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스트로가 쏘아올린 ‘난민’폭탄
  • 워싱턴ㆍ김승웅 특파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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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수용 불가’ 조처에 ‘전략적 증파’로 대결

쿠바 난민 사태에 관해 클린턴 대통령은 계속 악수를 두고 있다. 그가 지난 8월19일 난민을 더 이상 수용하지 않겠다고 중대 성명을 발표하고 난뒤 난민 수는 오히려 더 늘어나고 있다.

 성명이 발표되기 전까지 하루 평균 백~2백명, 많아야 5백명을 넘지 않던 쿠바 난민이 성명을 발표한 직후인 20일 하루 동안에 천명이더니, 1천3백(21일), 2천5백(22일), 3천3백(23일)명으로 눈덩이처럼 불어나고 있다.

 카스트로 때문에 “미국의 이민ㆍ귀화 정책이 좌지우지 당하는 것을 결코 방관하지 않겠다”던 클린턴의 조처가 오히려 카스트로한테 역이용 당하는 국면으로 뒤바뀐 것이다. 카스트로는 보복 심리에 사로잡혀 난민을 ‘증파’하고 있는 셈이다. 사태는 중대 성명 발표 이전과는 비교할 수 없으리만치 엄청난 위기상황으로 악화해 있다. 그대로 둘 경우 임시 난민수용소로 쓰고 있는 미 해군 관타나모 기지는 얼마 안 있어 포화 상태에 이르게 된다.

 카스트로가 만약 난민을 뱃길로 보내는 데 그치지 않고, 관타나모 기지를 향해 아예 땅길로 송출하기라도 하면 사태는 더 걷잡을 수 없게 된다. 쿠바땅 동남단에 있는 기지는 쿠바 수도 아바나를 떠난 난민들이 걸어서 이틀이면 충분히 닿을 거리다.

 물 건너 미국 플로리다 땅에 발을 들여놓아 봐야 관타나모 집단수용소에 옮겨져 강제 수용된다고 믿게 되면 쿠바 난민들은 죽을지도 모르는 뱃길 대신 육로를 택할 것이 뻔하다. 관타나모 기지 주위는 미군의 기습에 대비해서 카스트로군이 매설한 지뢰밭이다. 그 지뢰밭 속을 벌떼처럼 밀려들 쿠바 난민. 지뢰에 찢기고 터질 난민들의 참상과 이에 쏠리게 될 세계의 이목. 이럴 경우 난민은 단순한 난민이 아니다. 이들은 카스트로에게 무기이며, 클린턴의 정치 생명을 옥죄는 전술이자 전략의 방편이다.

‘육로 송출’땐 최악 사태…미국, 전전긍긍
 클린턴이 카스트로의 이같은 전략에 겁 없이 말려든 것이다. 미ㆍ쿠바 관계가 악화해 온 지난 30여 년간 카스트로는 오로지 미국의 포위를 푸는 무기를 개발하는 데 심혈을 기울여 왔다. 그런 차원에서 최근의 ‘난민 무기’는 62년 쿠바 사태 당시의 소련제 미사일 반입처럼 사전에 엄격히 분석되고 계산된 것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미국은 카스트로의 계산을 제대로 읽지 못했다. 가중되는 미국의 경제 봉쇄, 마이애미ㆍ아마나 전세 항로 폐쇄, 미국내 쿠바 교민의 본국 송금 제한 등 미 행정부의 쿠바 정책은 카스트로로서는 견뎌내기 힘든 시련이었다. 여기에 유일한 종주국인 소련마저 무너지자 카스트로는 마침내 유화정책으로 선회하여 최근에는 대미 수교 가능성까지도 시사한 바 있다.

 그러나 미국의 적성국 1호로 꼽히는 쿠바에 대해 클린턴 행정부는 (역대 행정부와 마찬가지로) 단호했다. 당시는 적성국 2호급에 해당될 법한 북한의 핵장난에 말려들어 외교적으로 위축됐던 때이니만큼 쿠바의 추파에 신경을 쓸 계제가 아니었다.

 이번 난민 사태는 미국의 이런 냉담과 허점을 노린 카스트로의 반격인 셈이다. 카스트로로서는 난민 파송을 계속할 경우 클린턴의 ‘우발적인’ 반응이 있으리라는 것을 충분히 예상했고, 그 반응이 현실화하자 곧바로 난민증파라는 두 번째 카드를 꺼내 쓰고 있다.

 클린턴의 지난 19일 대응이 우발적인 차원이었음은 여러 사례를 통해 입증되고 있다. 우선 그러한 중대 성명이 나올 때 의당 거치게 마련인 참모회의를 열지 않았다.

 클린턴의 성명은 점증하는 쿠바 난민 문제를 자신의 정치 생명에 대한 위협으로 간주한 플로리다 주의 로튼 차일스 지사(민주당)가 연방정부 쪽을 향해 보낸 긴급 구조 신호에 대해 부랴부랴 응답한 형식으로 터져 나왔다. 차일즈 지사로서는 올 11월 중간선거를 통해 재선 여부를 심판받을 처지이므로, 마이애미 해변에 한 시간이 멀다 하고 계속해서 밀려드는 쿠바 난민이야말로 자신의 당락을 결정할 중대한 문제가 아닐 수 없었다.

 클린턴은 이것이 한낱 플로리다 주에 국한된 지방 정부의 일거리로 가볍게 여긴 것이 분명했다. 더구나 실무 책임자라 할 수 있는 백악관 안보보좌관 앤터니 레이크는 물론 부보좌관 샌디 버거, 국무장관 워런 크리스토퍼까지도 휴가중이었고, 이들은 쿠바 난민 사태가 뜨거운 감자가 돼 있는 8월27일까지도 귀임하지 않고 있는 상태다. 클린턴이 당시 외교ㆍ안보 참모들과 협의할 필요가 없었다고 주장하는 보좌관도 없지는 않다. 쿠바 난민사태가 백안관 회의에서 매일 다룬 안건이었으니만큼 대통령으로서는 굳이 레이크나 크리스토퍼의 진언에 귀 기울일 필요가 없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실제로는 국회에 계류중인 의료개혁법안과 범죄방지법안에 묶여 쿠바 난민에까지 신경쓸 겨를이 없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렇다면 클린턴은 민주당계 주지사의 청원만을 듣고 성명을 발표했거나, 아니면 기껏 의회내 일부 강경파의 주장을 듣고 그대로 따랐을 가능성이 높다. 의료개혁법안과 범죄방지법안 통과에 심혈을 기울여온 클린턴이므로 다른 어느 때보다도 국회의 눈치를 살펴야 할 처지였다.

카스트로, CNN 출연 ‘난민=무기’ 선언
 난민 수용 거부라는 클린턴 성명의 골자가 평소 쿠바에 대해 강경 노선을 택해온 미 하원 서반구소위 위원장 로버트 토리첼리 의원(민주당)의 주장과 일치하는 점은 이런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토리첼리 의원은 쿠바 난민을 관타나모에 집단 수용해 그곳을 장차 쿠바 망명 정부로 활용하고, 제3국으로 하여금 정부승인까지 시키자는 이론을 펴온 인물이다.

 클린턴은 미국의 쿠바 정책에 관한 한 휴가중인 백안관 보좌관들이나 국무장관을 탓하기 앞서 많은 목소리를 들어야 했다. 한 예로 중남미 전문가로서 부시 정권 때까지도 국내외에 이름을 떨쳐온 버나드 아론슨 전국무차관보는 한달 전부터 쿠바 난민 문제가 심심찮게 거론되자 그 심각성을 예고하고 적극적인 대응 방안을 제시한 바 있다. 그는 단순한 난민 수용 대책만으로는 미흡하므로 쿠바의 민주화라는 근본적인 해법 없이는 카스트로의 장난을 막을 수 없다는 논리를 펴며 구체적으로 클린턴ㆍ카스트로 회동을 제안 했었다. 쿠바에 대한 금수는 물론 항로 패쇄, 송금 제한 등을 전면 중단하고 관타나모 기지의 무조건 반환 등 카스트로의 요구 사항을 점진 수용하는 방식으로 카리브 해의 파고를 낮추라고 제안한 바 있다.

 미국에는 지금 대통령의 성명을 대중에게 해명하거나 확신시킬 어떤 장관도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8월22일 자네트 리노 법무장관과 윌리엄 페리 국방장관이 휴가를 빼앗긴 채 떨떠름한 표정으로 나와 합동 기자회견을 열고 그 자리에서 클린턴의 강경 방침을 확인했을 뿐이다. 국무부에서는 휴가중인 장관을 대신해서 피터 타노프 차관이 막상 클린턴ㆍ카스트로 회동 가능성을 묻는 질문이 나오면 “별로 득이 될 게 없을 것으로 본다”고 답변하는 정도이다.

 이런 상황에서 카스트로는 25일 미국 CNN에까지 출연해 관타나모 미군 기지를 (나치의) 집단수용소 같다고 매도하고, 쿠바 난민을 결코 억류하지 말도록 자국 해안경비대에 명령했노라며, 난민 증파가 하나의 무기임을 공식 선언하고 있다. 핵과 난민. 카리브 해상에서 또 하나의 북한을 본다.
워싱턴ㆍ金勝雄 특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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