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이상 음악 축제’ 지휘자 임원식
  • 김현숙 차장대우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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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선생, 내가 마중 나갈게”

 “재판장님이 우리 음악을 모르시듯이 저는 우리 법률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사람에게 잘못이 있다면 용서해주시기를 바랍니다. 왜냐하면 이 사람은 저를 포함하여 우리 음악가 수백 명을 한 다발로 묶은 것보다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지난 67년 동베를린사건 재판정에서 유일하게 변호인측 증인으로 나서서 열변을 토했던 임원식씨가 오는 9월8일 예술의전당 음악당에서 윤이상씨가 지켜보는 가운데 윤씨의 관현악곡 세 곡을 초연한다.
 38년 만의 귀국을 앞둔 윤이상씨에게 “내가 공항에 나가 있을 테니 아무 걱정 말라”고 소리치며 전화기를 내려놓는 임원식씨의 모습에서는 그때나 지금이나 열혈 청년의 청신함이 풍긴다.
 우리나라 최초의 직업 교향악단인 고려교향악단의 초대 상임 지휘자로 취임하여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은 임원식씨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열리는 윤이상 음악 축제가 윤이상의 음악과 정신 세계를 제대로 이해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란다고 강조한다.

외국 오케스트라와는 이미 몇 차례 윤이상씨의 음악을 지위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만 국내에서는 처음 지휘하시게 되었지요. 이번에 열리는 윤이상 음악 축제에 대한 감회가 남다르시리라 여겨집니다.
 감개무량합니다. 독일에서〈디멘션〉〈무악〉등을 베를린 심포니 교향악단ㆍ뮌스타 국립 교향악단과 연주한 적이 있으며, 유럽에서 윤이상씨의 곡이 초연될 때마다 쫓아다니며 들었습니다. 물론 몰래 다녔지요. 한국인으로서 누구보다도 빨리 서양의 작곡기법을 습득하고 동양의 정신을 부합시켜 서양의 수준 높은 청중을 감동시키고 그만한 위치에 올랐다는 것은 놀라운 일입니다. 그런 사람이 38년이나 고향을 찾지 못하고 고생을 하는데 공교롭게도 그가 제 친구입니다. 그러니 더 마음이 쏠리지요. 이제 제가 할 일은 그가 악보에 쓴 대로 최선을 다해 지휘하는 것입니다.

서울ㆍ광주ㆍ부산에서 열리는 윤이상 관현악의 밤에서 교향곡 3번, 바이올린 협주곡 1번,〈광주여 영원히〉를 지휘하십니다. 벌써부터 음악회 열기가 뜨겁게 달아오르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사실 일반 애호가들에게 윤이상씨의 음악이 제대로 이해되기는 쉬운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사실입니다. 그의 음악은 어떤 오케스트라에게도 편안하지 않으며 어떤 청중에게도 쉽지 않습니다. 고전파와 낭만파 작곡가에게 문제가 되는 것이 개별적인 악기였다면, 그에게 중요한 것은 악기군이요, 메시지라 할 수 있습니다. 군데군데 작은 클라이막스를 넣어서 청중에게 쾌감을 주거나 가려운 데를 긁어주는 게 아니라, 자기가 지향하는 정신 세계로 악기군을 가져가려고 애씁니다. 그래서 그의 음악에는 따라 부를 멜로디가 하나도 없어요. 음이 어떻게 이동하리라는 예측조차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의 음악에는 감동이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원래 현대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이 아닙니다. 브람스의 로맨틱한 선율 속에서라야 한숨도 쉬고 행복감도 느낍니다. 직업 음악가니까 할 수 없이 현대 음악도 하는 거지요. 그러나 윤이상의 음악은 달라요. 저는 현대 음악가들의 작품 중 유일하게 윤이상의 작품을 통해 위안 받습니다. 다른 현대 음악가들의 음악이 음의 유희라면 윤이상의 음악에는 확실하고 독창적인 아름다움이 있습니다.

유럽에서 열렸던 윤이상씨 연주회 중 가장 뚜렷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뮌헨올림픽 때 공연되었던 오페라〈심청〉이지요. 규모도 제일 컸고요. 서양 사람들로서는 이제까지 그들이 듣던 음악의 리듬이 아니고 엉뚱한 음이 계속되니까 굉장히 긴장하더군요. 그런 가운데서도 음이 정교하게 구성되어 가니까 감동이 더했던 것 같아요. 딸이 인당수에 빠지고 아비가 ‘청아!’ 하고 부르는 장면에서는 저도 눈물이 납디다. 서독 총리를 위시해서 고관들이 모두 나와 윤이상씨의 성공을 축하했습니다. 당시 주한 서독 대사 ㄱ씨도 한국인이라고 해서 최상급의 귀빈 대접을 받았지요. 다 누구 덕분입니까. 우리가 기억하다시피 오페라〈심청〉공연은 볼프강 자발리슈의 지휘로 뮌헨올림픽 개막을 축하한 것이었으니 큰 열매였지요.

윤이상씨와의 교분은 동백림 사건 공판정에서 ‘눈물의 증언’을 하심으로써 잘 알려져 있습니다. 당시 사회 분위기에 비추어 그런 증언을 하기로 결심하기는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으로 보입니다.
 그때만 해도 제가 열혈 청년이거든요. 곤경에 빠진 친구를 못본 척할 수 없었던 거지요. 다른 사람은 다 가만히 있는데 왜 너만 유독 나서느냐는 얘기를 많이 들었지만, 그때나 지금이나 제 대답은 똑같습니다. 다른 사람들이 왜 가만히 있었는지 알 바 아니고 저는 못참겠더라 이겁니다. 그 뒤로 수십 년간 윤이상 문제만 나오면 수사기관에 불려가는데 아주 신물이 납니다.

윤이상씨로부터 증언해 달라는 부탁을 받으셧습니까?
 아닙니다. 그때 제가 서울예고 교장으로 있을 땐데, 윤이상씨 변호를 맡았던 황성수 목사가 찾아왔더군요. 윤씨에게 당신을 위해 증인을 설 만한 사람이 없느냐고 물었더니 ‘임원식이라면 혹시 모르겠다’고 하더라는 거예요. 간첩죄로 몰려 사형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풍문이 나돌 정도였으니까 어느 누구도 감히 나서려고 하지 않았지요. 부산 피난 시절에 그의 실내악곡을 초연하면서 알게 된 이래 저는 누구보다도 그를 신뢰했고 사랑했습니다. 제가 증언하겠다고 하자 중앙정보부가 못하게 협박하더군요.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이 사람들이 재판이 끝나고 나서는 오히려 제게 용기 있는 태도였다느니 하면서 칭찬을 하는 거예요. 알고보니 제가 증언을 함으로써 외신기자들을 통해 전세계에 그 재판이 공정했다는 사실을 알리는 선전 효과를 얻었다는 거예요.
 
그 후로 윤이상씨가 자주 북한을 방문해서 친북 인사라는 인상을 주었는데요. 물론 국적이 서독이었으니 우리 실정법에 저촉된다고 볼 수는 없지만, 지금까지 그런 편향에 대한 시각이 일소되지 못하는 결과를 초래하지 않았습니까.
 저도 대한민국 국민의 한 사람으로서 그 점은 불만입니다. ‘이 문딩이 자식아, 공연히 오해 살 짓을 왜 하냐’고 말린 것도 사실입니다. 그러나 단언컨대 그가 어떤 조직에 들거나 당원이 된 일은 물론 이북을 이롭게 한 일도 절대 없습니다. 저는 그걸 믿습니다. 동백림 사건 때도 왜 이북에 갔다왔는지 제가 잘 압니다. 부산에서 더블베이스로 활동했던 친구 소식을 알아보러 간 겁니다. 저도 잘 알고 지내던 사람인데 납북되었거든요. 그이 처자가 부산에 남아 고생하는 것도 함께 봤구요. 그런데 공작원 노릇을 했다고 사형하려 들고 공산주의자로 몰고 가니 어처구니없는 일이지요.

올해로 데뷔 5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지난 4월부터 베토벤 교향곡 연주 시리즈를 시작하셨지요?
 꼭 50년 전 하얼빈교향악단을 지휘하여 음악계에 몸담았습니다. 데뷔한 이래 베토벤을 수없이 지휘했지만 이번처럼 교향곡 전곡을 시리즈로 연주하기는 처음입니다. 베토벤은 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음악을 인간의 음악으로 끌어내린 사람이요, 교향곡의 형식을 파괴한 혁명가입니다. 최악의 상황에서 좌절하지 않고 승리를 거뒀다는 점에서 베토벤과 윤이상은 닮아 있습니다. 올해는 이처럼 세찬 인물들이 맞상대하려니까 기운이 더 나는 것 같습니다.

부산 피난지에서 서울예술고등학교를 설립을 주도하실 정도로 음악 교육에 헌신하셨습니다만, 아직도 음악 공부를 제대로 하려면 유학을 가야 한다는 것이 사실 아닙니까.
 음악 대학의 입시 정책이 전문가를 육성할 수 없게 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강동석이 바이올린만 잘하면 됐지, 미적분도 잘풀어야 한다고 말한다면 그게 제 정신을 가지고 할 소리입니까? 지금 대학 입시 정책은 그런 주문을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이 나라의 아이들은 악기를 들고 한창 실기를 연마해야 할 나이에 대학 문을 들어서기 위해서 악기를 팽개쳐 버리고 영어ㆍ수학 과목에 매달리고 있습니다. 거기에다 국내 교육만으로는 대성할 수 없으니까 너도나도 외국으로 달려나가는 겁니다. 다행히 예술종합학교가 생겨 숨통이 트였으나 그것만 가지고는 어림없습니다. 우리나라 음악대학 입시가 모두 실기 위주로 전환되지 않는 한 이 문제는 해결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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