다소 회복하는 기미를 보이고 있으나, 엄청난 재정 지출이 강요되는 통일의 과제는 아직도 산적해 있다. 최근 독일을 방문하고 돌아온 송 일 교수(한국외국어대학교ㆍ무역학)는 “개인적으로 만난 독일인들은 대체로 통일을 후회하는 것 같아 보였다”라고 전했다(58쪽 참조).

 독일 통일 4주년을 맞는 지금 우리가 독일의 경험에서 무엇을 배웠고, 또 무엇을 배워야 할지는 분명치 않다. 독일 통합 과정에서 무언가를 배우려는 의지가 있었는지조차 의심스럽다. 동서독 통합에 대한 국내의 연구는 극소수 학자들이 해놓은 몇 편의 논문에 불과하고, 국민들도 독일 통합의 속내용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대회경제정책연구원 박성훈 박사는 “우리는 통일이 갖는 정치적 논리에 너무 집착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김영삼 정부가 통일에 대한 경제적 비전을 갖고 있는가에 대해서도 지식인들은 회의적이다. 김영삼 대통령 재임 시절에 남북한이 정치적으로 통합하기는 어려울지 모른다. 그러나 정치적 통합이 통일로 가는 마지막 단계라면, 경제적 통합은 훨씬 이전에 준비되고 또 시행되어야 한다. 김영삼 정권의 역사적 과제는 남북 경제 통합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통령은 핵문제에 발목이 잡혀, 통일을 준비하고 지향하기보다 분단을 관리하는 데 급급했다.

“경제 통합 등한히한 것이 문제”
 국제정치학자 조순승 의원(민주)은 “우리나라 통일 정책에서 가장 큰 문제점은 남북한 경제 통합에 대한 비전이 없다는 점이다”라고 비판했다. “정부의 ‘한민족공동체 건설을 위한 3단계 통일방안’에 이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가장 중요한 경제 통합에 대한 비전과 계획이 없는 것이 심각한 문제이다. ‘핵과 경협 연계’라는 정책 때문에 경제 통합을 너무 등한히 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흡수 통일은 원치 않는다는 점을 강조해 왔다. 독일식 흡수 통일이 가져오는 엄청난 경제적 부담과 막대한 통일 비용을 감당할 수 없다는 계산에서 나온 논리이다. 그러나 흡수 통일이냐 점진적 통일이냐 하는 논의는 부질없다. 독일도 원해서 흡수 통일을 한 것이 아니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89년 11월에만 13만3천4백29명에 달하는 동독 주민이 서독으로 몰려갔다. 89년 10~12월에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노동자의 수는 동독 전체 노동인구의 2.4%에 달하는 23만4천명이었다. 동독 주민의 이주가 90년 3월 총선 때까지 계속되자, 이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을 막기 위해 동서독 정부는 90년7월1일 ‘통화ㆍ경제ㆍ사회 동맹’을 체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후 3개월 만에 통합의 대세는 다시 동서독을 정치 동맹으로 몰고갔고, 하나의 통일 국가가 ‘불가피하게’ 탄생한 것이다.

 김대통령의 통일 발언은 최근 ‘흡수 통일 불원’에서 ‘흡수 통일 불가피’ 쪽으로 선회하고 있다. 광복절 축사에서 “통일은 예기치 않은 순간에 갑자기 올 수 있다”라고 천명한 이래, 김대통령은 자주 ‘갑작스런 통일’ 가능성에 대해 언급하고 있다. 일부 언론은 ‘북한의 체제 불안에 대해 새로운 정보가 있는 것이 아니냐’고 추측하기도 했지만, 이는 북한 체제의 불안 징후가 새로 포착됐다기보다, ‘점진적 통합’과 ‘급속한 통합’을 구분하는 것이 사실상 무의미하다는 최근의 분석에 근거했다고 보는 것이 설득력이 있다.

 남북 통합에 대한 정부내 보고서들은 통일 시나리오를 크게 두 가지로 나누어 보고 있다. 하나는 이른바 ‘연착륙 시나리오’라 불리는 점진적 통합이고, 다른 하나는 ‘충돌 시나리오’라 불리는 급속한 통합이다. 연착륙 시나리오는 △북한이 경제 개방과 개혁을 단행하여 이에 성공하고 △남북한이 두 정치 체제를 유지하는 공존 기간을 거치며 △이후 경제 발전에 따라 북한이 정치적으로 변하면서,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 체제로 통합해 나가는 경우를 말한다.

 충돌 시나리오는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하고 △경제난 타개를 위한 개방으로 외부세계에 대한 정보가 북한에 확산되면서 △동질화 과정을 거치지 못한 채 북한 사회가 총체적으로 무너져 불가피하게 북한이 한국 체제로 일시에 통합되는 경우를 말한다.

“급속한 통합 땐 북한 난민 4백만명” 추정
 정부는 이러한 두 가지 시나리오를 골격으로 하여 남북한 경제 통합을 전망해 왔다. 그러나 최근 정부 내에서는 이러한 두 가지 시나리오가 현실에서는 하나로 통합돼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은 것으로 의견이 모아지고 있다. 즉, 점진적으로 남북 관계가 개선되면서 경제 교류가 활발해지면, 폐쇄적인 북한체제가 이른바 ‘정보 충격’을 받아 일거에 무너질 가능성이 높다는 분석이다. 이러한 분석은, 북한이 일본ㆍ미국과 경제교류를 추구해 나가면서 체제 붕괴를 막기 위해 한국과는 오히려 체제 대결 구도를 강화해 나갈 수 있다는 전망과는 궤를 같이한다.

 독일의 통일 과정은 경제적으로 매우 힘들게 진행되고 있다. 독일의 사회 불안정에서 확인되고 있듯이 경제적인 어려움은 결국 정치ㆍ사회적인 문제로 확산돼 나타난다. 독일의 통일 경험이 부정적인 쪽으로 나타나면서 정부는 우리의 경우 반드시 통일을 점진적으로 이루어야 한다는 방향으로 정책의 가닥을 잡고 있다. 끊임없이 북한에 ‘흡수 통일 불원’이라는 신호를 보내온 이유도 이러한 기본인식에 기초한 것이다.

 그러나 설사 점진적 통합이 성공적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하나의 ‘사건’으로서의 통일은 결국 어느 시점에서 일거에 이루어지리라는 것이 대다수 전문가의 분석이다. 북한이 갑자기 무너지든 두 경제 체제가 점진적으로 합쳐지든, 국경을 넘는 것이 자유로워지는 어느 시점에서 북한 주민이 한국으로 대거 이동하는 일은 불가피하다는 분석이다. 이는 점진적 경제 통합을 준비하는 과정이 10년이 걸린다해도, 현재 한국 경제(1인당 국민총생산)의 8분의 1수준인 북한 경제가 한국 수준으로 올라올 수는 없다는 경제적 계산에 근거를 두고 있다. 두 지역 간에 경제 수준 격차가 클 때, 노동 인구는 삼투압 현상처럼 경제 수준이 높은 곳으로 이동하게 되어 있다.

 동서독이 계획보다 급작스럽게 통일할 수 밖에 없었던 가장 큰 원인도 대량 난민 때문이었다. 현재 한국 정부가 가장 고민하는 문제도 이같은 난민 대책이다. 독일 함부르크경제연구소 미카엘 크라코브스키 박사는, 동독 정부가 89년 11월 국경을 개방했을 때 서독 정부가 국경을 봉쇄할 수 있는 대안은 사실상 없었다는 점을 강조한 바 있다. “봉쇄란, 독일 국민이 수용할 수도, 바람직스럽지도 않은 대안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서독 정부는 동독 주민들을 동독 지역에 머무르게 하기 위해 부득이 급속한 흡수 통합을 선택할 수밖에 없었다.

 크라코브스키 박사는 서울에서 열린 한 세미나에서 한국은 설사 정치적 통합이 이루어지더라도 상당 시간 국경을 유지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라고 제안했다. 그러나 독일과 마찬가지로 한국도 군사력을 동원해 물리적으로 국경을 통제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할 것으로 대다수 전문가는 내다보고 있다. 럭키금성경제연구소 김도경 제2실장은 “만약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을 때처럼 북한 주민이 한국으로 넘어온다면 이를 물리적으로 막을 수는 없다”라고 말했다. 한국수출입은행 해외투자연구소 배종렬 박사도 “만약 난민탈출을 저지한다면 휴전선 지역에서 인명 피해가 커질 것이고, 이는 또 다른 사회 문제를 일으키게 된다”라고 경고했다.

 독일의 경우 서독으로 이주한 동독 주민은 백만명이 넘지 않았다. 동독 노동자들의 저임금 노동력이 서독 경제에 미친 긍정적 영향도 적지 않다. 대외경제정책연구원 박성훈 박사는 “경제적 동기를 주어 주민들이 스스로 북한에 머무르도록 유도하는 것이 최상의 방법이다”라고 주장했다. 다만 우리의 경우 독일과는 난민 발생 규모에서 상황이 다르게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는 데 심각성이 있다.

 정부의 한 내부 보고서는 최근 북한이 갑작스럽게 무너져 전면적 통합이 이루어질 때, 북한 인구의 11~18%에 달하는 2백50만~4백만명이 남쪽으로 이주하리라고 추정했다. 이 보고서는 완충 기간이 없이 급속한 통합이 이루어질 경우, 한국 정부의 재정 부담은 10년간 연평균 국민총생산의 6.9%에 달할 것으로 추정했다. 특히 통합 초기 3~4년 동안 집중되는 재정 부담을 감당하지 못한다면, 한국 경제가 위기에 빠질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정부의 한 관계 당국자는 통일원이든 안기부든 정부내 관계 기관이 만든 모든 ‘위기관리 방안’은, 북한 체제가 급격히 무너지면 일단 휴전선을 차단한다는 데 공통점이 있다고 밝혔다.

 지난 9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총생산은 북한의 7.1배였다. 작년에는 다시 8.3배로 늘어났다. 남북한 경제력 격차는 앞으로 더욱 크게 벌어질 전망이다. 그렇지만 한국은 서독과 같은 경제대국이 아니다. 북한은 동유럽권의 선진국이던 동독과는 비교하기 힘든 후진국이다. 남북한 간의 큰 경제력 격차는 독일이 겪고 있는 경제적 고통보다 한반도의 경우가 더욱 심할 수 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통일 비용’이라는 용서 사용에는 신중할 필요가 있다. 경제 수준이 다른 상이한 두 경제 체제가 하나로 통합되는 과정에는 새로운 경제 자원 투입이 요구된다. 이 ‘자원’을 모두 ‘비용’이나 ‘부담’으로 해석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독일경제연구소의 하이너 플라스베크 박사는, 동독에 대한 서독의 투자를 ‘비용’으로 취급할 수 없다고 지적한 바 있다. 즉 동독에 대한 서독의 투자는 그것이 정부 투자이든 기업 투자이든 미래에 수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에 ‘비용’이 아니라 ‘투자’라고 불러야 한다는 주장이다.

 독일에서는 ‘통일 비용’이라는 말을 거의 쓰지 않는다. 독일 학자들은 실업수당이나 연금과 같은 소모성 비용과, 사회간접자본에 대한 투자를 엄격히 구분해 사용한다. 그러나 우리는 개념 정의가 불확실한 통일 비용이라는 말을 학자들이 너무 남발해 국민들에게 통일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강하게 심어주었다(54쪽 참조).

 공보처가 지난 6월에 실시한 여론조사에 따르면, 우리 국민 중 ‘어떠한 대가를 치르더라도 통일을 이루어야 한다’고 응답한 사람은 31.4%에 불과했다. 전국 20세 이상 남년 천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이 전화 여론조사에서, 38.5%가 ‘현상태의 평화 공존’을 원했고, 26.3%는 ‘통일이 되면 좋지만 여건이 안되면 반드시 이룰 필요는 없다’고 대답했다. ‘통일은 많은 혼란을 가져오므로 현상태가 좋다’도 3.8%나 되었다. 68.6%라는 절대다수가 통일에 대해 소극적이거나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분단비용’과 ‘통일 비용’ 상쇄될 수도
 그러나 한반도가 독일보다 통일을 긍정적으로 진행할 수 있는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남북 통일이 이루어질 경우 산업 부문에서 남북한 경제는 서로 보완할 여건이 동서독보다 훨씬 강하다. 동서독 병력의 세배가 넘는 1백80만명의 남북한 병력 감축도 적지 않은 경제력 절약을 가져온다. 소모적인 ‘분단 비용’과 ‘통일 비용’이 상계될 여지가 큰 것이다. 내부적으로 통일은 내수 시장이 확대되는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온다. 대외적으로는 동북아 경제의 물류 흐름을 주도하는 거점 국가로 성장할 기회를 잡는 계기가 될 것이다. 한독상공회의소 프로리안 슈프너 사무총장은 “독일과 한국이 모든 점에서 다르다는 평범한 사실을 학자들이 간과하고 있다”라고 지적했다. 한반도 통일은 독일과는 완전히 다른 제3의 어떤 형태로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경제 면에서 볼 때, 남북한 경제 통합이라는 경제 규모의 확대 없이 우리가 21세기 초에 국민총생산 2조달러가 넘는 세계 10위권 경제대국으로 발돋움하기는 불가능하다. 소모적인 이념 논쟁으로 국력을 낭비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김영삼 대통령은 남북 경제 통합에 대한 비전을 하루빨리 제시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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