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쪽같은 ‘가짜’ 컴퓨터 요술
  • 김상현 기자 ()
  • 승인 1994.09.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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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 3차원 그래픽 아직은 초보…인력도 태부족


 바다 위를 날아 섬으로 다가간다. 해변에 빽빽이 지어진 초현대식 빌딩들이 눈앞으로 다가든다. 호텔ㆍ콘도미니엄 같은 휴양 시설이다. 골프를 즐기기에 더없이 알맞은 구릉과 들판, 울창한 숲 사이로 난 산책로, 갖가지 첨단 시설을 갖춘 체육관도 나타난다. 섬 전체가 하나의 거대한 관광단지로 탈바꿈한 제주도의 몇 년 후 모습이다.

 이것은 제주도가 민간 자본을 끌어들여 내년부터 조성하게 될 관광단지의 미래상을 보여주기 위해 제작한 비디오에 담긴 풍경이다. 여기에서 골프장과 해변은 실제 풍경이지만, 호텔ㆍ콘도ㆍ체육관 같은 건물은 사진만큼이나 정밀한 ‘진짜 같은 가짜’이다.

 이 비디오에는 요즘의 한 ‘유행’이 담겨 있다. 바로 3차원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다. 실재하지 않는 사물이나 풍경을 진짜 있는 것처럼 입체적으로 표현하는 이 기술은, 이제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의 수준으로 발전했다. 제주도청은 9월 초부터 시작하는 민간 기업 참가 홍보에 이 비디오를 활용할 계획이다.

70년대〈스타워즈〉처음 사용
 지난해 열린 대전 엑스포를 계기로 본격적인 관심을 끌기 시작한 3차원 그래픽은 이제 광고ㆍ영화ㆍ건축ㆍ교육ㆍ사진 등 거의 모든 분야에서 맹위를 떨치고 있다. 텔레비전 프로그램의 타이틀에는 예외 없이 3차원 그래픽이 쓰이고 있으며, 광고 분야에서도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는 데 한몫 하고 있다. 갖가지 첨단 기법 때문에 유명해진 영화〈구미호〉는 ‘한국 최초로’ 3차원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본격 적용했다는 사실 때문에 한국 영화사에 남을 것이다.

 국내에서는 이제야 3차원 그래픽에 관심을 기울이고 여러 방면에 응용하려 시도하고 있지만 미국ㆍ일본 같은 나라에서는 이미 십수 년 전부터 기술 개발에 힘써 왔다. 컴퓨터 그래픽을 처음으로 소개한 영화〈스타워즈〉가 70년대에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상기한다면 그 역사는 이미 20여 년을 헤아리는 셈이다.〈스타워즈〉를 만들었던 조지 루카스 감독은 그뒤 컴퓨터 그래픽 전문집단인 IL&M(Industrial Light & Magic)을 설립해〈스타워즈〉2,3편,〈터미네이터 Ⅱ〉〈쥬라기 공원〉같은 공전의 히트작들을 계속 양산해 냈다. 이 영화들은 처음 선보일 때마다 눈에 띄게 진보한 첨단 3차원 그래픽 기술로 사람들을 놀라게 했는데, 특히 지난해 나온〈쥬라기 공원〉은 컴퓨터 그래픽 기술을 한 단계 끌어 올린 혁명적 작품으로 평가받는다.

 이 영화에서 티라노사우루스가 자동차를 찌그러뜨리는 장면이나 도망가는 자동차를 추적하는 장면은, 실제로는 티라노사우루스 없이 촬영된 것들이다. 공룡의 무게를 예측해 차를 찌그러뜨리고, 그 위에 컴퓨터 그래픽으로 그린 공룡을 올려놓은 것이다. 갈리미수스떼가 평원을 달려가는 장면이나, 브론토사우루스가 풀을 뜯는 장면도 실제로는 존재하지 않았다. 컴퓨터 그래픽의 마술이었던 것이다. 공룡의 호흡, 근육의 미묘한 움직임, 공룡이 움직일 때마다 달라지는 그림자 등은 이미 진짜와 가짜를 구별하기 어려운 지경에까지 오른 첨단 컴퓨터 그래픽의 진수를 보여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국내 사정은 어떤가. 영화〈구미호〉제작에 참여했던 한국과학기술연구원 시스템공학 연구소 金東鉉 박사는 애쓴 만큼 만족스런 결과가 나오지는 않았다고 말한다. “컴퓨터 그래픽 기술 차원에서만 본다면 외국에 비해 결코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보지만 이번이 첫시도여서 시행착오가 많았던 것 같다.”

 컴퓨터 그래픽에 사용하는 하드웨어의 경우 대부분 미국의 실리콘 그래픽스사 제품을 쓰기 때문에 외국과 별 차이가 없다고 보아도 무방하다.

 국내 컴퓨터 그래픽 기술이 선진국보다 10여 년쯤 낙후해 있다는 진단은 대개 소프트웨어 분야에서 나온다. ‘컴퓨터 그래픽/가상 현실’ 분야가 ‘국가 핵심 소프트웨어 기술 개발계획(STEP 2000)' 과제에 포함된 데에서 보듯이, 정부도 그 중요성을 인식하고 있다. STEP 2000은 특히 소프트웨어의 원천 기술을 높이는 데 주력하고 있다. 이를테면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크레파스며 붓을 만드는 기술이다. 한국과학기술원 신성용 교수(전산학)는 “한국이 소프트웨어 원천기술이나 운용기술, 예술적 노하우 등에서 외국보다 뒤진 것은 사실이지만 이미지 모핑이나 소프트 셰도잉 기법처럼 우리가 앞선 분야도 없지 않다”라고 말한다.

 82쪽의 사진이 바로 국내에서 새롭게 개발한 이미지 모핑(image morphing) 기법으로 신교수가 소개한 것이다. 여자의 얼굴이 감쪽같이 여우로 변하는 장면을 담은 영화〈구미호〉의 포스터로 인해 일반에게 3차원 그래픽의 상징처럼 인식되는 이미지 모핑 기법은, 2개 혹은 그 이상의 서로 다른 이미지가 자연스럽게 변화하는 모습을 처리하는 기술이다. 그러나 이 사진에서 보여주는 모핑 기법은 그 변신 양태가 좌우, 혹은 상하 방향으로 파도 모양을 이룬다는 점에서 단순 모핑 기법과 다르다.

 한국과학기술원 계산이론연구실 이승용씨가 최근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변형기법을 이용한 영상 모핑〉에 소개된 이 기술에는 복잡한 계산과 남다른 창의력이 요구된다. 20년이 넘는 컴퓨터 그래픽 역사를 가진 미국에서도 여전히 단순 모핑 기법만이 쓰일 뿐이다. 이씨의 이 기법은, 날아가는 돌의 그림자나 떨어지는 손수건의 펄럭임을 실제처럼 표현하는 데 성공한 소프트 셰도잉(soft shadowing) 기법과 함께 매우 독창적이고 진보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팀 플레이로 열세 극복해야”
 이러한 부분적인 성과에도 불구하고 국내 3차원 컴퓨터 그래픽의 미래는 그리 밝지 못하다. 컴퓨터 그래픽에 쓰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가 죄다 수입품이라는 점이 문제의 시발점이지만, 그것을 제대로 쓸 줄 아는 인력조차 턱없이 모자란다는 것 또한 큰 문제로 지적된다.

 유선 텔레비전 개국 바람을 타고 형편은 더욱 나빠졌다. “유선 텔레비전쪽 수요 인력만 7백명을 헤아리는데 국내 컴퓨터 그래픽 인력은 어림잡아 5백명밖에 안된다. 여기에 지역민방 수요까지 감안하면 인력난은 더욱 극심해질 것이 분명하다”라고 김동현 박사는 예측했다.

 국내 컴퓨터 그래픽 회사들의 규모가 영세한 것도 문제다. 정부 기관인 시스템공학연구소가 영화〈구미호〉제작에 나서야 했을 만큼 사정은 비관적이다. 영화〈터미네이터 Ⅱ〉를 만들 때 쓰인 컴퓨터 워크스테이션이 24대,〈쥬라기 공원〉제작에 동원된 워크스테이션은 무려 75대였다. 아무리 뛰어난 기술을 가졌더라도 그만한 규모의 장비를 동시에 가동할 역량이 못된다면 뒤따라가며 베끼는 데 머무를 수밖에 없다.

 김동현 박사는 기존 컴퓨터 그래픽 인력 재교육, 새로운 인력 양성과 함께 유관 기관간의 긴밀한 협력 연구가 절실하다고 말한다. “외국보다 인력이나 자본 모두 열세일 수밖에 없는 우리 형편에서는 팀 플레이가 필수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최근 과학기술처가 설립키로 한 ‘영상소프트웨어 기술지원 센터’는 컴퓨터 그래픽을 포함한 여러 첨단 영상 기술을 지원ㆍ취합ㆍ전파하는 구심점 노릇을 할 것으로 보여 주목된다.
金相顯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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